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한국 근현대 해운건설의 아버지들

등록일202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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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한국 근현대 해운건설의 아버지들

 

근대를 향한 문명화가 시작되던 구한말에 해운, 해기가 발달하지 못한 데에는 이 분야에 대한 사회일반의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다. 조선의 문명개화 부국강병을 위하여 고심하던 고종과 조정은 해운의 발달과 해기인력의 양성이 절실함을 깨닫고 국가 주도로 해운을 시작하고 선원 양성을 시도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하여 통리기무아문이라는 행정조직을 설치하여 그 아문에 해운을 담당하는 기구를 두었고, 나중에 그것이 실패하자 조곡운송을 담당하던 전운국으로 하여금 해운을 담당하게 했다. 해기인력 양성을 위해서는 청나라에 기선 사관교육 유학을 보냈고, 군함으로 사용하던 양무호를 선원양성소로 하여 선원양성 모집을 공고했지만, 이 모두 그 효과는 미미했다. 이 모든 결과는 다른 요인도 있겠지만 우리 민족의 해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중요한 실패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민족이 먼 바다를 건너 교역하는 해운활동을 멀리 하게 된 것은 대략 고려 말기 이후부터가 아닌가, 추측된다. 명의 주원장이 중국 대륙의 실권자가 되자 그들은 바다의 문을 걸어 잠그는 해금정책을 펴게 되는데 이것은 당시 동아시아 바다를 활동무대로 삼았던 한민족 해상세력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새 왕조는 사대하는 명나라에 따라 바다를 멀리하게 되었다. 결국 이 땅의 대양을 건너는 해상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연안 해운, 섬과 섬 사이 섬과 육지 사이의 협수로를 항해하는 연안 해운만이 한반도의 해양활동이 되고 만 것이다. 그래도 바다를 드나드는 이치는 잊지 않고 계승되었던 것인데 이 해기능력의 우수성을 조선 수군이 이어받았다. 임진왜란에서의 조선 수군의 탁월함은 우리 모두가 아는 바다.

 

조선 시대에 수군은 참 곤고한 직업이었다. 부역기간이 육군보다 배나 길었고, 선상근무뿐만 아니라 해산물 채취와 병선수리 등 여러 가지 잡역에도 동원되었으며 자손에게 물려주는 업이었기 때문에 딸을 가진 집은 수군인 집안에 시집을 보내길 꺼려했다. 이렇게 조선 땅에서 수군이라는 바닷일은 천대되었다. 조정과 사회의 이와 같은 홀대 속에서도 수군이 양성되어 임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조선은 전란 후에도 바다의 중요성을 망각할 만큼 왕조 자체가 바다와는 전혀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임진왜란에서 히데요시의 일본군이 바다를 건너온 것은 그 전에 멀리 대양을 건너온 전 세계로 해양팽창하던 포르투갈 상선대에서 전해 준 당시 세계 상황에 대한 정보와 가공할 전쟁무기인 조총에 힘입은 바가 컸다는 것을 파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다와 바닷일은 경시되었다. 조선은 국란 후에도 바다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결과 마침내 다시 외세는 바다로부터 넘어와 조선은 망국했다.

 

전편에서도 언급했지만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 해운기업을 설립하고 해기인력양성소를 연 것은 전적으로 한반도 식민수탈, 그리고 대륙침략과 남방으로 동남아 해역권으로의 확장을 위한 해상수송 활동의 목적에서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해운기업은 조선우선 오직 하나였다. 그것은 조선총독부가 지정하는 명령항로(19곳)와 자영항로(1곳)로 유지되었다. 그들은 조선인의 해운업 진출뿐만 아니라 해운을 수행하는 주 인력인 ‘해기사’라는 전문 직업에 대해서도 조선인이 진출하는 것을 꺼려했다. 조선인의 일본으로 해기유학은 신순성 이후 오랫동안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1930년대 이후에야 소수의 인원이 입학할 수 있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1919년 이후에 양성소가 설립되어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과 함께 입학이 허락되었는데, 이는 오직 그들의 정책의 필요에 의해 시작되었을 뿐이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에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는데 바다에서도 적지 않은 해기인력이 수장되었다. 해상수송을 담당한 해기사들 중 사망자는 일본인만 5만여 명으로 추산되고 그 외 조선인 사망자도 다수 있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조선인 해기사들은 조국이 해방을 맞자 해군과 해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는데 많은 해기사들이 해군에서 활약했다. 해운 영역은 크게 해운기업, 해운행정, 그리고 해기교육기관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우리로서는 한 번도 시도되어 본 적이 없는 ‘아무도 가지 않은 황무지’ 길이었다. 그야말로 개척자적이고 선구자적인 사명감만이 해 낼 수 있는 험한 길이 예고되고 있었다.

 

다음에 소개되는 인물들은 근현대 한국해운의 개척기랄 수 있는 해방 후부터 1950년대 말까지 혼란과 혼돈, 격변과 빈곤 속에서도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노력과 희생을 아끼지 않은 인물들이다. 이들 중 어떤 이는 육상에서만 활동한 사람도 있지만 상당수가 악조건의 해상에서 근무하면서 조국의 해양국가 성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특별히 한국 해운 건설 초창기에 사익을 포기하고 오직 공익만을 위하여 몸을 던진 육상 해운인들과, 폐선에 가까운 노후된 항해선에서 악조건의 노동을 견뎌낸 ‘해기사’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들의 대부분은 이제 생존해 있지 않는다.

 

한국 근현대 해운건설의 선구자들 : 황부길, 이시형, 윤상송, 이재송, 김용주, 신성모, 박옥규, 홍순덕, 유항렬, 권태춘, 전덕준, 방상표, 정해춘, 정인태, 김원탁, 지석남, 성철득, 석두옥, 양우갑, 오세윤

 

이들의 활약상은 이후 본문에서 자세히 서술될 것이다.

 

□ 심호섭, 해양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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