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초월하지 못한 세월호(世越號)

등록일202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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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초월하지 못한 세월호

조 득 춘 Ⅰ 리앤쉽핑 기관장, 연극인

 

 

지난 4월은 참으로 잔인했다. 영국 시단(詩壇)의 금자탑으로 꼽히는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에서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

봄비로 잠든 뿌리를 흔들어 깨운다 / 겨울은 우리에게 오히려 따뜻했었다 / 망각의 눈

으로 대지를 덮어주고 / 마른 구근으로 가냘픈 목숨을 먹여 살려 주었다 / 살아 있던

그는 지금 죽었고 / 살아 있던 우리는 지금 죽어간다 / 약간씩, 견디어 내면서.

 

세월호가 침몰했다. 너무나(!) 전형적인 인적과실(Human error)의 해양사고였다. 인간을 초월한다는 세월호(世越號), 자신의 이름이 지닌 의미처럼 인간을 초월하지도 못했고, 그 인간들의 끝없는 탐욕 앞에 속수무책으로 전복하고 말았다. ‘청해진’을 교두보(?)로 한 복잡 다양한 이해집단과 이른바, ‘관피아(관료사회+마피아)’라는 무리들이 엮어 놓은, 얽히고설킨 무수한 과실의 고리(Error chain)에 그만 걸려들고 만 것이었다.

2014년 4월 16일. 이제 막 꽃샘을 지난 수영강변에는 봄을 재촉하는 연분홍 겹벚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창 밖 광안대교 위로는 수많은 차들이 쉴 새 없이 오가며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분주한 일상인데, 우리의 생떼 같은 아이들과 선량한 승객들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채 죽어갔다. 그 때 나는 봄철 축제(부산연극제와 부산국제연극제)의 한복판에서 그 놈의 배가 왜 침몰했는지도 모르고, 여기 저기 굿판을 기웃거리며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두 눈 멀쩡히 뜨고 수백 명의 어린 생명들이 죽어가는 것을 오롯이 지켜보면서 나는 문득, 나도 한사람의 일선 해기사임을 스스로 자각하며 내가 시방 연극(예술)을 하고 있다는 굿쟁이 특유의 오만함이나 설레임 따위가 약간 사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연극은 끝났다. 관객은 박수를 쳐서는 안 되고 칠 수도 없었던 김빠진 축제였다. 나는 속으로 화가 났다.

“멍청한 선장 같으니라고!”

최소한의 선교절차지침(BPG ; Bridge Procedue Guide)도 지켜지지 않았고, 여객선의 긴급 구조요청이란 것이 무슨 멸치잡이 배도 아니고, 마치 뒷집 마당쇠 부르듯이 ‘아, 지금 배가 넘어가고 있습니다’라니!

배깨나 탔다는 사람은 다 아는 상식이지만 SOLAS(해상인명안전규약)의 발효 이후 선박의 긴급구조신호인 모르스 부호(S.O.S.)는 이제 사용하지 않는다. 전화기만 들면 언제 어디서나 외칠 수 있는 ‘May Day! May Day!’가 있지 않은가.

선장과 당직 항해사는 <May Day>란 용어를 왜 몰랐을까? 아니 그래, 세월호가 아무리 국내선이라고 해도 그렇지 G.T.가 6,825톤이나 되는 여객선을 G.M.(선박 무게의 중심) 값이 얼만지도 모르고 덥석 출항을 해 버리다니! 선박의 복원력과 G.M. 흘수(배가 물 속에 잠기는 깊이의 정도), 횡요주기(선박이 좌우로 흔들리는 반복의 주기), 벤딩 모멘트(선박의 선체가 종횡으로 휘어지는 힘) 등등. 이와 같은 것들은 웬만한 초급 항해사도 다 아는 실무이거니와, 출항 전에는 ‘하늘이 무너져도 챙겨야’ 할 선박 화물적화법의 기초다.

며칠 후 연극제가 끝날 즈음, 아마 구조작업(사실은 시체 인양작업)이 한창일 때였을 것이다. 나는 평소 알고 지내던 잡지사 A기자로부터 뜬금없는 원고청탁을 받았다. 세월호에 관한 글을 써 달란다. 그는 내가 굿쟁이 해기사라는 좀 별난 이력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이미 그날 조간신문에 실린 소설가 선장 L씨의 칼럼을 읽고 나서 시무룩해 있었고, 세월호 선장이나 나나 바다의 최일선에 있는 같은 해기사로서 약간의 공범자의식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이번 사고로부터 그닥 자유롭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껏 분향소에 국화꽃 한 송이도 바치지 못한 나는, 글줄깨나 쓴답시고 ‘제일 먼저 도망친 비겁한 선장’ 운운하며 이준석 선장을 열렬히 성토하는 그 L선장이 영 못마땅하던 참이었다. 이것은 ‘자기도 선장이면서’라는 내 못난 심보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휴가 중인 K선장에게 느닷없이 전화질을 했다.

“캡틴, 여객선의 가장 이상적인 출항 G.M.이 대관절 얼마요?”

“아니 기관장, 밑도 끝도 없이 왜 그런 걸 물어?”

“세월호가 ××센티미터로 출항했다는데요.”

“미치고 환장한 놈들이지.”

“여객선의 횡요주기는 얼마가 적당해요?”

“기관장이 이젠 선장의 밥그릇까지 넘보는 군.”

“아니, 배가 침몰했는데 무슨 놈의 A.I.S.는? V.D.R.은 어디 엿 사먹었나?”

“세월호는 국내선이라서 SOLAS 적용이 안 되니까 V.D.R. 같은 건 안 달고 다녀.”

매스컴에서 하도 A.I.S.(선박자동식별장치)가 어쩌구저쩌구 하길래, 나는 당연히 V.D.R.(선박자동항행기록장치-선박용 블랙박스)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세월호는 국내선이라 SOLAS의 적용을 받지 않으니까 안 달고 다닌다니 더욱 기가 찰 노릇이었다.

“캡틴, 신문에 난 건 모조리 잡학 나부랭이들뿐이라오.”

“기관장, 나 요즘 신문 안 봐.”

“전문가들은 죄다 어디로 숨어 버렸는지. 꿈쩍도 안 하고…, 내 참!”

“왜, 기관장이 한 번 쓰고 싶으오?”

“원고청탁이 들어왔소이다.”

“잘 써 보시오. 선장만 너무 여론의 몰매를 맞고 있는 것 같소만.”

“일 없습니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할 게 뻔한데.”

“지난 4월호 「海바라기(해기지)」 보았소?”

“SK해운의 어떤 선장이 쓴 여객선 사고사례 말이군요.”

“압권이었소. 세월호 선장이 가장 먼저 읽었어야 했던 글이오.”

“사고 직전에 기고한 걸 보면 선견지명이 있는 분 같았어요.”

지난 4월 「海바라기(해기지)」 에 실린 『코스타 콩코르디아호의 좌초사고』라는 제하의 회원리포트는 2012년 1월 13일 이탈리아 서해안의 질리오섬 해안에서 좌초 전복된 11만톤급 이탈리아 여객선 콩코르디아호의 사고 내용이다.

당시 여객선에는 승객 3,206명과 승무원 1,023명을 합하여 총 4,229명이 타고 있었고, 이날 사고로 승객과 승무원 32명이 죽고 2명이 실종된 대형 해양사고였다.

(세월호 사고가 나기 전에 이미 기고한, SK해운의 임재식 선장이 쓴 압권의 리포트다. 해기사 여러분의 일독을 권한다.)

나는 K선장과 통화를 하고 나서 얼른 잡지사로 전화를 했다. 모처럼 들어 온 원고청탁이지만 나는 차마 그 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맙긴 하지만 난 아무래도 못하겠어.”

“조형, 그냥 쓱쓱.”

“이럴 땐 차라리 전제용 선장을 한 번 만나 보시지.”

“그 사람 누구예요?”

“보트피플 96명을 구조한 선장 말이야. 이장호 감독이 곧 영화로도 만든다는데.”

“네? 지금 어디 사는데요?”

“기자라는 사람이 아는 것 하고는.”

1985년 11월, 죽어가는 베트남 보트피플 96명을 구하고 2009년 대한민국 국회가 주는 ‘올해의 인권상’을 수상한 그 분은 지금 경남 통영에 계신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넘은 지금도 실종자 수색이 한창이다.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있었던 어제, 나는 난생 처음 대한민국 대통령의 눈물을 보았다. 그리고 ‘세월호 선장이나 나나 일선에 있는 같은 해기사’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른 더위를 탓하며 여태껏 차일피일 미루던 분향소로 서둘러 조문하러 가야겠다.

 

□ 자료출처 : <월간 海바라기> 2014년 6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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