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의 소중함

등록일2020-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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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의 소중함

임순택 ㅣ 엠쉽메니지먼트 1항사

 

 

1980년 2월 중순, 오랜 옛날의 일을 회상해 본다.

조금만 기다리면 졸업을 하는데도 그 기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3항사로 첫 배에 승선하게 되었다.

많은 동기생들이 그러했듯 나의 가정도 생계가 막막한 때이었기 때문이었다. 부모와 형이 모두 수입이 아무 것도 없었다.

6개월의 실습을 마치고 1월 초순, 바로 3항사로 나가기 위해 구직 등록을 했더니 성우해운이라는 곳에서 연락이 왔고, 면접을 본 후에 바로 승선하게 됐다. 배는 1주 후에 출항을 하는데, 아직 선원의 구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배 이름은 ‘조양호’였고, 선령이 23년 된 배였다. 배가 낡아서인지 2항사로 갈 분이 며칠이 못 되어서 하선을 하고 다른 사람이 올라왔다.

나는 실습 때에 배우지 못했던 천측(SUN SIGHTING)을 열심히 배웠다. 이는 동남아시아로 가는 길에는 꼭 필요하다는 조언 때문이었다. 처음 승선한 배이기에 배의 시설물들이 다른 배들도 다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배를 떠나간 2항사의 이야기로는 이렇게 항해 장비가 엉망인 배는 처음이고 이런 상태로 항해를 한다는 것은 불가하다고 했다.

하지만 내 귀에 그런 2항사의 말들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비록 자동 조타 장치가 오토바이의 체인이 연결된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작동이 되었건만, 실습 때에 승선했던 990톤 짜리에 비하면 3668톤이라는 크기에 훨씬 큰 침실을 가지고 있었기에 어서 빨리 항해를 하기를 기대하며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드디어 시멘트를 싣고 방글라데시의 찰라항을 향해 출항을 하게 되었다. 제주도를 멀리 하고 나서 레이더의 관측을 할 수 없게 되자 천측(SUN SIGHTING)을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지금 사용하는 GPS 또는 DGPS가 없었던 때이다. 원양 항해를 하는 배들은 그나마 오메가라는 전파 측정에 의한 위치를 내어서 그것을 참고삼아 항해를 했다. 또 다른 위치 관측용 항해 장비가 있었으나 이 배에는 전무했다. 그러다가 날씨가 흐리면 추측위치로 항해를 계속해야 했다.

대만의 연안이 보이니 어찌나 반갑고 기분이 좋든지 이는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기쁜 감정도 잠시, 대만의 육지가 멀어지니 또 레이더 대신 천측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천측이 재미있었지만, 태양의 반사를 제대로 줄이지 못한 탓인지 눈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고 점점 힘들어 졌다. 횟수도 문제였다. 한번 측정을 하고 계산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측정을 반복하니 당직이 끝나면 몸은 녹초가 되었다.

이런 일은 싱가포르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대만을 지나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니 그때까지는 전혀 느끼지 못한 문제가 드러났다. 에어컨이 작동 되지 않는 것이었다. 날씨가 점점 더 더워지면서 잠을 자기도 힘들어 졌다.

그나마 항해 당직을 설 때는 선교의 창문들을 다 열어두었기에 견딜 만 했으나, 침실로 내려오면 더위와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둥근 창문에 맞서 바람을 모으는 도구를 이용하면 바람이 불 때는 시원했지만 파도가 치는 때는 바람에 해수가 같이 날려와 몸 구석구석이 개운치 못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선풍기 바람조차도 뜨겁게 느껴졌다.

거기에 자동조타장치가 고장이 나서 마그네틱을 보면서 항해하는 날이 늘어나고 나중에는 조타수들이 브릿지에서 당직을 서야 했다. 사실 3항사는 수동 조타 요원이 아니었지만 어린 나이에 타수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어서 4시간 중 1시간을 수동 조타를 해 주기도 했다. 나중에는 수동 조타가 일상이 되었다.

거기다가 가끔씩 조타를 하는데도 타의 효과가 없는 상태가 생겨서 항해사들과 선장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기대하던 첫 항구인 방글라데시의 찰라항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더로는 전혀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었고, 해안선은 모래로 된 해변으로 육안이나 쌍안경으로도 관측이 되지 않았다.

아침 7시 30분에 들뜬 마음에 브릿지에 올라가니 1항사가 별로 관측한 위치를 보여주며, 거의 다 왔지만 육지를 관측할 수 없다고 하며 브릿지 좌우를 왔다갔다 했다. 선장은 수심을 측정해서 수심의 등심선에 의한 위치를 추정하는 등 분주했다.

그 후, 선장의 지시가 내려졌다.

“3항사! 15분 만에 한번씩 SUN SIGHTNG을 하도록!”

그래서 나는 매 15분마다 분주히 위치선을 그었고, 다행히 위치선이 잘 맞아 그 위치를 기반으로 Anchorage에 접근하여 투묘를 했다.

그 후에도 여러 항구들에서 적하와 양하를 계속했다. 그리고 동료선원들은 더위와 싸워야만 했다. 저녁 식사가 마치면 누가 모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는데도 가장 바람이 많이 닿는 곳으로 말이다.

 

그 일이 생긴 것이 언제인지 정확한 날짜는 기억할 수 없으나, 승선 후 5개월쯤으로 생각된다.

계속 조타가 어려워서 항구 근처에 접근할 때면 초긴장 상태로 들어가는데 보르네오섬 서쪽 적도 부근에 위치한 PONTIANAK이라는 항에 하역을 하러 들어가던 중, 전과 동일하게 “선장님 키가 듣지를 않습니다!”라고 타수가 보고를 하자, 선장님은 파일럿에게 보고하여 바로 투묘를 했다. 좁은 강이었기에 바로 긴급 투묘를 했다.

파일럿은 바로 도망가듯 떠나가고 배에 있는 선원들은 그시간부터 조타기가 있는 조타실에서 비상 조타 훈련을 하듯 브릿지와 연결하여 명령과 복창을 하고 다시 보고하기를 이어갔다.

처음에는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는 유압유를 모두 빼내고 다시 채워보고, 다른 연관된 곳을 분해한 후 조립하고 그런 후에 다시 조타 시험을 했다.

될 때까지 반복하다 보니 모두가 지칠 대로 지쳤고, 이틀이 지나서야 키가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어서 파일럿을 불러 PONTIANAK 항에서 하역하고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 며칠 만에 다시 똑같은 일이 항해 중에 벌어졌다. 조타 키가 듣지 않는 다가 몇 시간 후에는 거짓말처럼 키가 듣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을과 겨울 무렵 한국에 있을 때는 이상하게도 키가 듣지 않는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본인은 1981년 3월에 그 배를 1년 넘게 타고 하선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 배가 결국 싱가포르항 근처의 섬에서 좌초되었고 회사도 망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1981년 6월 경, 2항사로 진급해 두 번째 배에 승선할 때에도 우연히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항해 중 갑자기 조타 키가 듣지를 않은 것이다. 당시 승선한 ‘선일 3호’도 선령이 거의 20년이었다.

조타 장치의 전기 시스템을 찾아가던 중 조타 BOX 안에 있는 릴레이 2개가 좌우에 있는데 그 두 개가 검게 타서 엉망이 되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을 바꿨더니 바로 정상 작동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고생하며 찾던 것이 이 조그마한 릴레이 두 개의 고장이었다니….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랬다. 과거 처음 승선했던 조양호는 낡은데다 에어컨 작동이 되지 않아서 브릿지 실내 온도가 높았다. 가끔 파도가 높고 해수가 날리면 브릿지 안에 있는 항해 기기들에게 부식이나 스파크가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주변 온도가 더울 때면 접촉이 불량했다가 기온이 내려가면 조금 나아져 다시 작동하기를 반복하며 세월이 흐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이유로 릴레이가 타기 쉬운 환경이었고, 본선에 보유 중이던 부속품은 이미 사용을 해버려서 더 이상의 부속품이 없는 상태이기에 그것을 바꿔주어야 한다는 것도 생각을 못하였던 것이다.

정말로 그 작은 것이 그렇게 소중한 것이었는지는 정말 몰랐다.

열대 지역에서 그렇게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릴레이를 교체했을 그 당시에 평생 잊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지금까지도 항해 기기의 고장을 겪으면 전기 시스템부터 점검을 하도록 한다.

 

이렇듯 우리의 삶 속에서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들이다.

별 것 아니라고 치부하고 신경 쓰지 않던 것 하나가 손상이 되어 아주 큰 가치를 손상시키고 자칫하면 안전 사고로까지 이어질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고 다짐했다.

 

□ 자료출처 : <월간 海바라기> 2018년 4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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