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없어도 파도 소리를 듣는다

등록일2020-07-31

조회수13

 

바다가 없어도 파도 소리를 듣는다

 

 

강원도 어느 골짜기에 짐을 풀었다. 정말 추웠다. 여행을 하면서 겪는 고생쯤이야 별거 아니라며 신나게 집을 나섰던 일이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았다. 길은 얼어붙은 남쪽의 촌놈을 놓아주지 않았다. 의지와는 달리 차는 제 마음대로 움직였다. 중심이 잡히지 않는 곳이 빙판길이었다. 아무리 잘 살려고 노력을 해도 궁지에만 몰리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꼭 강원도엘 가야할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폐광이 되기 전에 기억 한 자락에 담아 두고 싶었던 마음이 일년 동안 떠나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욕심이 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정이 지나서야 겨우 잠잘 곳을 마련했다. 따뜻한 아랫목이 있는 온돌방이었다. 일터로 나간 가족을 위해 정갈하게 깔아 둔 이불이었다. 종일 직장에서 시달린 정신과 육신을 온기로 녹일 수 있는 그런 분위기랄까. 빙판길의 운명과는 달리 우리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며 마주보고 웃었다.

오는 길에 시장에 들렀다. 꽁치 같은 생선에 물기만 겨우 가시게 한 것을 엮어 작은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과메기 도매라 써 놓았다. 한 곳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추수 때 낟가리를 만들어 놓은 거나 다음 없었다. 곳곳에 풍요로움이 넘쳤다. 여행길에 오른 사람들이 무리지어 서서 그걸 먹고 있었다. 우리는 새로운 풍물 구경에 신이 났다. 남편은 그 일행에 끼여 장만하는 방법을 익히고 있었다.

늦은 시간에 술이나 한잔 하자며 안주를 찾았다. 자동차 트렁크에 과메기 한 두름이 실려 있었다. 가게주인이 일러 준대로 잘 다듬어 미역에 싸서 초장에 찍어 먹었다. 맛이 괜찮았다. 방을 밝혀주던 촛불이 분위기를 더욱 고즈넉하게 만들어 주었다. 어느새 소주 한병이 없어졌다. 평소에는 한두 잔만 마셔도 취기가 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단지 얼굴이 조금 뜨거워 질 뿐이다. 안주는 아직 남아 있었다. 다시 소주 한 병을 샀다.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빈 병 서너 개가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야기 하고 듣는 것을 좋아 했으나 어느새 나는 말 수를 줄이는 연습이 되어 있었다. 말이란 것이 사람을 힘빠지게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터득한 셈이라고 할까.

얼마 전 나하고는 그런대로 통한다 싶어 진심을 얘기하며 서로의 아픔을 달래 왔던 지기가 있었다. 이심전심이라고 좋아 했다. 서로의 모자람에 자극을 주어 고쳐 간다면 그 이상 바랄 게 없는 일이라 여겼다. 사람들 사이에 쌓인 두꺼운 벽쯤은 문제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돌아온 것은 가슴에 못 박을 말이었다고 내게 일러 주었다. 참으로 낭패스러운 일이었다.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나중엔 그 말마저 잘라 내고 싶었으나 칼만 무디어질 뿐 도려낼 수 없는 상처를 만들어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애정을 자르고 말았다.

그랬던 말들을 이젠 의식적으로 줄이려 애쓰고 있다. 말이 없어도 우리는 잘 통했다. 험한 세상살이 뚜벅거리며 함께 걸어왔듯이 술 넘어가는 소리, 바람 소리만 있어도 온갖 근심을 달랠 수 있었다.

어쩌다 말을 많이 한 날은 마음이 왜 그리도 허허로운지 마치 폐허가 된 동굴이었다. 알맹이는 전부 빠져나가고 손만 대면 허물어질 것 같은 표정으로 거리를 헤맸다. 떠도는 마음을 붙잡아 줄 그 무엇도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가로수를 뒤로하며 공중을 날고 물위를 걷는다 해도 관심조차 두지 않을 만큼 마음은 점점 더 비어 갔다.

숨쉬고 있는 동굴 속은 늘 드려다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곳이었다. 속살을 다 보여주었다면 별로 신비로울게 없었으리라. 죽죽 뻗어난 석순의 경이로움에 가슴을 열었으나 그것만으로 시원치 않아 남모르게 잘라가는 것이 사람이었다. 무엇이 더 알고 싶었을까.

한 치의 석순이 생성되기까지 소멸의 소용돌이를 얼마나 겪었을지 모른다. 그러다 어느 날 동굴은 소리도 없이 무너져 사라지리라. 하지만 자신을 가눌 수 없는 위기에도 바둥거리지 않는다. 겸허히 받아 들여 패어진 골을 삭이는데 이력이 나 있으나 인간은 남의 탓을 하는데 길이 잘 들여져 있다. 가진 게 많으면 많을 수록 오만해진다. 오만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써 보지만 쉽지 않다. 조금이라도 빛을 내는 일에는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다가 해가 되겠다 싶으면 어느새 꼬리를 감춘다. 감출 꼬리마저 없어 질 때 비로소 고개를 숙인다.

떠돌던 생명이 다시 허허로움을 채우기 위해 책을 펼쳤으나 쉽게 들어오지 않아 끙끙 앓았다. 왜 그렇게도 떠들어 댔을까. 소외되기 싫어서 떠들어대고 참담해진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변명이었는지 모른다. 어두운 생각을 서둘러 잘라 보았지만 칼날에 흠집만 남겼다. 오늘은 잘라낼 이유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자신을 맡겨 놓으면 될 일이었다. 삶의 기쁨은 참으로 조용한 곳에서 오는 것이었다. 강원도의 겨울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파도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것 같더니 차름 소리가 거세어졌다. 그러기를 번갈아가며 했다. 다시 숨소리마저 죽여야 했다. 촛불은 여전히 방안 분위기를 차분하게 만들었고 바깥세상의 어둠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등을 기대고 앉아 있으니 정말 딴 세상이었다. 두 손을 단전에 얹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것은 간절한 기도였다.

머리 속에 꽉 차 있던 생각들을 비워내는 일이 오늘밤의 과제였으나, 엉뚱한 파도는 모래밭에 수없이 뿌려 놓고 간 이야기들을 밤새 들려줄 모양이었다. 잔잔한 수면에 떠오른 사람들, 나와 인연 맺어졌던 사람들은 서서히 자리를 떴다. 처음엔 그것이 못내 서운했다. 그럴 수가 있느냐고 침을 튕기며 부산을 떨었다. 그러나 특별한 계산속에서 만난 사람들은 계산이 끝나면 멀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당연한 이치를 두고 마음을 심하게 앓았다.

빠져나가는 문이 있다면 새롭게 들어올 문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날이 밝으면 얼얼한 뺨을 부비며 바다에 꼭 가봐야지.

 

박 희 선 l 수필가

 

□ 자료출처 : 海바라기 2012년 2월 호

 

 

g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