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연습

등록일202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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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연습

 

 

바다는 모든 것을 품고 있다. 끝을 알 수 없는 바다의 가슴속엔 모든 것이 숨쉬고 있다. 천년 전, 옛 선조들의 보물들이 침몰해 바다 저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을 것이고, 온갖 크고 작은 물고기, 이름도 알 수 없는 바다식물들이 꿈꾸고 있을 것이다.

 

처음 바다에 가본 사람은 바다의 포용력에 놀라고 만다. 지구상의 물이란 물은 모두 이곳에 모였으니 그 거대함이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함이라 하겠다. 땅위에서 버스나 기차를 타고 먼 여행을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바다도 이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음을. 그리고 바다도 이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누워 있음을. 가만히 ‘바다’라고 불러본다. 열여덟 살의 바다가 필름처럼 떠오른다.

 

5월, 수학여행의 일정표대로 바다에 왔다. 바다는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고 거기서 사진을 찍었다. 나는 검은 교복 차림으로 바다에 섰다. 말없이 흐르는 바다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때 조금 웃었던가?

 

햇빛이 치아에 부딪혀 낮게 빛나는 듯했고, 나는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렸다. 주위엔 여학생들이 모여 역시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든지 바다를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몇몇 여학생들이 양말을 벗고 밀려오는 물을 느끼고 있었다. 파도가 순간적으로 밀려와 흰 거품을 만들며 여학생들의 종아리를 휘감을 때마다 여학생들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쳐 물러나곤 했다. 파도가 잠시 밀려갈 때는 어떤 여학생은 무릎까지 바다에 담그고 좋아라 했다. 모래사장에서는 자갈이나 소라껍질을 줍는 여학생들도 있었다.

 

모래알들이 가늘게 빛나는 백사장에서 나는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갈매기들이 가까운 바위섬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저 그 바다를 바라볼 뿐이었다. 저곳에 한 번 빠지면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사랑하는 친구들은 남기고 시작도 끝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리라. 그곳은 평화로우리라. 수족관처럼 물방울이 피어오르고 물고기들이 천천히 유영하겠지.

 

바다로 와서 바다로 돌아가는 우리들은 결국은 흐르는 연습을 하는 것만 같았다. 내 발목을 적시고 있는 물은 어떤 사람의 발목을 휘감았던 물일까. 혹시 내가 10년 전이나 그 전에 세수하고 버린 물이 정화되어 이곳에 오진 않았을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흐르고 흘러 영원히 정착하지 않는 물은 어쩌면 사람들의 방랑벽처럼 끊임없이 세계를 여행하며 거기서 오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더러는 학문과 자유를 찾아다니는 물, 또는 그러한 사람들. 이제 그들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거대한 바다 앞에서 나는 초라한 사람이 되어 서 있었다. 더 큰 바다로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줄 뿐이었다. 상념의 그물에서 벗어나 보니 친구들이 모두 버스에 오르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그곳을 떠나오면서서도 나는 줄곧 동해바다의 한 자락을 떠올렸다. 차의 엔진 소리가 파도소리가 되어 들려왔다. 창 밖을 보니 싱싱한 풀과 농작물들이 있었지만 그것이 물 속에서 손을 흔드는 해초 같기만 했다.

 

많은 음악가들이 바다를 노래하고 많은 화가들이 바다를 소재로 그림을 그리고 많은 시인들이 바다를 읊는 이유를 알 것 같앗다. 결국 우리는 바다 동물인 것이다. 모든 생물의 근원지는 바다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들이 묵고 이쓴 여관에 돌아와서 다시 물을 만났다. 바다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물이었다. 세수 대야에 담긴 물. 손이 물에 닿는 순간 포근함을 느꼈다. 무링 사람을 따뜻하게 감싼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잠을 자다가, 바다 속을 헤엄치다가, 내가 물고기가 되는 꿈을 꾸기도 하다가, 문득 잠에서 깨어나 엽서를 쓰기 시작했다.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엽서를 썼다. 그 엽서는 내가 엽서 쓰기를 시작한 지 열아홉 번째 되는 엽서였다.

 

 

흐르는 연습 – 엽서쓰기 19

 

우리가 바다 옆에 서면

멀리 희미한 섬이 솟아나고

우리가 자궁을 동경하는 동안

무덤은 우리를 타고 흐른다.

살아가는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함께 흐르고

가슴속에서 부는 바람 소리가

급류로 흐르고

파도 같은 서로의 일침이

유리창 하나에 앞 바다처럼 쟁강거린다.

수증기 같은 미세한 힘이

어두운 저녁을 물들이는 동안

가늘게 떠는 바다 앞에 서면

살아가는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숨어서 흐르고

우리도 흘러가면서 오늘을 이야기한다.

 

 

쓴 이 : 김홍렬

 

□ 작품출전 : 등대찾기, 2004년

 

‘등대찾기’란 책이 있다. 2004년도에 한국해기사협회란 곳에서 그 동안 개최해 왔던 해양문예대회의 당선작들의 모음집인데 그중 김홍렬이 쓴 수필 ‘흐르는 연습’이 눈에 들어와 읽어보았다. 비록 추상적이긴 하지만 쉽게 읽히는 점과 물의 심상을 펼쳐낸 물에 관한 필자의 지론에 고개가 끄떡여졌다. 1988년도 제14회 해양문예 가작에 든 작품이라고 소개돼 있다. 마무리 글로 소개한 필자의 시 ‘흐르는 연습-엽서쓰기 19’에 지금 이 시간도 흐르는 듯했다. 내용이 길지 않아 전문을 자판을 직접 두드려 활자로 옮겨 소개한다.(심호섭, 홈페이지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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