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 속에 담긴 염원(김종찬)

등록일20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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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 속에 담긴 염원

김종찬

 

시리우스 호가 NLL(북방한계선)을 통과한 것은 23시42분이었다. NLL 통과 시각과 위치를 관계 기관에 보고한 박 선장은 본능적으로 긴장되었다. 근 30년 동안이나 배를 탔지만 북한 영해에 들어가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앞으로 몇 시간 후면 북한 관리들과 마주앉아 국가적인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것저것 생각하니 벌써부터 신경이 곤두서고 긴장감이 마음을 옥죄었다.

박 선장은 레이더 탐색거리를 48에서 24마일로 축소했다. 야간조업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를 북한 어선과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작은 목선이라면 레이더 스코프에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캄캄한 바다를 빗질하듯 스코프 상에 바쁘게 돌아가는 스위핑 라인에 잡히는 물체는 아무 것도 없었다. 박 선장은 등화관제를 한 캄캄한 브리지에서 프론트 글라스 밖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잔잔했으나 하늘의 구름장들은 어디론가 바쁘게 달려가고 있었다. 벌어진 구름장 사이로 언뜻언뜻 별빛이 눈짓을 하곤 했다.

-박 선장, 무사히 화물을 인도하고 돌아올 때까지 한시도 방심하지 말고 사소한 일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써 주세요. 선원들 개개인에게도 쓸데없는 말이나 행동으로 엉뚱한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각별히 당부해 주시고요. 시리우스 호 전 선원들의 임무는 오직 말썽 없이 화물을 인도해주고 돌아오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주지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출항 전에 간곡히 당부하던 관계기관 담당관의 말이 귀에 쟁쟁했다.

박 선장은 이제 매스컴을 통해서만 보고들은 미지의 세계에 들어선 것이다. 지금까지 오랜 세월 동안 배를 타고 외국 항구를 드나들면서 북한 선원들과 마주친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악수를 하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닭 소 보듯, 소 닭 보듯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소주라도 한잔 나누면서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야 가슴 가득했지만 언제나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바쁘게 흘러가는 구름장을 바라보고 있던 박 선장은 문득 얼마 전에 하늘나라로 간 K선장을 생각했다. 시인이었던 K선장의 꿈은 청진항 파일럿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노래했다.

배를 타다 싫증나면/까짓것/청진항 도선사가 되는 거야.

..........

신포 차호로 내려가는/명태잡이 배를 피해/나진 웅기로 올라가는/석탄 배를 피해

여수 울산에서 실어 나르는/기름 배를 피해

멋지게 배를 끌어다/중앙 부두에 계류해 놓는 거야.

청진만의 물이 무척 차고 곱단다/겨울날/감자떡을 들고 갯가로 나가노라면

싱싱한 바다 냄새/더불어/정어리 떼들 하얗게 숨쉬는 소리

........

주모가 따라주는 텁텁한 막걸리/한 사발을 건네면서/여기 청진항이 어떠냐고

은근히 묻노라면/내 지나온 뱃길 더듬는 맛/또한 희한하겠지

까짓것/배를 타다 싫증나면/청진항 파일럿이 되는 거야.

-金盛式의 <청진항>에서-

청진이 고향인 K선장은 이렇게 통일된 청진항의 파일럿을 꿈꾸었지만 통일이 되기 전에 하늘나라 파일럿이 되고 말았다. 그가 지금 이 배를 몰고 청진항으로 가고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박 선장이 별빛을 가리고 흘러가는 구름장을 바라보며 K선장을 생각하고 있을 때, VHF(초단파) 무선통신기가 울렸다. 국제무선통신 응답용인 156.8MHz 16채널이었다.

“방금 우리 영해로 들어온 선박, 감도 있으면 응답하세요.”

강한 북한 억양의 우리말이었다. 레이더 스코프 상에도 노란 깨알같이 작은 물체가 소금쟁이처럼 재빠르게 시리우스 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박 선장은 얼른 송화기를 잡았다.

“예, 감도 양호합니다. 오버.”

“선명과 선적(船籍)과 목적항, 그리고 화물 종류와 량을 대시오.”

“선명은 시리우스 호, 선적은 파나마, 목적항은 청진, 그리고 화물은 옥수수 2만5천 톤입니다. 오버.”

북한 쾌속 경비정이었다. 경비정은 소리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려와 전속 항진 중인 시리우스 호를 한바퀴 맴돌며 선명과 선체를 확인했다.

“시리우스, 잘 알았습니다. 안전항해 하시오.”

검색을 마친 경비정은 인차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경비정은 진작부터 시리우스 호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 경비정의 검색을 마친 후 잠시 눈을 붙인 박 선장은 새벽같이 일어나 브리지를 지키고 있었다. 새벽 5시에 화태 앞을 통과한 시리우스 호는 이제 청진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아침 8시였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짙은 청람빛의 청진항 바닷물은 K선장의 시처럼 곱기만 했다.

“올 스테이션 올 스탠바이!”

아침 식사를 일찍 끝낸 선원들은 입항배치에 임했다. 좌현으로 벌봉이 둥그렇게 솟았고 청진 시가지가 손에 잡힐 듯이 점점 가까워졌다. 선속을 낮춘 시리우스 호는 고말산 앞에 있는 검역묘지를 바라보며 서서히 항진했다. 반은 붉고 반은 흰 도선기(導船旗)를 펄럭이며 파일럿 보트가 마중을 나왔다. 도선사는 칠순쯤 돼 보이는 노인이었다. 평생을 험난한 파도와 싸운 듯 몸은 깡말랐지만 강인한 정신력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까불거리는 파일럿 보트에서 줄사다리를 타고 주갑판에 올라와서 다시 5층이나 되는 브리지까지 올라왔는데도 숨가쁜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하략)………

 

□ 김종찬, 1994년 월간문학 신인상 소설 당선

 

◇ 자료출처 : 해기 2003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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