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구도

등록일2021-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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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午後)의 구도(構圖)
김광균

바다 가까운 노대(露臺) 위에
아네모네의 고요한 꽃망울이 바람에 졸고
흰 거품을 물고 밀려드는 파도의 발자취가
눈보라에 얼어붙은 계절의 창 밖에
나직이 조각난 노래를 웅얼거린다.

천장에 걸린 시계는 새로 두시
하이얀 기적 소리를 남기고
고독한 나의 오후의 응시 속에 잠기어 가는
북양 항로의 깃발이
지금 눈부신 호선(弧線)을 긋고 먼 해안 위에 아물거린다.

기인 뱃길에 한 배 가득히 장미를 싣고
황혼에 돌아온 작은 기선이 부두에 닻을 내리고
창백한 감상(感傷)에 녹슬은 돛대 위에
떠도는 갈매기의 날개가 그리는
한 줄기 보표(譜表)는 적막하려니

바람이 울 적마다
어두운 커튼을 새어 오는 보이얀 햇빛에 가슴이 메어
여윈 두 손을 들어 창을 내리면
하이얀 추억의 벽 위엔 별빛이 하나
눈을 감으면 내 가슴엔 처량한 파도 소리뿐

*노대(露臺) : 발코니.

■ 적막한 해안을 바라보며 고독한 오후의 서경을 회화적 필치로 그리고 있다. 고요한 꽃망울, 흰 물거품, 하이얀 기적, 눈부신 호선(弧線), 장미 등의 시어를 동원하여 항구의 풍경을 시각적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다. 기교에 치우친 나머지 공존할 수 없는 '아네모네의 꽃망울'과 '눈보라에 얼어붙은 계절'을 공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 제3, 4연에서 보듯 시인 특유의 체질적 감상성이 드러난 '감상(感傷)', '처량' 등의 평범한 수준에 머물고 만다.
제1연은 해변의 고즈넉한 풍경을 시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눈보라에 얼어붙은 계절'에 '아네모네의 고요한 꽃망울이 바람에 졸고' 있다는 표현은 논리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계절감에 어긋나는 이러한 표현은, 그러나 그의 마음의 풍경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다. 파도 소리를 조각난 노래라고 하듯 시인의 소리까지도 모양으로 형상화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제2연은 항구의 오후의 모습으로, 증기 기관의 흰 연기와 고동을 울리며 북양 항로로 떠나는 기선의 깃발이 반원의 선을 그리며 아득히 멀어져 가고 있다. 북양 항로는 이국적 정취를 부각시킨다. 제3연은 기선이 돌아온 황혼녘의 풍경으로 회한과 추억의 시간이기도 하다. 시인 특유의 서정성에 기인한 감상적(感傷的) 분위기가 조장되고, 보표(譜表)를 그리듯이 날고 있는 갈매기의 모습에서 적막감을 느낀다. 제4연은 화자가 외부 공간으로 자리를 옮겨 앉으면서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다. '추억의 벽 위'에 나타난 내면 공간은 다만 감상의 차원에 머물고 있다.
 
자료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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