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나침반

등록일2023-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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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나침반

정연순 ㅣ 수필가

 

 

버스는 북쪽으로 7번 국도를 타고 달렸다. 몸이 굽이진 길에 순응하다 보면 남화산 정상에 조성된 수로부인 헌화공원 앞으로 임원항이 보인다. 푸른 물결을 옆에 낀 긴 회센터는 차에서 잠시 내렸다 가라고 은근한 손짓을 보내는 듯하다.

이즈음이면 나의 유년은 임원의 반짝이는 물결 속에서 너울거렸다. 임원은 산의 허리를 치마폭처럼 휘감는 도로의 아래에 있었다. 읍내에서 태어난 나는 자주 사촌들과 종아리에 물을 찰랑이며 놀았다. 때론 물빛에 마음을 주다 보면 버스는 바람에 넘실거리는 파도를 타듯 눈에 담기기를 반복했다. 그러면 마음이 급해진 나는 정류장을 향해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즈음 버스의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꼭 한두 개씩 빠뜨린 물건이 있었다. 그 물건 중에는 은밀한 것도 있었기에 엄마의 지속적인 물음에는 항상 모르쇠를 했다.

읍내에서 태어난 나의 몸 무늬에 물의 수위는 얼마나 높았던 것일까. 첫 직장을 위해 경기도 안산에 있을 때였다. 병원에서 동기도 사귀고 기숙사에서 지내는 나날은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일에 적응한 이후, 나는 쉬는 날이면 기숙사 앞 작은 정원의 벤치에 앉아 있는 날이 길어졌다. 나중에 동기들은 문학소녀여서 그런가 했다지만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덧씌운 꽃 같은 포장이었다.

쉬는 날, 나는 급기야 성포동 스타프라자 앞에서 오이도행 버스에 올랐다. 그날은 빗줄기가 세찬 날이었다. 나는 막연히 오이도가 섬이니 그곳에 가면 바다를 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나선다는 것은 심장의 박동을 더욱더 세차게 두드렸다. 빗줄기는 창에서 사선으로 흐르고 오이도행 버스는 낮은 담장으로 이어진 길과 나지막한 집들을 지나 소나무가 듬성듬성한 모퉁이를 돌아서 멈췄다.

운전기사는 비 오는 날 혼자 남은 승객을 향해 종점이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땅에 발을 내디뎠다. 비는 여전했다. 펼쳐 든 우산은 바람과 함께 휘감기는 빗줄기를 막아내지 못했다. 나는 금세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었다.

내가 종점 다방에 들어간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정해진 절차 같았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하품하다 들킨 듯한 여자가 손으로 급히 입을 가렸다.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졸지에 타지에서 이방인으로 첫 손님이 되었다. 다방에 들어오기 전에 본 마을 사람은 검은 우비를 입고 삽질하는 남자가 전부였다. 남자는 물길을 내는 듯했다. 삽은 빗줄기를 튕겼고 흐릿한 안개로 집과 풍경들은 카메라의 아웃포커스에 맞힌 듯 윤곽을 잃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본 풍경은 한적한 산골 마을 같았다. 나는 그때야 이름 외에 아무 정보조차 없이 오이도에 간 것을 알아차렸다. 가끔 기숙사에서 물건을 사러 성포동 스타프라자에 갔을 때 지나가던 오이도행 버스를 본 게 전부였던 것이다. 나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내 주변을 쭈뼛거리던 여자에게 바다를 물었다. 여자는 언덕을 넘어야 바다가 보인다고 했다. 나의 서쪽에서의 바다행 첫 시도는 세찬 빗줄기로 다방에서 종지부를 찍었다. 나는 같은 운전사가 모는 버스를 타고 다시 성포동 스타프라자 앞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나는 이생진 시인의 ‘성산포에서’를 들으며 보냈다. LP판은 턴테이블에서 동그랗게 맴돌며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뱉어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고 잠에서 깨어나면 다시 LP판을 뺑뺑이 돌렸다. 그러면서 최소한의 정보를 위해 오이도에 관해 물어보았으나 기숙사 동기 중에는 오이도에 다녀온 이가 없었다.

첫 오이도행 이후 맞이한 휴일의 하늘은 쾌청했다. 드디어 마음의 해갈을 풀 날이 왔다. 나는 천국에 가면 이런 기분일까 하며 다시 스타프라자로 향했다. 오이도행 버스에 오른 내 머릿속은 넘실거리는 바닷물결로 가득했다.

하늘빛은 푸르고 미풍이 불고 거의 완벽한 날이었다. 나는 다방이 있는 종점에서 내려 마을 사람이 알려준 길로 향했다. 야트막한 언덕은 보기보다 멀었다. 걷는 내내 그늘이 없어 햇살이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땀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고 혀는 쩍쩍 갈라졌다. 그러고도 얼마를 걸었을까. 언덕의 꼭대기에 올라서자 갑자기 시야가 탁 트였다. 탁 트인 바다를 향한 나는 눈을 몇 차례 끔벅였다. 햇살은 쏟아지고 배와 물결은 액자 틀에 갇힌 그림처럼 기우뚱한 채 미동조차 없다. 나는 한참 동안 전신주처럼 바다를 향해 서 있었다. 발걸음은 나침반을 상실한 듯 꼼짝하지 않았다. 나는 예상치 못한 서해의 갯벌을 보며 동해의 넘실대는 물결에 더욱더 애타 했다. 결국 오이도에 가서 바다를 향한 순도 높은 그리움만 담고 다시 기숙사로 돌아왔다.

내 마음의 기슭에 왜 동해의 바다가 출렁이는지 알 수 없지만, 되돌아보면 폐결핵에 걸렸을 때, 그것에 걸리면 이 세상에서 갑자기 사라질 수 있는 시절에 밤새 들었던 파도 소리가 내 심장의 박동을 푸른 희망으로 이끈 덕분이 아닐까 유추할 뿐이다.

나는 요즘도 동해의 바다가 그립다. 더불어 내 마음에는 지도가 있다. 그 지도는 일상에서 아득히 심연으로 가라앉았다가 어느 날 불쑥 문을 열고 나온다. 그러면 나는 또 속수무책으로 지도를 향한 마음의 나침반을 끄집어낸다. 그 마음의 나침반에는 아릿하게 위로해주던 바다가 있고, 어린 딸의 수저를 소독하던 엄마도 있고, 잊혔던 풍경도 있다.

나는 어제 남해도 바닷가의 펜션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매년 고래의 날 기념으로 열리는 ‘고래와 바다’ 순회 시전 설치 작업에 동행한 것이다. 사위가 조용해진 밤, 오랜만에 오롯이 돋아나는 파도 소리에 잠을 쉬이 이룰 수 없었다. 새벽부터 여름의 문턱에서 해갈을 맞이하는 비가 세차게 내렸다. 그 비로 인해 잊혔던 마음의 지도를 향해 나침반이 펼쳐졌다. 그 지도에는 내 나이의 절반을 접은 시각이 숨을 토하며 햇살 받은 물결처럼 반짝였다. 나는 또 마음의 지도에 오늘을 새긴다. 그 오늘에 지난 밤 함께 웃던 사람들이 추억의 인각을 찍으며 걸음걸음 들어오고 있다.

 

 

□ 자료출처 : <해양과 문학> 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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