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드의 회상

등록일2020-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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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드의 회상

신수연

 

 

오후 6시. 조선소 여기저기에서 즐거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잠시 후 야드(yard) 도로에는 사람 물결, 자전거 대열로 장관을 이룬다. 사람들은 전쟁처럼 시끌벅적하게 어딘가를 향하여 끊임없이 가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는 사람들은 도로를 가로지르며 정문을 향하여 달린다. 건물들 주변에는 통근버스가 있고 사람들은 버스를 타기 위해 줄지어 서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각자의 냄새를 풍겨내고 있다. 그것은 공통적으로 땀 냄새, 어쩌면 육체의 가장 강력한 언어 중의 하나일 것이다. 알싸하게 후각이 자극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야드에는 어둠이 가라앉고 가로등 불빛이 밝아온다.

드물지만, 야근을 하기도 했다. 짧은 해의 겨울날, 해거름이 드리워지면서 벌써부터 나는 낮의 북적거림이 가라앉고 조수처럼 밀려올 저녁의 적요에 대하여 설레고 있었다. 한 잔의 따뜻한 차가 필요한 시간. ‘탕비실’의 냉장고에서 유자차 병을 꺼내 들고 돌아서는 순간, 노란 불빛으로 어리어지고 있는 작은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찻잔에 유자차를 떠 넣고 뜨거운 온수를 부었다. 그리고 창가에 가까이 다가서서 밖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찻잔을 소리내어 홀짝거린다. 달콤새콤한 맛이 입안에 퍼지면서 이내 온 몸이 데워지는 듯하다. 생각하면 낮의 일과는 너무나 분주했다. 두 번이나 회의가 열리면서 그때마다 커피를 마셨는데 맛을 음미할 여유는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찻잔을 홀짝거리면서 창 밖으로 눈을 던졌다.

야드는 지금 모든 것들이 정지해 있다. 도크의 크레인들은 마치 정지화면의 이미지처럼 꼼짝없이 서 있고, 쉼 없이 들려오던 경보음도 들리지 않는다. 그 많은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갔을까? 이렇게 조용한 적이 있었던가? 나는 홀로 끝없는 우주의 미아가 된 것은 아닐까? 출처를 알 수 없는 미세한 기계음이 창가에 흐르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방과 후에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선생님의 일을 돕거나, 집 열쇠를 가져오지 않아 중학생인 언니가 마칠 때까지 교실에서 기다렸다가 학교를 나선 적이 있다. 학교를 가득 메우던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사라진 적막한 교정을 마주했을 때, 그 시절의 나는 무서움보다는 오히려 어떤 편안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느 날은 일부러 운동장 그네에 앉아 다른 아이들이 집에 가는 모습을 지켜본다거나 교실에서 숙제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교문을 나설 때 보았던 노을이 지는 하늘의 색깔, 공기의 냄새, 불어오던 바람의 부드러움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렇게 저녁의 야드를 보고 있자니 같이 놀던 친구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운동장처럼 쓸쓸함과 편안함이 동시에 다가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창문에 바짝 다가섰던지 유리에 콧김이 서린다. 유니폼 소매로 한번 쓱 닦아내고는 식어버린 찻잔을 들고 탕비실을 나섰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왠지 실내가 너무 넓어 넓어 보인다. 나는 내 책상 부근을 남기고 나머지 전등은 모두 껐다. 그러자 이번에는 왠지 무섭다는 생각에 정수리 부근이 살짝 저려왔다. 옆 파트 차장님의 책상 위에 놓인 큼지막한 오디오로 음악이라도 틀어볼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자리에 앉았다.

분기가 끝날 즈음이면 내가 담당하고 있는 업무의 실적을 팀원 전체 앞에서 발표해야 한다. 실적이 목표보다 저조할 때는 개선 대책을 제시해야 하는데, 이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매번 같은 방패로 위기를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설계 오작을 핑계로 어느 정도 현실적인 내용이 작성된 것 같다. 내일은 실적 자료를 파트장님에게 보고할 것이다. 모든 파트원의 자료가 취합되면 최종 발표 자료가 만들어지게 된다.

습관처럼 저장하기 메뉴를 여러 번 누르고는 문서를 닫는다. 시계를 보니 열시가 조금 안되었다. 너무 여유를 부렸나 싶다. 사내 메신저를 로그아웃하기 위해 열어보니 아직 설계팀은 온라인 상태로 남아있는 사람들이 많다. 입사 동기에게 이제 퇴근한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밤샘작업이 예상된다는 동기의 회신이 위로 아닌 위로가 된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사무실이 있는 건물 입구에는 수 십 대의 자전거가 세워져 있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주인과 함께 야드를 신나게 돌아다니겠지. 이리저리 뒤엉켜있는 자전거 틈 속에서 이제는 절대 새 것처럼 보이지 않을 자전거 한 대를 꺼냈다. 익숙하게 앞바퀴를 살짝 들고 출입구 쪽으로 머리를 돌려놓는다. 이제는 한 몸이나 마찬가지인 안장에 엉덩이를 걸치고 왼발은 땅 위에, 오른발은 페달에 올린다. 달릴 준비가 되었다.

​조선소에 들어와 자전거를 처음 배웠다. 자전거를 배우는 장소가 한적한 공원도 아니요 온갖 중장비들과 사람이 넘쳐나는 조선소 야드라니, 그야말로 실전 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자전거 주행에 있어 장애물이 될 만한 것들은 야드 곳곳에 매복하고 있다가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와 나에게 시련을 안겨줬다. 특히 도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두꺼운 레일이 가장 넘기 힘든 산이었다. 거대한 골리앗 크레인이 앞뒤로 이동할 수 있도록 레일이 여러 줄로 깔려 있는데, 도크 안쪽으로 들어가려면 이 레일 위를 가로질러 가야 했다. 그런데 자칫 레일과 조금이라도 평행하게 들어서게 되면 어김없이 자전거 바퀴가 레일과 겹치면서 넘어지는 것이었다.

처음 자전거를 타고 레일 위로 넘어졌을 때는 어찌나 부끄럽던지 머리에 쓴 안전모를 턱까지 끌어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스멀스멀 오기가 생겨 야드에 나갈 때마다 일부러 도크를 한 번씩 찾았다. 레일과 가까워지면 넘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속도를 늦추는 것이 문제였다. 오히려 레일 앞에서 페달에 더 힘을 주어 밟으면 균형은 더 잘 잡혔다. 한번 레일을 넘어가자 뒷일은 일사천리였다. 야드 어느 곳이든 자전거를 타고 못 갈 곳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야드라는 새로운 세상과 빠르게 친해지고 있었다.

​두툼한 장갑까지 끼고는 힘차게 첫 페달을 밟는다. 자전거가 앞으로 쑥 나간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찬 공기가 폐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다. 마스크를 눈 밑까지 끌어올리고는 좀 더 속력을 낸다. 사람도, 지게차도, 자동차도, 오토바이도 없는 밤의 야드는 그야말로 자전거를 타기에는 최고의 조건이다.

야드에서 가장 넓은 대로로 접어드는 순간,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신호수다. 야드 내에서 대형 블록을 옮길 때는 블록을 트랜스포터라는 납작하게 생긴 장비에 실어 이동한다. 보통 대형 블록은 대로를 가득 메울 정도로 폭이 넓기 때문에 이동 경로 앞에서 교통을 통제하는 역할이 필요한데 이들을 신호수라고 부른다. 낮 동안의 근무시간에는 대형 블록이 이동하는데 제약이 많아 주로 야간에 작업이 이루어진다고 들었다. 탑재를 위해 적치 장소에서 도크로 이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도크 주변에 다시 적치해두었다가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 도크에 내려놓는 것이다.

호루라기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나 싶더니 멀리 자전거를 타고 오는 신호수 두 명이 보인다. 그 뒤에는 환하게 불을 밝힌 트랜스포터가 있다. 그리고 마침내 트랜스포터 위에 탑재되어 있는 대형 블록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 치장도 하지 않아 투박하고 수수하기까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굵은 골조 그대로의 철판 구조물이 풍겨내는 위엄에 어느새 나도 모르게 압도당하고 말았다.

대체 이 어마어마한 블록이 야드의 어느 곳에 있었을까? 나는 왜 그것을 몰랐을까? 나는 자전거를 길 한쪽으로 바짝 붙여 세웠다. 그리고는 신호수를 필두로 한 그 행렬을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블록은 사람이 걸어가는 것보다 약간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서두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여유를 부리지도 않고 묵묵히 갈 길을 가기만 하는 크다란 형체의 행진. 나는 그것을 바라보자 흘러간 역사 속의 인물인 어떤 어린 왕의 위용이 떠올랐다. 그는 궁정의 정파 갈등 당파 싸움과 외세의 위협 속에서도 정도를 찾으면서, 스스로 굳게 다짐하곤 했다. 블록은 서 있는 자리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스쳐 지나갔다. 나는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고 있었다.

블록의 모습이 멀어지자 나는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나는 페달을 힘껏 밟았다. 바람이 세차게 몸을 때린다. 기숙사로 나 있는 정문으로 가기 위해 코너를 돌았다. 다른 곳보다 약간 어두운 길을 지나가고 있다. 길을 가면서 나는 다시 큰 블록들을 보았다. 이상한 일이다. 처음 오는 길이 아닌데, 하지만 나는 이 블록들을 본 적이 없다. 블록들은 붙박이로 항상 그 곳에 있었지만 나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무엇이 나에게서 블록을 감춰버렸을까? 나는 자전거의 속도를 낮추었다. 나는 자전거를 세웠다. 바람이, 유난히 찬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은 블록들 사이를 돌아서 불어오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높이 들자 블록들은 마치 고대의 유물처럼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왠지 숙연해지고 있었다. 그렇다. 때가 되면 이곳의 블록들은 잠에서 깨어나 힘찬 움직임을 시작할 것이다. 도크로 가는 짧은 여정을 지나 정해진 자리에 탑재되면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드넓은 바다로 나가 온 세상을 누비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어느새 정문에 다다랐다. 문을 나서자 그동안 내가 알아왔던 익숙한 세상이 펼쳐진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학생들, 산책 나온 부부, 길 잃은 강아지까지.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정문 안쪽의 어두운 곳을 바라본다. 그 곳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 그 세상과 다시 만날 내일을 위해 나는 힘껏 페달을 밟았다.​

 

□ 자료출처 : <해양과 문학> 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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