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자유로 육지의 질서를 비판하는 자

등록일2020-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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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자유로 육지의 질서를 비판하는 자

-철학자의 서재

  이청준의 <지배와 해방>,   에드워드 사이드의 <지식인의 표상>

 

권 영 민 ㅣ 작가

 

유연함, 유연함으로부터 비롯되는 애매함은 정치인의 미덕일 수는 있어도 '지식인'의 미덕이 될 순 없다. 정치인이 현실적 상황에 맞춰 적당한 정도의 유연성을 발휘해, 여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기에서는 그 반대로 말하면서 생기는 모순과 애매함은 정치인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란 타협과 지배의 기술이니까. 적당한 애매함과 유연함은 효과적인 통치전략이 된다. 노예가 주인의 마음을 알기 어려울 때, 주인의 말이 애매할 때, 주인의 태도가 유연할수록 지배는 쉬워지는 법이다.

하지만 지식인에게 애매함이란 미덕이 될 수 없다. 그가 지식인이라면 일상에서의 다른 경우에서라면 몰라도, 대문자 '비판'을 자신의 임무로 삼는 지식인이 비판을 해야 하는 대상에 대해서 유연한, 혹은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는 없다. 미국을 가차 없이 비판하는 노암 촘스키에게는 그 어떤 유연함도 애매함도 없다. 니체에게 붙은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은 그가 비판의 명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 관습, 전통, 더 나아가 문명과 인간 자체를 비판하는 니체에게서도 그 어떤 종류의 애매함도, 유연함도 찾을 수 없다. 정치인과 달리, 지배에 저항하는 자의 태도는 유연하지도, 애매하지도 않다. 매사에 유연한 태도로 애매모호한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권력이 없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배는 애매해도 저항은 명료하다. 지식인이 현실을 비판하는 자라면, 현실을 지탱하는 권력과 그 권력의 전략인 애매함과 유연함까지도 비판하는 자다.

이청준은 <지배와 해방>(1977)이라는 작품에서 작가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물음에 이정훈이라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을 소설로써 고발하는 것, 의롭지 못한 일을 증언하는 것, 우리의 삶을 부당하게 간섭해 오거나 병들게 하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비인간적인 제도와 억압에 대항하여 싸우고 그것들을 이겨나갈 용기를 모색하는 것, 소위 새로운 영혼의 영토를 획득해 나가고 획득된 영토를 수호해 나가려는 데 기여하는 모든 문학적 노력이 종국에는 다 우리의 삶을 보다 더 윤택하고 행복스럽고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려는 삶의 진실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과 관련하여 가장 깊고 큰 진실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삶을 가장 삶다운 삶으로 돌아가 살게 하는 옳은 질서는 무엇입니까? 우리 삶이 그 억누름으로부터 벗어나서 온전한 삶, 본래의 자유롭고 화창한 삶으로 돌아가게 하는 질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유의 질서입니다. 이 자유의 질서야말로 우리의 가장 크고 깊은 삶의 진실이 아닐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지식인의 역할은 의롭지 못한 현실을 불가피한 것이라며 사람들에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정치인의 역할이다. 지식인이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정치인만큼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거듭 말하자면 지식인은 진리와 현실적 부당성을 적절히 타협해내는 정치인의 유연함과 애매함을 버리고 진리를 거울삼아 현실이라는 무게가 만들어내는 거짓된 당위를 철저할 정도로 비판하기로 작정한 자다. 그러니까, “당신이 현실적으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충분히 이해됩니다”라는 말 다음에 “그건 결론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믿으세요”라고 말하는 자는 지식인이 아니다. 그런 듣기 좋은 말, 마음의 힐링을 위한 말은 정치인이나 종교인의 말일 순 있어도 지식인의 말이 될 순 없다. 지식인은 더 어렵고, 불편한 말을 꺼내는 사람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먼저 이 전제가 중요하다-, 그것은 결코 옳은 일은 아니지요”라고 말이다. 이처럼 옳고 그름, 오래된 진리에 매달리는 사람은 보통 재미가 없다. 그래서 인기가 없고 외롭지만 지식인이 옳음, 진리, 진실, 자유의 자리에 서서, 손해를 보고 고립을 자초한다고 해도 권력에 대해 해야 할 말을 할 수 없다면 그는 좁은 전공분야에 자리한 전문가일 뿐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식인의 표상>(1993)에서 “지식인에게는 망명자적인 추방”이 필요하다고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지식인은 자기 자신을 추방하는 자다. 중심에서, 관례적인 성공에서, 일상적인 삶의 이력에서, 현실에서, 자신을 추방하는 자. 지식인은 ‘주변화’에 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추방하는 지식인에게 고립과 외로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아도르노야말로 “추방자로서의 지식인”의 전형이라고 하면서 그가 추방자의 진정한 즐거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물론 추방자로서의 지성인에게 있어 하나의 즐거움이 있다. 놀라게 되고, 결코 어떤 것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삶들을 당황하게 하거나 공포로 몰아넣는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행동하는 것을 익히는 즐거움을 말한다. 지성적 삶은 근본적으로 지식과 자유에 관한 삶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추상성- ‘당신은 좋은 삶을 즐길 수 있기 위해서는 좋은 교육을 받아야만 한다.’라는 보다 진부한 언술로서 추상성- 으로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얻는 경험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어떤 의미에서 지성인은 땅 위에서가 아니라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난파된 조난자와 비슷하다. 이는 작은 땅을 식민화 하려는 목적을 가진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삶이 아니라, 마르코 폴로와 같은 삶과 더 유사한 것이다. 마르코 폴로의 경우는 경이로움에 대한 그의 느낌이 결코 그를 잘못으로 빠뜨리지 않았다. 그는 무단 획득자도, 정복자도, 침입자도 아니었으며, 언제나 여행자였으며, 일시적인 손님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식인이란 누구인가? 망명자, 조난자, 여행자, 손님인 마르코 폴로가 지식인의 표상이라면 노예 무역상, 원주민 노예의 주인, 백인의 기독교인인 로빈슨 크루소는 정치인의 표상이다. 어느 강의 자리에서 나는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세 사람의 화가를 지식인의 표상으로 다룬 적이 있다. 세잔, 고흐, 고갱이다. 이들은 모두 당시 예술계의 주류가 모여 살던 파리를 떠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었다. 즉 자신을 파리에서 추방시켰고, 미술계의 주류에서 벗어나 조난당했다. 세잔은 자신의 고향인 엑상프로방스로, 고흐는 아를로, 고갱은 타히티로 떠났고, 마치 마르코 폴로처럼 자유를 얻었다. 그들은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태도로 당대의 미술계와 유연한 관계를 맺고 지배자적인 애매한 태도를 갖는 대신, 마치 자신을 끝없이 육지에서 바다로 내모는 선원처럼 자기 자신을 추방했다. 또 오직 바다의 자유를 기준으로 육지의 질서를 상대화시키는 선원처럼 그 어떤 종류의 애매함, 유연함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가차 없는 태도로 기존 미술계를 비판했다. 그리고 이들의 망명, 추방은 역설적으로 바다 위에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영토를 만들어 냈다. 세잔의 망명은 ‘입체파’라는 영토를, 고흐의 망명은 ‘표현주의’라는 영토를, 고갱의 망명은 ‘야수파’라는 영토를 획득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지식인이란 누구인가”. 지식인은 좁은 의미에서는 어떤 분야의 전문가를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의 애정과 걱정하는 마음, 누를 수 없는 호기심에 의해 발걸음을 옮기면서, 보다 큰 조감도를 손에 넣기도 하고 경계와 분야를 넘나들어 서로를 잇기도 하는, 자유로운 가치와 관념을 추구하는 자를 뜻한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아마추어리즘’을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학위가 없어도, 교수가 아니라도, 전문가가 아니고, 글을 쓰지 못하고 교육을 덜 받았다 해도 자유의 가치를 따라 살아갈 수 있다면, 바다를 기준으로 땅을 볼 수 있는 자, 바다의 자유로 육지의 질서를 비판하는 자, 바다의 심연에서 새로운 영토를 꿈꾸는 자라면, 그런 자야말로 마르코폴로적인 지식인인 것이다.

 

□ 자료출처 : <월간 海바라기> 2017년 10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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