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한 캔

등록일2020-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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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한 캔

 

 

본 해양활동 기록물은 2014년 전호군님에 의하여 작성되어 한국 해양사회의 대표적인 교회인 한국해양교회의 소식지 ‘미션해양’에 게재되었다. 소식지는 다른 발행 권호와 함께 오랫동안 서류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미션해양 편집부의 협조를 얻어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다. 본 기록물을 작성할 당시 필자인 전호군님은 승선근무 해기사이면서 소속 교회가 파송한 선박선교사의 직임을 맡고 있었는데, 글 중에는 이러한 필자의 활동과 함께 필자가 경험한 항만에 소재한 선원 봉사 단체 기관인 ‘SEAMEN’S CLUB’의 활동과 수고가 잘 묘사되어 있다. 이 모두 선원과 해양활동의 일부이므로 본 게시판에 게재한다.(한국해양문학관cyber 편집실 주)

 

오늘은 OO월 OO일, 야호~~~!

저는 한국인 친구 두명 그리고 인도네시아 선원 몇 명과 함께 미국의 윌밍턴항에서 외출을 했습니다. 이 날은 현지의 SEAMAN’S CLUB에 차량운행을 부탁했습니다. 선교단체의 봉사활동차량이었기에 공짜라는 메리트가 있기 때문이죠. 일반적으로 배에 주부식을 판매하는 업체에서 마트나 관광지까지 차량 서비스를 해주지만, 주부식을 구입하지 않는 경우라면 외국에서 택시를 부르는 것보다는 SEAMAN’S CLUB도 괜찮은 선택입니다. 선원들이 통장에 잔고는 많아도 지갑 속 용돈은 항상 제한적이거든요.

시각은 저녁 8시쯤. 조금 늦은 시각이었지만 SEAMAN’S CLUB에서 미국인 영감님이 차량을 몰고 우리 배 앞에 왔습니다. 사실 영감님이 다른 배에도 들른다고 약속시간보다 30분 정도 늦었어요.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영감님께 우리를 대형마트까지 데려다주고, 쇼핑이 끝나면 다시 배까지 태워달라고 했습니다. 영감님은 시간이 늦어 마트에 도착하면 저녁 9시쯤이 될 것이라 하고, 마트에서 다시 출발은 9시 30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실망감에 입이 뾰루퉁 나오고 눈이 찌푸려집니다. 기왕이면 좋은 마트에 가서 많이 구경하고 맛있는 것도 사먹고 싶은데, 고작 가까운 마트에 가서 겨우 30분이라니! 차를 타고 마트에 가는 동안 우리는 배로 돌아올 때 이 영감님 차량보단 택시를 이용하는게 더 좋을지 서로 이야기를 합니다. 아무래도 쇼핑할 시간도, 적당히 외식할 시간도 너무 없습니다. 선원들에게 외출은 황금같은 시간입니다. 몇 개월간 바다위에만 있다가 배가 정박을 하면 동료에게 당직을 몰아주거나 아니면 자야할 시간에 잠을 포기하고 외출을 합니다.

마트에 도착하니, 영감님이 우리 얘기를 들으셨는지 9시 45분에 출발하겠다고 합니다. 15분 연장했습니다. 15분이면 마트 한바퀴 더 돌고, 피자랑 햄버거도 주문할 수 있는 시간이지! 우리는 이것저것 살 것들을 기억하며 웃으며 마트 안에 들어갑니다. 영감님은 마트입구에서 기다리겠다며 쇼핑이 끝나면 입구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뭐, 어디 좀 돌아다니다 오시는 편이 마음이 편하겠는데, 굳이 기다리겠다고 하시면 조금 죄송하지만 우리도 낯선 외지에서 덩그러니 차를 기다리기는 그러니까 일단 그렇게 하기로 합니다.

한동안 배에서 못 먹었던 신선한 과일, 미국산 초콜릿, 아들과 딸에게 사다줄 장난감, 아내에게 줄 선물, 여자친구에게 줄 선물 그렇게 한가득 사들고 카운터로 갑니다. 선원은 통장에 잔고는 많아도 실상은 작은 것에 기뻐하는 사람들이고, 자녀들과 아내를 사랑하는 기러기 아빠, 남편 또는 남자친구입니다. 삑!삑! 오랜만에 드는 바코드 소리, 미국산 바코드라 경쾌하고 즐거운 소리인가 봅니다. 그런데 경쾌한 바코드 소리가 잠시 멈추었습니다. 카운터 직원이 맥주는 신분증 없이 판매할 수 없다며 신분증을 요구합니다. 당연하지! 마침 여권과 미국비자를 복사해둔 것이 있어 그것을 당당히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성인이라구요!”. 그런데 직원이 말하길 “미안, 못 팔아요”.

맥주를 너무 마시고 싶던 친구는 짜증이 너무 났습니다. 솔직히 우리들 중에 학생처럼 생긴 사람이 있을까? 너야? 나야? 아무리 생각해도 없습니다.

“아놔~ 왜 안되는데!!” 한국인 친구 한명이 동양인을 무시하는거라며 짜증나서 매니저를 부르라고 직원에서 따집니다. 아~ 일이 커졌습니다. 매니저랑 이래저래 실랑이를 벌이는데 매니저도 안된다고 합니다. (이정도 되면 ‘맥주 한 캔 안마시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음주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잠시잠간 미국 잔디밭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소박한 버킷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산되는 것이 너무 싫은 겁니다)

“아차! 좋은 생각이 났어!” 친구는 우리 신분으로 구입이 안되면 영감님에게 사달라고 부탁하자고 합니다. 우리는 역할을 나누었습니다. 친구는 제일 맛있는 맥주를 고르겠다며 주류 진열대로 가고, 저는 영감님께 대신 맥주 구입해 주기를 부탁하러 갑니다.

“실례지만 저희 대신 맥주를 사주실 수 있나요? 카운터 직원이 말하길 저희 신분으로는 구입을 할 수 없데요.”

영감님은 왠지 조금 시무룩한 표정이었지만 문제없으니 가서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래도 왠지 범법하는 것 같아 카운터 직원에게 가서 저 영감님이 우리 대신 술을 구입할 수 있냐 물어보니 안된다고 합니다. 카운터 직원에게 알겠노라하고 저는 다시 영감님게 가서 말합니다.

“카운터 직원이 대신 사는 것도 안된대요. 아쉽지만 그냥 안 사지요 뭐.”

맥주 사는 걸 포기하고 잠시 친구를 보러 다녀오는 사이, 아까 봤던 매니저랑 영감님이랑 무슨 얘기를 합니다. 제가 영어가 서툴러 잘 듣지 못하지만 매니저의 이 말은 왠지 잘 들립니다.

“굳이 뭐하러 저 외국인들 때문에 영감님이 맥주를 대신 사려고 하세요?”

고된 선박생활 중에 간신히 나와서 맥주 한 캔 사려고 한 것인데 그게 그렇게 힘이 듭니다. 미국인의 따가운 눈총도 받고 있군요. 이번엔 아까 매니저보다 높은 상급매니저가 나와서 미안하다며 다음부터는 여권이랑 미국비자 원본을 보여주면 살 수 있을 것이라 안내해줍니다. 결국 맥주는 못 샀습니다. 친구는 그것이 너무 분하고, 왠지 동양인을 무시한 것 같다며 계속 툴툴 거립니다.

윌밍턴항에서 출항을 하고, 기도하고 생각해 보니, 그 영감님은 SEAMAN’S CLUB에서 일하는 항만선교사님이었습니다. 해양교회 대학부 신앙생활 중에 외국항에 가면 차량봉사해주는 선교사님들이 있다고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선원인 우리에겐 평범한 운전기사니까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저는 교회 목사님께 대신 맥주 좀 사달라고 한 거네요.

그리고 선원을 생각하는 항만선교사님께 너무 감사했습니다. 한명의 선원도 놓치지 않으려고 선박 앞에서 묵묵히 기다리시던 모습, 맥주를 대신 사달라고 할 때 그 영감님의 고민하던 모습, 그 분 직업에 맥주를 사야할 일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을까요. 침상에 누웠는데 저를 포함한 우리 선원들의 철없는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잠이 오지 않습니다.

혹여나 선원들이 불쾌해할까 단 한마디의 메시지 “예수 믿으세요”라는 이야기도 꺼내지 않고, 묵묵히 운전기사로서의 역할만 담당했던 선교사님. 자신을 깎고 깎아 하나님 앞에서 선원들에게 봉사하겠다는 마음을 다짐하는 선교사님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돌아보면 베다니 시절 목사님, 전도사님, 간사님 모두 조도와 교회를 다니는 운전기사로서 역할들을 충실히 담당해주셨는데 그 헌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지금도 저 바다 어딘가에서 승선 중일, 형, 누나, 친구, 동생 선박선교사께. 모두모두 힘내서 바다 위에서 신앙 잃지 말고, 선원들을 위한 중보기도자로 견고하게 서 자구요! 하나님의 영은 바다 위에, 이 선박 위에 항상 살아 일하고 계십니다.

 

전호군ㅣ한진 윌밍턴호 2등항해사

 

* 이 글의 필자인 전호군 님은 2014년에 승선근무를 마치고, 지금은 주일 아침이면 봉고차를 몰고 대학부 학생들을 태우러 해양대 캠퍼스로 향하는, 마치 오래전 필자가 만난 SEAMEN’S CLUB의 항만선교사가 그랬던 것처럼 선원에게 봉사를 하는 행복한 운전기사가 된다고 본 교회 교역자 사모인 김정옥님이 소식을 전한다.

 

□ 자료출처 : 격월간 정기간행물 <미션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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