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등록일202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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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예경진ㅣ수필가

 

 

뒷산 할미 바위 앞에 선다. 앞 뒤 좌우 뱅뱅이를 돌면 천지사방이 바다이다. 앞에는 오륙도 사이로 배들이 분주하게 들락거리고, 뒤에는 고요한 바다가 작은 섬들을 품는다. 내 고향 영도의 분주하거나 고요한 바다 그 사이 어디쯤을 오가다보니 나는 어느새 바다 한가운데에 두 발을 담그고 있다.

 

심심해지면 자주 산에 올랐다. 산등성이에 앉아 내려다보는 바다가 좋았다. 점점이 흩어진 섬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바다를 건너는 거인이 된다. 바닷물에 풍덩풍덩 발을 적시며 이 섬 저 섬 사이를 뛰어다니곤 했다. 이후 바다는 내가 사는 세상이 되었고, 그 섬들은 내 삶의 지표가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 올라가서 일주일쯤 지난 때였다. 갑자기 담임이 바뀐다며 우리 선생님이 4학년으로 가셨다. 잠시였지만 아이들은 아버지 같은 선생님이 좋았다. 날벼락이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선생님 옷자락을 하나씩 잡고 졸졸 따라다녔다. 하굣길에는 길옆 작은 언덕에 우르르 떼를 지어 앉아 세상에 일러바쳤다.

 

‘4학년 8반 도둑놈, 우리 선생님 훔쳐 간 도둑놈’

 

어른들이 지날 때마다 손나발로 고했지만 다들 웃으며 그냥 갔다. 분이 덜 풀린 아이들 몇을 이끌고 뒷산에 올랐다. 산등성이에 앉아 눈물을 훔쳤다. 눈물 사이로 바다가 반짝였다. 선생님이 그 햇빛 길을 따라 우리에게로 오실 것 같았다.

 

그때 딱 한 번이었다. 뭘 달라고 떼쓰고 소리 지른 적이 있었던가. 그저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든지, 조건에 맞게 묵묵히 노력할 뿐이었다. 그날은 무슨 용기가 났을까. 여럿의 힘을 믿고 바다에 분풀이를 하니 마음은 풀렸다. 아무리 소리쳐 보아야 떠난 이는 오지 않고 제 것이 아닌 것은 가질 수 없었다. 오륙도까지 갔다가는 되돌아와야 했다.

 

우리 집 탱자꽃 울타리 사이로 오륙도가 잘 보였다. 마당에 앉아 바다 한가운데서 빛나는 섬을 그렸다. 오륙도, 영문도 모른 채 어느 날엔 다섯 개 어느 날엔 여섯 개의 섬을 그렸다. 밀물과 썰물의 조화라고 했다. 어렴풋이 눈이 뜨였다. 오륙도에서 꼭 되돌아오지 않아도 될 성 싶었다. 썰물을 타고 멀리멀리 가보고 싶었다. 동화 속 세상처럼 바다는 따뜻하고 고요하고 신비스러웠다.

 

중학교를 시내로 배정받았다. 귀가할 때 한동안 친구들과 영도다리를 건너 걸어오곤 했다. 차비를 아껴 군것질하는 재미에 힘든 줄 몰랐다. 영도다리 위에서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면 바다가 움직였다. 멀리서 볼 땐 미동도 없었는데 물살이 빠르게 다리를 돌아나갔다. 그 물살을 따라 오가며 장난을 쳤다. 언젠가부터 바다가 말을 걸어왔다. 저를 따라 멀리멀리 흘러가자고 했다. 어떤 날은 꼬드기다가 어떤 날은 보채다가 했다. 언제부터인지 그 물길이 마음속으로 흘러들었다.

 

바다처럼 흘러가고 싶었다. 겉은 늘 변함없는 그저 그런 삶이지만 그 물결을 따라 끊임없이 팔다리를 움직였다. 등성이에서 보던 그 섬 너머까지 나가고 싶었다. 몇 번 숨을 참으면 금방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결은 따뜻했으나 가끔 장난을 쳤다. 자주 병치레를 하게 했고, 소망하는 것을 멀리로 밀어놓았다. 몇 달을 아파 집과 병원만 오갔다. 어떤 밤에 잠이 깨면 부모님과 동생들이 기도하는 게 보였다. 난치병이라는 말에 온가족의 삶은 엉클어졌다. 그래도 물결이 내 손을 놓지는 않았다.

 

어느 가을날 엄마와 걷던 아리랑고갯길, 집까지 가는 길은 아직도 먼데, 엄마의 걸음은 자주 휘청거렸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안간힘을 쓴다. 잠시 눈길을 놓치면 엄마는 길 끝으로 영원히 사그라질 것 같았다. 눈을 들어 길을 올려다보면 그 끝에 아득히 바다가 들어왔다. 엄마와 걷는 마지막 길이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근처 조선소에서 시끌벅적한 소리들이 올라왔다. 심장이 팔딱이는 삶의 소리였다. 그 소리를 친구 삼아 아직은 갈 수 있는 길이었다.

 

바다가 늘 잔잔하기만 하랴. 어쩌다 한숨을 토해내는 날이 있었다. 태풍이 빠져나가는 꽁무니를 좇아 바다에 간 날이었다. 바다는 잔뜩 부풀어 뒤채고 있었다. 제 성미를 이기지 못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들끓었다. 제 속살을 드러낸 바다가 차라리 아름다웠다. 토하고 토해내어라. 오래도록 서서 바다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몇 번이나 그렇게 제 속을 토해내었을까. 그런 뒤에 해변에는 어김없이 쓰레기가 쌓였다. 삶도 때로는 토해낸 제 쓰레기를 다시 제 속으로 삼켜야 하는 법, 쓰라리고 아파하면서 비워내고 삼키면서 삶은 더 넓고 깊어졌거늘.

 

부엌 창으로 바라보는 바다는 늘 잔잔하다. 어제는 봄물이 따뜻하게 오른 구름이 공작새처럼 화려한 날개를 펼쳤다. 온갖 유혹의 손길을 펼치다 무뚝뚝한 바다에 금방 토라진다. 오늘은 구름이 뽀얀 안개비가 되어 산비탈을 타고 내려와 좀 더 과감하게 바다를 애무한다. 그래도 바다는 고요하다.

 

혼자서 간 줄 알았다. 잔잔한 바다를 이루도록 묵묵히 혼자 헤엄친 줄 알았다. 가만 되돌아보면 늘 누군가 함께 있었다. 가족, 친구, 이웃, 선생님, 새 세상을 열어준 책 속의 인물들…. 그들은 하나하나 물방울이 되어 물결을 만들고 파도를 치면서 나를 단단하게 밀어주었다. 쓸쓸한 날에도 지치지 않고 팔다리를 움직여가게 했다. 가만히 지켜보고, 안아주고, 끌어주며 반세기 넘게 나를 키워냈다. 그저 그런 삶이 되도록 모두가 밀어주었다.

 

여느 주말처럼 평생의 짝과 뒷산에 오른다. 어릴 때처럼 산등성이에 앉아 거인놀이를 한다. 바다에 풍덩풍덩 뛰어들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놀다보니 어느 새 작은 섬을 돌아 나온다. 오늘 바다는 여섯 개의 섬을 만들며 잔뜩 부풀어있다. 햇빛 길이 푸근하다.

 

 □ 자료출처 : <해양과 문학> 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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