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해양실크로드 대장정(2)

등록일202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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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해양실크로드 대장정(2)

남 청 도 Ⅰ 한국해양대학교 기관공학부 교수

 

 

5. 말레이시아 말라카

‘시내 곳곳에 외세 침입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말라카(Melaka) 도시의 역사가 바로 말레이시아의 역사라고 할 정도로 말라카는 유서 깊은 항구로서 해상 실크로드에서도 동서교역의 한 획을 그었지만 지금은 당시의 외세 침입의 흔적을 간직한 채 외국관광객들의 발길을 맞이하는 작은 포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실습선 한바다호는 10월 5일 한 때 범선들이 도자기, 향료, 비단 등의 무역품들을 가득 싣고 드나들었던 말라카강 하구에 닻을 내렸고, 탐험대와 학생들은 통선으로 상륙하였다. 탐험대는 이곳에서 하선하여 쿠알라룸푸르를 거쳐 항공편으로 인도 콜카타로 들어가 혜초의 길을 따라 인도 중부를 횡단한 후 뭄바이에서 다시 만나기로 돼 있었다. 한국에서 시간이 촉박하여 인도 비자를 받지 못한 필자는 선박편으로는 비자발급이 불가하다는 대리점의 연락을 받고 어쩔 수 없이 항공편으로 인도에 들어가기 위해 말라카에서 하선하였다.

탐험대도 떠나고 실습선도 다음 기항지인 인도 뭄바이로 떠나고 홀로 호텔에 남아있으니 국제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홀리데이인 호텔에 일단 여장을 푼 다음 지도 한 장을 얻어 첫날은 해양박물관, 해군박물관, 범선 그리고 세관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이들 박물관들은 인근에 붙어 있어서 티켓 한 장으로 다 볼 수 있고 세관박물관은 무료였다. 옛날 말라카왕국에서 약탈한 보물과 함께 바다에 침몰한 포르투갈 범선 ‘플로라 데 라 마르(Flora de la Mar)호’를 복원하여 내부를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는데, 폭슬 캐빈에는 당시의 지도와 깃발들을 전시해 놓았고 중앙 선실 아래쪽에는 범선시대의 각종 모형선과 주요 교역품 및 당시의 모습을 마네킹으로 제작하여 전시해 놓고 있었다.

이튿날에는 정화문화관으로 향했다. 주요 볼거리들이 타운 스퀘어 인근에 몰려 있어서 호텔에서 걸어가면 20분 정도면 충분했다. 호텔에서 조금 나가면 네덜란드식 집들이 늘어선 동네를 지나고 그 다음 블록에서는 시가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타밍사리(Taming Sari) 탑을 지나게 된다. 고목이 우거진 공원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옛날 포르투갈 요새였던 파모사(A Famosa) 요새가 눈에 들어온다. 전화와 세월의 풍우에 벽들은 다 허물어진 채 중앙부분만 뼈대만 앙상하게 조금 남았다. 뜰에는 당시에 불을 뿜었던 대포 몇 문만 관광객들을 위해 전시해 놓고 있어 어린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있었다.

정화문화관은 정화에 관한 여러 가지 사료들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당시 선박을 모형선으로 복원하고 정화함대가 갔던 항로와 곳곳에 세웠던 비석들을 탁본하여 비문도 전시해 놓고 있었다. 당시 각국이 중국황제에게 진상한 선물을 운반하기 위한 보선에는 각종 보물과 아프리카에서 보내는 기린과 얼룩말도 그림으로 전시되고 있었다. 동남아 여러 나라들과 아랍 그리고 아프리카 동해안에 이르기까지 명나라의 조공무역을 위해 수많은 함선과 이를 운용할 28,000명의 대인력을 이끌고 7차에 걸쳐 진행된 프로젝트는 지금 생각해봐도 엄청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존켈러(John Ker)거리를 따라 내려가면 힌두교사원과 이슬람사원이 있고 거리가 거의 끝나는 지점에 중국식 절인 쳉훈텡(Cheng Hoon Teng)사원이 있다. 내부엔 부처가 모셔져 있고 실내장식이 화려하였다. 이 거리에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고 한국인 관광객들도 눈에 띄었다.

사흘째에는 1650년 네덜란드 정복자들이 관청으로 사용했던 고딕양식의 스타듀이스(The Stadthuys)와 뒤편 언덕 위에 세워졌던 세인트 폴 교회를 둘러보았다. 포르투갈 식민시대인 1521년 두아르테 코엘료에 의해 지어진 교회로 기도원으로 사용되면서 포르투갈의 포교거점지로 유명했으나 가톨릭을 박해한 네덜란드군과 영국군의 공격에 의해 거의 다 파괴되고 외벽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데 내부에는 각종 문양이 그려진 직사각형의 돌비석들이 벽면에 기대어 서 있었다. 어느 비석 모서리 위에는 이름 모를 노란 꽃 한 송이가 외롭게 피었고 인근 언덕 위에는 네덜란드인들의 묘석 몇 기가 허물어진 채 말라카 시내를 굽어보고 있었다.

 

6. 인도 코친

‘과거의 영화에 머물러 있는 나라는 발전할 수 없다’

입국 시 비자가 필요한 나라는 몇 개국이 안 되지만 인도가 그 중의 하나이다. 실습선이 뭄바이항에 입항하게 되면 곧장 비자를 받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비자가 없으면 상륙도 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배에 갇혀 있어야 된다는 게 대리점으로부터의 소식이었다. 할 수 없이 말라카에서 하선하여 항공편으로 인도에 들어가기로 해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밤늦게 코친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코친공항에 도착하여 비자를 받는 데는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코친은 14세기 중부의 고아항과 북부의 캄베이항과 더불어 해상 실크로드 중심항으로서 한 때 명성을 날린 인도 서남부의 항구도시이다. 십자군 원정을 계기로 동서교역이 활발해지면서 후추, 향료, 면직물, 견직물 등이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한 실크로드를 통해 지중해의 여러 도시들로 흘러들어갔다. 그런데 14세기 이래 오스만 투르크가 실크로드를 장악하자 유럽의 신흥제국들은 인도로 직접 갈 수 있는 인도양 항로개척에 나섰고 1498년 바스코 다가마가 희망봉을 거쳐 인도양을 처음으로 횡단, 인도 캘리컷에 도착함으로써 7세기 이후부터 15세기 말까지 오스만 투르크의 이슬람 상인에 의해 독점되었던 동방무역의 주도권이 포르투갈 상인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바스코 다가마는 다음해 본국으로 귀국했다가 1502년 다시 15척의 대함대를 이끌고 인도로 향하다 이슬람과 힌두 연합함대의 반격을 받았으나 이들을 쳐부수고 코친과 카나노르 등 각 지방에 상관을 설치해 인도무역의 거점을 마련하였다. 그 후 그는 코친에 살다가 1524년 사망하여 코친의 포트구역에 있는 성 프란시스 성당 안에 매장되었다가 유해는 본국으로 운구되었다.

10월 10일 코친에서의 첫날은 비자 때문에 시간을 많이 허비하고 또 공항에서 택시로 호텔까지 오는데도 길이 울퉁불퉁하고 곳곳에서 차가 막히는 바람에 호텔에 도착하니 새벽 5시가 넘었다. 아무래도 일단 잠을 자고 난 후에 돌아볼 계획을 세워야 했다. 다음 날 시내관광지도를 한 장 얻어 호텔이 있는 윌링돈섬을 한번 돌아보기로 하였다. 코친은 구시가지인 포트코치와 마탄체리 구역인 큰 섬과 윌링돈섬을 합쳐서 코치라 하고 강 건너 동쪽은 신시가지인 어나쿨럼시로 이루어져 있다. 큰 도로를 따라 걸어가니 곳곳에 폐가가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쓰레기통에는 온갖 쓰레기가 넘쳐나고 까마귀떼가 먹이를 뒤지고 있었다. 동네가 오래된 고목들 속에 파묻혀 있는 것 같았다. 길가에 해사박물관이 있어 들어가 보았더니 우리나라 호미곶에 있는 등대박물관과 비슷했는데 내부에 오래된 등대의 램프와 각종 항해장비들이 전시돼 있었다.

둘째 날은 오토릭샤를 타고 구시가지인 포트코치로 향했다. 골동품과 각종 향료를 파는 상점들이 즐비했다. 네덜란드인 묘지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성 프란시스성당 안에는 바스코 다가마가 묻혔던 장소를 장방형으로 표시를 해 놓고 벽에는 사진과 설명문을 붙여 놓았다. 다음에 들린 곳은 더치 팰리스로 원래는 포르투갈인들이 지었으나 17세기 네덜란드인들이 고쳐 지어 코치왕에게 헌정돼 이곳에서 코치왕 대관식이 열렸다고 한다.

마지막 날에는 코친에서 40㎞ 떨어진 백워터강으로 갔다. 이곳은 생태계 연구자들이 많이 찾는 장소라 한다. 강물에는 개구리밥 수초들이 많이 떠 있고 강폭도 좁았다. 인근에는 민물 양식장이 있어 새우, 게, 관상용 어류 등을 양식하고 있었다.

코친을 보면서 지난날의 화려했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아직도 환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넓은 땅과 비교적 싼 임금 그리고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기업이 들어와 유럽과 중동진출을 위한 거점으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7. 인도 뭄바이

‘엘리펀트섬 석굴의 불교조각 예술품들은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뭄바이 시내에서 약30㎞ 떨어진 짜뜨라빠띠 쉬바지 국제공항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0월 13일 오후였다. 뭄바이는 두 번째 방문으로 오래 전 실습선 한바다호를 타고 왔을 당시엔 봄베이라고 불렸었다. 공항에서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 부근에 있는 씨팰리스(sea palace)호텔까지는 선불택시를 타고 갔다.

뭄바이는 인도 전체 수출입물량의 50%를 상회하는 거대상업도시로서 그 역사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르투갈 왕녀의 지참물 중 일부로 영국에 기증된 7개의 섬은 동인도회사 회사와 함께 급격히 발전했으며 18세기 들어서면서 성채를 중심으로 상업건물과 은행, 세관, 영국인 숙소, 항만 등의 건설로 부흥의 선두주자로 나서게 되었고 오늘날의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고층빌딩숲을 이루게 된 원동력이 된 것이다.

택시가 목적지에 닿자 눈앞에 나타난 호텔의 모습은 기대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80년이나 된 노후건물인데다 우리나라의 여인숙보다도 못한 시설 같았다. 여러 가지 학술 행사 등이 겹쳐 방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한창인 때에 그래도 노숙하지 않고 방을 얻은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호텔에 짐을 풀어놓고 6시경 인근에 있는 인도문으로 산책을 나갔다. 이 건축물은 영국의 조지5세 부부의 인도방문을 기념하여 1911년에 세운 것으로 문 아래에 있는 홀에는 6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문 뒤쪽은 바로 아라비아해이고 앞쪽엔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광장 끝에 있는 정원에는 17세기 마라타의 영웅인 시바지가 말 위에서 한손으로 창을 거머쥐고 있는 모습의 동상이 서 있고, 왼쪽에는 라마트리슈나 교단의 고승인 비베카난다 동상이 서 있었다. 7시가 되니 해가 넘어가고 사방이 어스름으로 뒤덮였다. 고딕양식의 거대문은 프로젝션 라이트가 점등되어 신비감을 더해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뭄바이의 상징물로 인도문과 쌍벽을 이루는 타지마할 호텔이 곁에 붙어 있었다. 아라비아해를 향해 창을 낸 이 호텔의 돔 색깔은 붉은색이며 외관의 모양은 인도 사라센 양식과 고딕양식이 혼합된 것으로 1903년에 지었다고 한다. 19세기말 봄베이의 한 자본가였던 잠무세트지타타가 외국인 친구와 같이 필케즈 아폴로 호텔로 저녁식사를 하러갔다가 인도인이란 이유로 출입을 제지당하자, 이 보다 더 좋은 호텔을 세우겠다는 오기가 발동하여 지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당시엔 인도문도 없었고 항구도 없었으므로 현관은 중심가인 포트(Fort)지구를 향하도록 설계하는 것이 상식적이었으나 호텔설계자는 객실창문을 통하여 바다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하여 마치 배를 타고 있는 느낌이 들도록 했다고 한다.

둘째 날은 뭄바이 박물관으로 갔다. 종전에는 웨일즈왕자 박물관으로 불렸던 곳이다. 전시실에 들어가 보니 아잔타 석굴 유물, 아시리아 미술, 티베트와 네팔의 불교미술, 간다라 미술 등 볼거리가 다양하였다.

사흘째는 내가 묵고 있는 호텔 위치와는 반대편인 백베이(Back Bay)의 트라이덴트 호텔로 갔다. 우리 대학에서 주최하는 “해양실크로드 국제학술대회”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강연장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참가자들이 방명록에 서명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국내 저명 학자 외에도 중국, 일본, 인도 학자들도 많이 참석하였다. 아침부터 오후 6시까지 3세션에 걸친 여러 발표자의 열정적인 발표와 마지막 토론까지 대성황이었다. 이번 국제학술행사에는 경상북도와 뭄바이 총영사관의 협조가 컸다. 지금까지 인도에서 우리나라가 단독으로 주최한 학술대회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다음 날엔 학술대회 참가자들과 함께 시내투어에 나섰다. 시가지 곳곳에 아름다운 고딕양식의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었고 아름드리 고목 가로수들이 도시의 연륜을 대변하고 있었다. 특히 인도문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가량 가야 하는 엘리펀트섬에는 힌두교 석굴사원이 있고 입구에서 120계단을 올라가면 8세기에 만들어진 석굴이 있는데 바위 벽면에 새겨진 신상들의 모습은 바로 살아서 꿈틀꿈틀 움직이는 박진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안타까운 점은 포르투갈 침입자들이 이러한 인류문화유산을 파괴하여 조각의 일부가 탈락되었다는 점이다.

 

8. 오만 무스카트

‘수르항을 출항하여 중국 광저우항까지 해양실크로드를 항해했던 다우선을 만나다’

밤 10시에 뭄바이 짜뜨라빠띠 쉬바지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2시간반 만에 오만의 무스카트 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하였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터미널을 빠져 나오니 인도와는 한 시간 반 시차가 있어 현지시간은 자정을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공항에서 선불택시로 미리 예약한 무스카트 합파하우스호텔까지 이동하였는데 아랍전통의상을 입은 택시기사는 친절하기는 커녕 무뚝뚝하고 어둠속에서 차를 거세게 몰아 잠시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 한 후 우선 피로를 풀기 위하여 한 숨 푹 잤다.

잠결에 폰 울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10시경 실습선 한바다호가 부두에 입항한다고 했으므로 미리 택시를 타고 부두로 향했다. 실습선 접안시간이 1시간가량 남아 인근에 있는 해양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전시실에는 고지도와 다우선을 비롯한 각종 범선의 모형, 그리고 중세 주요 교역품인 향료제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한켠에는 어린 학생들을 데리고 견학을 온 역사전공 선생님들도 있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부두로 들어가려 했더니 정문에 있는 경찰이 제지를 하며 부두에 출입하려면 수속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실습선 방문은 차후로 미루고 택시기사와 흥정하여 C교수와 나는 1인당 22리얄을 주고 시내를 둘러보기로 하였다. 부두 건너편에서 보니 한바다호가 부두에 접안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먼저 국립박물관으로 갔다. 입구에는 고지도와 사진들 그리고 요새 모형이 놓여 있었다. 전시실에는 각종 총기류와 칼을 비롯한 무기류와 비파, 북 등의 악기류, 항아리, 주전자, 접시, 구리 그릇 등 식기류, 전통의상, 장신구 등이 전시돼 있고 외부 전시실엔 전통 목선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다시 택시를 타고 사막의 오아시스라고 하는 시답(Sidab)으로 향했다. 바닷가에 국회의사당과 대통령궁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앞산에는 오래된 성채가 보였고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산꼭대기에는 원통형의 망루가 세워져 있어 옛날 외세의 침입이 잦았음을 알 수 있었다. 관청들이 모여 있는 알부탄 로터리에는 전통적인 다우선을 건조하여 1981년 독립기념일인 11월 18일 수르항에서 출발하여 중국 광저우까지 해상실크로드를 항해한 실선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인근에 잇는 알 부스탄 팰리스호텔은 오만 정부가 1억3천만 리얄(한화 약 4,300억원)을 들여 옛 조그만 어촌을 소개시키고 조성한 초호화 호텔로 하나의 예술작품이었다.

둘째 날에는 무스카트에서 남쪽으로 약 200㎞ 떨어진 중세 항구도시인 수르(Sur)를 다녀오기로 하였다. 첫날 만났던 기사와 80리얄에 흥정을 하고 8시반에 호텔을 출발하였다. 그는 35년의 운전경력이 있다면서 수르로 향하는 도중 자신의 기아차 자랑에 열을 올렸다. 무스카트 도심을 벗어나니 황량한 돌산이 이어졌고 강바닥은 바싹 말라서 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도로는 완전히 돌산을 깎아내고 반듯하게 낸 길이었다. 도로가에는 대추야자나무로 가로수를 가꾸었다. 오만은 사막기후라 비가 오지 않아 해수를 담수화플랜트를 이용하여 청수로 만들어 가정과 공장에 공급하고 화장실 정화조에서 나오는 폐수도 정화하여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11시경 수르에 도착하였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을 걸어가니 옛날 다우선들이 드나들었던 강 하구에 우뚝 선 등대가 보였다. 등대 주위엔 성냥갑 같은 사각형의 하얀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강을 가로지르는 현수교 밑에는 지금도 다우선을 건조하는 조선소도 보였다. 강가에 있는 어느 야외 전시장에서는 다우선을 비롯하여 몇몇 목선종류를 전시해 놓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견학 나온 우리 실습생들도 만났다.

무스카트 정박 마지막 날인 10월 22일에는 대리점에 연락해서 부두출입 허가를 받아 한바다호에 승선했다. 오후 4시 한바다호는 ‘2014 해양실크로드 대장정’의 마지막 항구인 이란의 반다르 압바스항을 향해 페르시안 걸프의 푸른 물살을 힘차게 갈랐다.

 

9. 스리랑카 콜롬보

‘정화가 남해원정 때 갈레에 세웠던 비석을 보다’

10월 31일 한국해양대 실습선 한바다호가 이란의 반다르 압바스에서 해양실크로드 탐험대 일부를 상륙시키고 아랍에미레이트 후자이라 외항에서 벙커링 한 후 인도 서해안을 따라 내려와 동양의 진주라고 불리는 스리랑카 콜롬보에 입항했다. 국토의 생긴 모양이 눈물방울 같다 하여 인도양의 눈물이라고도 불리는 스리랑카는 기원전 6세기경에 북인도의 싱할리족이 이주해 처음으로 왕조를 세웠다고 한다. 국토면적은 한반도의 1/3 정도이고, 인구는 작년기준으로 약 2천2백만 명이며 일부 무슬림과 힌두교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불교를 신봉하여 2천여년 전의 초기불교 유적이 지금도 열대림 곳곳에 남아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필자가 콜롬보에 도착한 것은 오만의 무스카트에서 압바스로 떠나는 한바다호를 배웅한 다음 날이었다. 콜롬보는 7세기 전까지만 해도 작은 어촌에 불과했으나 그 이후 향료와 보석에 눈독을 들인 아랍상인들이 건너오기 시작하면서 지리적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해양실크로드의 거점항구로서 거듭나게 되었다. 본격적인 개발은 16세기 포르투갈 사람들이 섬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성채를 쌓고 ‘콜롬보’라는 이름을 붙인 이후이며 이로부터 식민지시대가 시작되었다. 17세기에 들어서자 이번에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들어왔고, 1796년에는 네덜란드를 격파한 영국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면서 콜롬보는 홍차무역항으로서 크게 발전했다.

공항 근처 풀문 호텔에 짐을 푼 다음 첫날에는 시내버스를 타고 국립박물관으로 향했다. 공항과 시내 중심가와는 상당한 거리여서 버스로 한 시간 이상 소요됐으며 버스에는 우리나라 60년대처럼 남자차장이 정류소마다 내려서 행선지를 외치고 버스가 출발하면 승객들에게 행선지를 물어 차비를 받았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하차하여 다시 오토릭샤로 바꿔 타고 콜롬보 국립박물관으로 갔다.

눈이 부실정도로 하얀 고딕양식의 박물관 건물이 아름다웠다. 박물관 앞 정원에는 1877년 이 박물관을 세운 영국의 실론 총독 윌리엄 그레고리경(Sir William Gregory) 동상이 서 있었다. 박물관은 1~3층 전시실로 구분돼 있는데 1층에는 아누라다푸라 시대의 불상, 폴론나루와 시대의 브론즈 불상, 캔디왕조 시대의 옥좌 등 불교조각품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 외 힌두교 시바신의 조각과 원주민들의 석기와 토기들도 전시되고 있었다. 2층에는 주로 민속품들이 전시되고 있었고, 3층에는 원주민들의 생활상을 재현해 놓고 있었다.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중국의 정화함대가 갈레에 세웠던 비석인데 1층 입구 우측에 전시되고 있었다. 명나라 영락제 환관 정화의 남해원정은 1492년 콜럼버스, 1497년 바스코 다가마의 인도양 도달보다 80∼90년이나 앞섰으며 규모면에서도 훨씬 컸다. 콜럼버스의 선단은 기함인 산타마리아호가 길이 23m, 폭 7.5m, 흘수 1.8m, 돛대 3개의 150톤 규모였으며 핀타호와 니냐호의 선원을 합쳐 일행은 도합 90명인데 반해 정화선단은 길이 137m, 폭 56m, 9개의 돛대에 보선은 2700톤 규모로 1차 원정 때 보선만 62척, 선원 2만 7800여명, 총선단수는 317척이었다고 한다. 7차에 걸친 남해원정은 그 목적이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았으나 대체적으로 인도양 여러 지역 지배자들에게 중국의 위엄을 과시하고 중국의 지배권을 인정함으로써 조공을 바치게 만드는 것이라고 유추하고 있다. 비석은 전시장 유리장 안에 있어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았으나 비문은 한문, 타밀어, 페르시아어로 새겨져 있었는데 한문 내용은 정화가 선원들이 기원하던 사원에서 공양을 했다는 사실과 불교 행사에 바친 품목들을 적은 것이고, 타밀어 내용은 중국 황제가 테나바라이 나야나르 신을 찬양하는 것이며, 페르시아어 내용은 알라와 이슬람 성인의 영광을 찬양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비석 오른쪽에는 한문으로 된 비문만 따로 적어서 액자에 넣어 전시해 놓았다.

다음 날에는 시외버스를 타고 남단에 있는 갈레로 갔다. 에어컨이 없는 완행 만원 버스를 타고 갔더니 사람들의 땀 냄새와 더위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다행히 버스가 달릴 때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견딜 수가 있었다. 도심 곳곳에 식민시대의 유럽식 건축들이 보이고 신축 고층아파트 공사를 하는 곳도 눈에 띄었다. 버스가 정류소에 설 때마다 장사치들이 올라와 물건을 사라고 소리를 지르고, 차장은 내려서 “갈레! 갈레! 갈레!”하고 외쳐댔다. 버스가 교외로 빠지자 야자수 나무 아래로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불어오는 바람이 한결 시원했다. 남부로 뻗은 도로는 철도와 이웃하며 바닷가로 이어지고 있었다.열시 반에 출발한 버스가 오후 2시 55분에 갈레터미널에 도착했다. 우선 시계탑이 있는 요새의 위치를 경찰에게 물었더니 버스 터미널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아 걸어가기로 했다.

갈레는 스리랑카 남부의 최대 항구도시로 14세기경에는 아랍상인들의 동방무역항으로서 번영하였으며 1589년에는 포르투갈인들이 들어와 최초로 성채를 세웠다고 한다. 1640년에는 네덜란드인들이 성채를 확장시키면서 그 안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그 후 영국식민지시대에 견고한 성채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시계탑이 있는 요새 위로 올라서니 시원한 바닷바람과 함께 하얀 파도가 밀려오는 인도양이 눈앞에 전개되어 가슴이 탁 트였다. 뒤돌아보면 구시가와 신시가가 한눈에 들어왔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성채 위에 바닷가로 난 길을 따라 한참 걸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는 높이가 18m나 되는 등대가 우뚝 서 있었다. 쉴 새 없이 밀려들어와 하얗게 부서지는 초록빛 파도 너머로 인도양의 웅대한 수평선이 펼쳐져 있고 그 수평선을 따라 거대한 컨테이너선 한 척이 지나가고 있었다.

 

□ 자료출처 : <월간 海바라기> 2015년 1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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