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船上 토요일

등록일2020-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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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船上 토요일

임군호, 1등항해사

 

 

󰡒A-Deck 화장실은 누가 청소해요?󰡓

󰡒…….󰡓

󰡒수건 좀 빨아 놓으라고 하세요.󰡓

다리를 외로 꼬고 앉아 쏟아내는 그의 말에 전에 없이 뾰족한 가시가 돋아 있다. 나, 󰡐뭍으로 시집갔다 소박맞고 돌아온, 쉰 하고도 다섯을 훌쩍 넘긴 일항사󰡑가, 후배라서 더 어려운 선장 옆에 앉아 눈칫밥을 먹다가 또 한 소리를 들었다. 아무리 애써도 또 듣는다, 밥 먹는 시간에. 한 주의 과업을 마무리하고 난, 즐거운 토요일 오후에. 옹졸한 성정에 속절없이 착잡해지는 감정을 추스르다가 눈빛이 길을 잃어 갈 곳을 찾아 헤매는데 기관장은 뜻 모를 웃음을 살며시 웃고 일기사는 둘 사이에 은밀하게 벌어지고 있는 미묘한 감정의 줄다리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밥만 먹고 있다.

파란색 가을 햇살로 선창을 적시는 하늘의 눈망울은 너무 맑아서 원망스럽도록 무심하다. 할 말을 못해 가슴에 멍울이 잡힐지언정 늘 그래왔듯이 오늘도 나는 하고픈 말을 접기로 했다. 뜻밖에 선배인 일항사와 같이 승선하여 넉 달여 동안 그가 겪은 불편함이 한두 가지가 아닐진대, 사소한 일로 각을 세웠다가 여태까지 원만했다고 해도 좋을 우리 사이가 일순간 어그러져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진다면 앞으로 남은 몇 개월이 누구도 건너길 꺼리는 북태평양의 겨울 바다처럼 험난해질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싫은 소리를 듣고 오후 내내 저녁까지 가슴앓이를 했다. 행여 빠질세라 챙기고 또 챙겨도 그예 놓치고 말아 후배에게 타박을 당하니 딴 사람들 앞이어서 더욱 부끄럽고 철없이 서글프다. 신이 아닌 바에야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지 않느냐고 스스로 위로해보지만 부질없다.

저녁 당직을 마치고 방에 앉아 망연히 천장과 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속이 거북하다. 내일 새벽 당직시간에 맞추어 일어나려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데……. 그때 누군가 방문에 쳐진 커튼을 젖히고 고개를 비죽이 내밀었다. 이전 배에서 갑판부의 막내인 이등 갑판원에서부터 일등 갑판원을 거쳐 삼등 조타수에 오르도록 내가 추천해준 미얀마 청년이었다. 두 번 다 때 맞춰 자리가 비었고, 제가 잘한 탓이지 특혜를 베푼 것은 없다. 어디서 어떻게 배운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술자리에선 나를 󰡐아부지󰡑라고 부른다.

그는 미얀마 선원들이 내게 볼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보내오는 저들의 전령사 역할을 한다. 그들이 모두 모여 파티를 하는데 날더러 자리를 같이 하면 좋겠단다. 그래, 사람들은 속이 시끄러울 땐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곤 하지. 그러고 보니 오늘은 토요일, 내일은 일요일, 그 다음은 현충일, 술에 좀 취한들 회복할 시간이 충분하겠다. 내일 새벽 당직은 이항사와 품앗이하기로 하고.

술좌석에 들어서자마자, MTV 화면에 미얀마 여인이 노래하는 모습이 먼저 눈에 띄었다. 화면 속의 여인도 그녀가 부르는 그들의 노래도 내게는 별로 낯설지 않다. 술을 마시기도 전에 어깨춤이 절로 인다. 벌써 삼 년 째 그들과 동고동락하고 있기 때문일까? 나의 조상이 중국에서 건너 왔다고 하는데 혹시, 그보다 먼 조상이 그들의 땅에서 살았기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애잔하리만큼 순박한 그들의 눈망울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어릴 적 고향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은 가끔 일을 지시대로 하지 않는다고 직장들에게 야단을 맞는 때가 있다. 지시하는 사람이나 일하는 그들이나 서로 짧은 영어 때문에 생기는 일이지 일부러 그리하거나 게을러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몸에 손을 대지 않는 한 아무리 큰소리로 나무라도 대거리하지 않는다. 미안해할 뿐 거스르는 표정도 짓지 않는다.

아직 총각인 이등 갑판원은 어디서 났는지 여자의 슈미즈를 걸치고 앉아 있다. 아마 기름걸레로 쓰기 위해 올린 옷 꾸러미에서 골라낸 것일 게다. 빛이 바래긴 하였으나 연분홍색이 매화꽃처럼 화사하다. 가슴엔 화장지를 넣어 빵빵하다. 치맛단 아래로 비치는 속옷이 검정색인데 어쭙잖긴 하나 그런대로 제법 야시시하다. 술잔이 돌고 마음을 나눈다. 영어는 그들에게나 나에게나 남의 언어이므로 대부분 말보다는 몸짓과 눈빛으로 서로의 애환을 읽고 위로한다. 아직 젊음이 가득한 그들의 춤사위나 몸놀림에 뱃사람만의 어쩌지 못하는 외로움과 갈증이 서럽게 묻어난다. 삼십 년 전 초급사관이었을 때의 내 모습을 그들에게서 본다. 결혼한 지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일등 갑판원은 아내가 꽃잎처럼 그리울 것이다.

사오십 년 전 우리들도 저들처럼 일본 사람이나 서양인 밑에서 일하며 배를 배웠다고 한다. 지금은 우리 밑에서 일하고 있지만 우리의 조상 웅녀처럼 차라리 미련한 곰이 되어 아프도록 힘들고 고달픈 세월을 십 년 또는 이십 년 더 견디고 나면 그들도 그들 나라의 배를 몰고 아무도 차별하지 않는 할머니 품 같은 바다를 누빌 수 있을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어려웠던 옛일들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며 뿌듯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내말을 이해한 듯, 이미 술로 달아 오른 얼굴이 해바리기꽃보다 더 환해졌다. 내게 엄지손가락을 꼽아 보이며 내가 내리는 지시는 어떤 것이든지 기꺼이 하겠다고 한다. 일이야 잘하면 좋겠지만 중간만 해도 된다. 배에서는 아무리 일 잘해도 사고 한 번 내면 수 천 만 원 아니, 수 억 원을 날린다. 제발 모두들 사고치지 말고 몸 건강히 일 년을 마치고 돌아가길 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웃통을 벗고 또 원시인처럼 돌며 춤을 춘다. 술자리가 절정에 이르렀다는 징표다. 이것은 우리가 술자리를 파하기 전에 갖는 어느덧 전통이 되어버린 우리들만의 비밀스런 의식이기도 하다.

선창 밖에서는 유월 초나흘의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저마다 애달픈 우리의 사연을 적도의 하늘이사 알리나 있겠는가. 먹구름을 둘러쓰고 표정을 감추니 그 속을 헤아리기 어렵다. 몇 군 데 구름을 헤집고 나온 별들이 밤사이 자못 거칠어진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외로운 밤배 갈 길은 멀어도 가슴 속의 멍울은 사그라지고 없다.

 

□ 자료출처 : 海바라기 2011년 11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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