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대양을 건너는 해기

등록일202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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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대양을 건너는 해기

-한국근현대해운개척기 원양항해 선원들의 노동상황

 

해양국가란 어떤 나라인가, 라고 물을 때 여러 가지 답변이 나올 수 있겠지만 대양을 건너는 ‘일단의 세력’을 가진 나라가 해양국가이다, 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 무엇보다도 대양을 건너야 해양국가이다. 연안을 오가는 수많은 배들이 있고 해안 또는 그 가까이에서 아무리 어로 채취 활동을 많이 한다 한들, 그것은 ‘연안국가’에 불과하다. 고대의 바이킹, 그리스, 중세의 베니스, 제노바 등이 건넌 바다가 대양은 아니지만 당시의 항해 수준 무역과정으로 볼 때 대양이었고 근대 초에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이 건넌 바다는 머나먼 대양이었다. 물론 그 전제와 결과는 대륙간 물류에 있었다.

 

1950년대 전체로 볼 때 한국 해운은 여전히 걸음마 단계였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외국 선주의 배를 빌려 영업활동을 할 경우, 그러기 위해서는 용선계약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하여 정확한 지식을 가진 해운인이 그리 많지 않았다. 심지어는 당대에 가장 뛰어난 해기인이며 해운인인 윤상송도 자세히 몰라서 별도로 공부를 해야 했다고 훗날 그의 자서전에서 술회했다. 마찬가지로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멀리 동남아 쪽으로(그때는 동남아시아 해역이 그리 가까운 바다가 아닌 해운실정이었다) 운항하다가 좌초라든지 손상과 같은 사고를 겪게 되면 보험, 수리, 보상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는 영어로 대화가 가능해야 하는데 대부분 그 정도 수준이 못 되어 본사에서 사람을 파견해야 했다. 그만큼 한국 해운은 아직 연근해 수준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1952년 10월, 부산항을 출항하여 태평양을 건너 미국 서부 포틀랜드에 취항한 고려호의 대양항해는 참 의미심장한 일이다. 당시 고려호는 태평양전쟁에서 부산항 앞바다에서 침몰한 6,800총톤의 일본 화물선 ‘가쓰우라마루’를 극동해운이 인양 수리하여 새 이름으로 명명한 화물선이다. 고려호는 한국 최초로 태평양을 건넌 화물선으로서 승무할 해기사를 뽑을 때 특이하게도 해군 함정 요원으로 구성했는데, 이것은 광복 후 해군 창설 시에 상당수의 유능한 해기인력이 해군에 입대하여 고려호와 같은 대형선의 운항 팀을 구성하기가 보다 용이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여전히 전쟁 중이었지만 고려호의 항해는 국가적 행사가 되어 전 해운인들과 부산시민들, 그리고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인사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고려호는 태평양이란 세계에서 가장 넓은 바다를 향하여 떠났다.

 

고려호가 동경 180도선 즉, 날짜변경선을 통과할 즘에 기관고장이 일어났다. 겨울철 북태평양 항해에서 기관고장은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상당수의 상선들이 태평양을 건널 때 대권항해(대개 고위도 항해이다)를 하게 되는데 겨울철 북태평양양의 고위도는 매우 거칠어서 조난사고가 일어나곤 한다. 만약에 기관이 정지하여 배가 보침성을 상실한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침몰을 의미한다.

 

언제 닥칠지 모를 저기압(해양기상에서는 태풍이란 말과 동의어이다)에 초조해진 승무원들의 시선은 온통 기관부 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물론 기관부에서는 그야말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주기관의 피스톤 스커트에서 배기가 누설되더니 급기야 폭발가스 불꽃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예비 피스톤 링이 없어서 속수무책이었다. 부득이 속력을 감소하여 운항했지만 별 뾰쪽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가스누출과 스커트 가열을 막기 위해 실린더 오일을 대나무 끝에 달린 천에 무쳐 밤낮으로 칠해 가면서 운전했다. 가장 원시적인 방법이었지만 그래도 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서 배는 태평양을 건너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 고려호는 미국 포틀랜드에 도착하여 하역작업을 마치고 다시 태평양을 건너 이듬해 1월 10일 무사히 부산항 제1부두에 도착했다.

 

1953년 말, 대한해운공사에서는 선박 1척을 도입하기 위하여 인수단이 결성되었는데, 이태리 현지에 도착한 인수단은 모두 깜짝 놀랐다. 선박 전체를 점검한 결과 배 전체가 낡고 오래되어 도저히 운항할 수 없는 상태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인수단의 이재송 선장은 선박의 현 상태를 대한해운공사 본사에 알렸다. 그러나 이재송과 인수팀의 판단은 묵살되었다. ‘천지호’라 불리어진 이 배의 도입 이면에는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급)가 개입된 당시의 사회와 기업환경으로는 어찌하기 어려운 정치적 배경이 있었다. 그러므로 회사의 응답은 ‘무조건 인수’였다.

 

매우 우울한 항해가 시작되었다. 출항한 천지호는 지중해를 넘고 인도양을 건너면서 4, 5차례의 기관고장을 일으켜 중도에 수리가 가능한 항구에 기항하여 수리작업을 했다. 대양에서 4, 5번의 기관고장, 그것은 4번 5번의 죽음의 위기를 의미한다. 인수단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배가 싱가포르의 수리 조선소에 도착했을 때 선장 이재송은 본사의 사장 앞으로 전문 한 통을 전송했다. 그 내용은 짧게 “I kill you.”였다. 이재송은 태평양전쟁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숱하게 사선을 넘은 사람이었기에 아군과 적군에 대한 개념, 선과 악에 대한 판단과 응징은 매우 명확한 사람이었다. 인수단 전체의 절규이기도 한 이재송의 외침은 바다로 떠나보낸 육지의 권력과 거기에 더부살이하는 무력한 회사 경영자에 대한 경고장이었다.

 

광복 후, 그리고 전시에 전후에 해기는 언제나 국가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했다. 너무나 ‘없는’ 국민, ‘없는’ 국가이기에 해운은 곧 국가의 일부이고 해운의 명령은 국가의 명령이었다. 그 명령을 해기는 온몸으로 받으며 견뎌 내었다. 고려호 천지호 이전에도 그랬지만 현장의 해기는 파도 밭을 뒹구는 낡고 오래된 갑판 위에서 고장 난 기기를 수리하며 녹슨 철판을 긁어내며 밤낮으로 쉬지 않고 항진하고 또 항진했다. 특히 50년대의 고려호와 천지호의 대양 항해는 60년대와 70년대에 한국 해기가 대양에서 뿌린 수많은 고통 고난의 경험적 선례, 그 표상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야 한국 해운은 일어섰고, 한국은 해양국가란 말을 듣기 시작했다.

 

□ 심호섭, 해양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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