제10장. 무너진 육지, 견디는 바다

등록일202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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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무너진 육지, 견디는 바다

                                    -6.25전쟁과 해운 해기의 역할

 

1950년 6월 26일, 전쟁이 발발하고 하루가 지나서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 동경의 미국극동군사령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에 이승만은 각료들과 함께 대전행 특별열차로 서울을 빠져 나갔는데, 다시 그 다음 날에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다리가 폭파된 것이다. 6월 28일 새벽에 한강 다리가 폭파되어 차량 다수와 500명 이상이 사망했지만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이후 어쩔 수 없이 서울에 갇힌 시민들은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공산치하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다.

 

6.25전쟁은 전 국토를 피로 물들였다. 통계상으로 남 북의 군, 민간인 모두 합하여 사망 약 77만 명, 부상자 180만 명, 실종 70만 명의 인명이 희생되었고, 사상대립의 심화와 전중부역자 처벌과 같은 후유증과 함께 가족 이산의 슬픔을 남겼고 부모를 잃은 고아들과 신체를 손상한 상이군인 등으로 심각한 사회문제를 낳았다. 뿐만 아니라 주택과 도로와 산업시설 전반이 파괴되어 한반도는 지구상에서 가장 비참한 땅, 굶주린 거지들이 거리를 떠돌고 불신으로 가득 찬 눈들이 희번덕거리고 도둑강도가 판치고 회생할 희망이 없는 대지가 되고 말았다.

 

도움은 바다에서 시작되었다. 전쟁과 전후에 수많은 원조물자들이 바다를 건너 부산항으로 들어왔다. 이것이 육지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되었고, 한국 해운에게는 어떤 기회가 되었다. 우리에게는 바다가 있었고, 그 바다에는 해운을 수행할 수 있는 30여 척의 선박과 뛰어난 능력의 해기 전문인들이 있었다. 부산항에 내려진 물자들은 우리의 화물선에 실려 인천, 군산, 목포, 여수, 순천, 마산, 울산, 포항, 삼척, 동해 등지의 연안 해륙접속지로 운송되었다. 전시에 이 선박들의 활발한 운송활동은 당시 부산역에 설치된 대한해운공사의 임시사무소의 활동에서도 잘 나타난다. 당시 연안운송을 맡은 자사 선박의 배선과 선박관리 선원관리를 진행하던 사무소 직원들의 분주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왕성한 해상운송 활동은 그것을 수행하는 해기인들로 하여금 단시간 내에 해기기능을 숙련시키는 작용을 했다. 이것은 해운이 필연적으로 국가 기간산업이게끔 되어 있고 전쟁 전 막 출발한 대한해운공사의 해운 수준이 미성숙 상태이어서 현장의 해기에게 그 활동의 기회가 충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 매우 유의미했다 할 것이다.

 

전시에 한국 해기 수준의 상승은 증가하는 전쟁물자의 수송을 위하여 미국이 8척의 선박을 대여하기로 결정한 데서 이루어졌다. 도입된 선박은 모두 그 설비와 기기가 최신의 것이어서 그것을 운항할 한국 해기인력을 일본 요코스카에 있는 교육센터로 파견한 것이다. 전쟁 중은 물론이고 전후에도 미국은 한국 지원의 일환으로 선박을 원조 또는 대여 했는데 그 때마다 대두되는 문제가 선박 운항을 누가 할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미국은 외국인 해기사(주로 일본인이었다)를 주장했지만 우리는 우리 해기사를 끝까지 고집하고 그 뜻을 관철시켰다. 도입 선박에 대한 운항 주체를 놓고 대립하고 절충하며 해결해 나간 그 대표적인 인물은 대한해운공사의 윤상송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한국에게 도입되는 선박은 그 인수과정부터 한국 해기에게 맡겨야 한다는 그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1953년 7월, 휴전이 되면서 징발 선박들과 동원된 해기인력들은 민간으로 돌아갔고 대한해운공사는 해운경영을 재개했다.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실직자와 유휴인력이 항만의 부두로 몰렸고 하역업과 운송업은 혼란과 무질서가 극심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해운업에도 사람들이 몰려 한국의 해운1번지 부산 거리에는 ‘선원 구함’이란 광고지가 부착되어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 중 상당수의 사람들이 대일 항로에 취항하는 화물선에 승선하길 원했다. 전쟁 중에 정상적으로 문을 연 대일항로, 그것을 오가는 대일선에는 수많은 물품들이 적재되고 양화 되었는데 상당수가 ‘보따리장사’라고 일컫는 비정상적 교역이었다. 당시의 밀수 중에는 마약류와 같은 수입금지품이나 대형 밀수가 발각돼 사회적으로 심각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대일무역 의존도가 커져 갔지만 한국 선박의 화물 적취율은 매우 낮았다. 수출이고 수입이고 한일 항로는 일본 선박으로 넘쳐났는데 한국의 화주들은 한국 화물선이 수송할 수 있는데도 일본 쪽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의 개항 항에서 이와 같은 일본 선박의 출입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구한말에 일본 해운의 침투로 한국 해운이 고사했던 상황을 보는 것 같아 심각한 우려와 위기감마저 들 정도였다. 한국 해운업계는 후에 이와 같은 열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한국 해운계가 적어도 연안수송만은 어느 정도 해결하고 있었다더라도(사실은 거기에도 적지 않은 문제가 존재했지만) 외양해운은 아직도 요원했다. 운항 가능한 기본적인 선대와 유능한 해기인력을 갖추었지만 문제는 육지 쪽에 있었다. 국토 전체가 심각하게 파괴되고 생산할 산업시설이 전무하여 수출은 농산물이나 광물 정도에 불과했다. 해운의 성립 요건 중에 화물이 절대 부족한 것이다. 물론, 자본은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모든 것보다도 더 문제는 사람들의 ‘의식’ 문제였다. 전쟁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패배의식, 절망의식에 사로잡혔고 툭하면 자기조소, 자신을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일관하곤 했다. 그런 식의 사회 분위기는 물질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다. 그것은 선박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교육 수준이 낮은 하급 선원에게서 더욱 심했다. 그러므로 희망을 잃지 않는 것, 아무리 어려워도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이 필요했다. 다행히 우리 해운계에는 그런 의지와 철학을 가진 시대의 사명자, 개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일제치하에서 전쟁수송선으로 징병된 한국인 해기사들로서 대양을 건너면서 해양국가의 속성, 그 민낯을 속속들이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신의 평안을 포기하고 해운입국의 험난한 기초공사에 온몸을 던지고 있었다.

 

□ 심호섭, 해양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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