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대륙에서 드러난 ‘신항로 개척’의 양면성

등록일2020-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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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대륙에서 드러난 ‘신항로 개척’의 양면성

-누구를 위한 ‘세계사’인가?

 

이은주ㅣ 웨이하이한국학교 역사교사

 

 

 

일상을 마비시킨 코로나19의 위력은 중국을 넘어 우리나라, 그리고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 오늘날 전염병은 이제 더 이상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닌 세계적 문제가 되어 버렸다. 전염병의 역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이다. 당시 중세 유럽 인구의 25%를 숨지게 한 흑사병의 끔찍함에 대해 보카치오는 소설 ≪데카메론≫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이웃에 사는 사람들은 죽은 이에 대한 동정심은 고사하고 시체가 썩어서 자기들에게 병이 옮겨 오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모두 똑같은 예방수단을 찾아낼 궁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관이 모자라 널빤지에 얹혀서 들고 가는 일도 흔했지요. 하나의 관에 둘 또는 세 사람의 시체를 넣는 일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죽은 자를 함께 애도하는 인간적 풍습마저 사라지게 만든 흑사병은 원래 중국 서남부 지방 혹은 중앙아시아 지역의 풍토병이었다. 아시아의 흑사병이 유럽으로 전파된 데 이유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존재하지만 대체로 몽골군이 유럽을 침략할 때 흑사병으로 사망한 자국군의 시신을 적군의 성 안으로 던져 전염병을 확산시켰다는 설이 유력하다.

흑사병이 육지를 통한 전염병의 확산이었다면, 바닷길을 통한 전염병으로 지구 반대편의 문명을 몰락시킨 역사적 사건도 있었다. 그것이 바로 유럽인의 ‘신항로 개척’이다.

15세기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바닷길을 개척하는 것은 경제․정치․종교 모든 면에서 위험을 무릅써도 좋을 만큼의 모험이었다.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를 장악하자 동방의 향신료와 비단을 구할 수 있는 길이 점자 줄어들었다. 당시 후추를 비롯한 각종 향신료는 육식을 주로 하는 유럽인들에게 생활필수품이었고, 중국산 비단은 유럽 귀족들이 선호하는 사치품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를 장악한 이후 향신료와 비단이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에 유럽의 상인들과 투자자들은 동방과 직접 교역할 새로운 바닷길을 찾아 막대한 이익을 얻으려는 야심을 품게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세워진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정치적 통일을 이룩하고 국가의 비상을 꾀하기 위해 해외 진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가톨릭을 국교로 삼은 이 두 나라에게 이슬람 국가를 물리친 전설상의 인물, 프레스터 존이 다스린다는 동방의 국가를 찾아가는 것은 성스러운 행위로 여겨졌다. 대서양을 끼고 있는 두 나라에게 동방으로 갈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것은 정치적․종교적 측면에서 충분한 투자 가치를 가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신항로 개척을 위한 선봉의 역할을 자처한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 교류를 통해 축적된 과학 기술의 발전은 모험을 더욱 실현 가능하게 만들었다. 유럽인은 이슬람의 선박 기술을 받아들여 사각형과 삼각형의 돛을 달아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는 카라벨선을 만들었다. 송에서 전래된 나침반을 항해용으로 개발하여 이용하였고, 아스트롤라베 등 천문 관측기구로 위도, 경도 등을 측정하였다. 이에 따라 항해에 나선 배는 목적지에 정확히 도착할 수 있었다. 또 개량된 대포를 배에 장착하여 해적의 위협도 막아 내었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이 먼 거리 항해를 가능하게 하였고, 그 결과 신항로가 개척되었다.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두 나라의 지원에 힘입어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아프리카 남쪽 끝 희망봉에 도착할 수 있었고, 바스쿠 다 가마는 희망봉을 거쳐 인도에 도달하였으며, 마젤란은 태평양을 가로질러 최초로 세계 일주에 성공할 수 있었다. 특히 오늘날 세계 역사의 중요한 무대 중 하나인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내디딘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이탈리아 항구 도시인 제노바에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살 때 처음 배를 탄 이후로 줄곧 선원을 길을 걸었다. 26살에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거처를 옮긴 그의 눈앞에 펼쳐진 대서양은 “지구는 둥글다”는 천문학자 토스카넬리의 말을 무한 신뢰하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그는 대서양을 거쳐 인도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할 프로젝트를 구상하게 되었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투자자를 찾아 나섰다.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 탐험을 제안했으나 거절 당 한 그는 곧바로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 부부가 함께 통치하는 에스파냐로 발길을 돌렸다. 당시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해외 진출을 꾀하고 있었기에 콜럼버스의 프로젝트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제안한 요구는 무척이나 오만했다.

 

* 자신과 후손들에게 귀족의 칭호와 제독의 계급을 부여할 것.

* 새로 발견한 땅에서 얻은 수입의 10%을 자신에게 줄 것.

* 새로운 무역 루트를 통한 교역의 8분의 1을 자신의 지분으로 할 것.

* 자신이 발견한 땅의 총독으로 콜럼버스 자신을 임명해 줄 것.

 

당연히 그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더 넓은 선교지를 필요로 했던 에스파냐 교회의 성직자들은 이사벨 여왕을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콜럼버스의 프로젝트는 어렵사리 후원자를 얻게 되었다.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선원을 비롯한 통역사, 의사 등 90명을 태운 선박 3척을 이끌고 인도를 향해 돛을 올렸다. 미지의 ‘검은 바다’인 대서양 위를 항해하는 배 위에서 선원들은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다. 금방 도착할 것이라는 선장 콜럼버스의 말과는 달리 육지는 가도 가도 보이지 않았다. 10월이 되자 선원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콜럼버스는 “육지가 보이지 않으면 내 머리를 잘라도 좋소. 그럼 여러분 모두 편안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요.”라고 말하며 선원들을 진정시켰다.

마침내 1492년 10월 12일 새벽에 육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그들의 눈에 비쳐진 육지가 바로 오늘날 바하마제도의 과나하니(Guanahani)로 콜럼버스는 이 섬을 산살바도르(San Salvador:구세주)라고 칭하였다. 이어 그는 오늘날 쿠바에 도달하였는데, 당시 그들은 이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불렀다.

1504년까지 4차에 걸친 콜럼버스의 항해로 유럽인들은 그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대륙과 조우하게 되었고, 그 결과 유럽 각국은 세계를 주도할 만큼의 부와 힘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에 있어서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은 끔찍한 불행의 서막이었다. 콜럼버스를 이어 아메리카에 상륙한 유럽인들은 원주민을 가혹하게 학살하고, 그들의 문명을 무참히 짓밟았다.

무엇보다 원주민을 무기력하게 만든 것은 유럽에서 건너온 전염병이었다. 콜럼버스는 자신의 ≪항해일지≫에서 아메리카에 처음 도달했을 당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배에서 내려 해변에 발을 디뎠을 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일행은 삼일열(tertian fever)을 심하게 앓았다.”

 

삼일열은 48시간을 주기로 반복되는 열과 오한 발작을 동반한 질병으로 우리에게는 말라리아로 알려져 있다. 당시 에스파냐에는 말라리아가 크게 유행하고 있었는데, 콜럼버스의 1차 항해에 참가한 선원들이 바로 이병으로 죽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선원들의 죽음을 전염병 때문이라고 인식하지 못하였다.

 

“여기는 여자가 많은데, 이들은 조신하지 않고 깔끔치도 못했기 때문에 선원들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그는 선원들이 죽어간 이유를 성병 때문이라 생각했고, 그 탓을 원주민 여성들에게 돌렸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에스파냐에서 유행하던 말라리아에 감염된 선원 중 누군가가 수개월 동안 병원균을 몸에 지니고 있었고, 그의 피를 빨아먹은 모기가 병원균을 여러 사람에게 퍼뜨린 것이었다. 특히나 콜럼버스 일행이 도착한 섬에는 모기가 바글바글하였기에 말라리아는 순식간에 선원들 사이에 감염되어 퍼져나갔다.

감염자는 선원들만이 아니었다. 아메리카 각지의 원주민들은 경험하지 못한 병에 시달렸고, 순식간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상륙하기 이전, 이곳에는 말라리아와 천연두, 황열병, 독감 등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유럽에서 유행한 전염병에 대한 항체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원주민들에게 이러한 병은 치명적이었고, 속수무책으로 전염병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멕시코고원 일대에서 번영한 아스테카 제국의 멸망 원인 중 하나도 유럽에서 건너온 천연두 때문이었다. 1520년 쿠바를 지배하고 있던 디에고 벨라스케는 자신에게 충성을 하지 않는 코르테스를 체포하기 위해 원정대를 아스테카로 보냈다. 그런데 이 원정대에 천연두에 걸린 병사가 있었고, 그로 인해 아스테카 전역에 천연두가 퍼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당시 2500만 명이었던 아스테카 원주민은 불과 1년 만에 3분의 2만 남게 되었다. 결국 1521년 8월 아스테카 제국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은 에스파냐인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는 코르테스가 멕시코의 베라크루스 항에 도착한 지 2년 반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12세기에 시작해서 16세기까지 대략 4세기가량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아스테카 제국이 유럽인들이 멕시코에 도착한 지 2년 반 만에, 그것도 수백 명밖에 안 되는 유럽인들에게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그들의 몰락 배경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이후 유럽으로부터 건너온 각종 전염병은 아메리카 원주민들 사이에 더 넓게 퍼져 인구의 70%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힘들게 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신항로 개척의 선두 국가인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팽창 방법은 사뭇 다른 점이 많았다. 포르투갈이 비교적 ‘상업’지향적인 반면, 에스파냐는 ‘정복’의 성향이 더 강했다. 특히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면서 국가를 만들어 간 에스파냐는 가톨릭 수호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 과정에서 에스파냐의 중‧하급 전사 귀족들이 성장하였고, 그들의 잔인함은 당시 에스파냐의 중대한 문제 중 하나였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랜디즈의 표현을 따르면, “말과 칼, 살인의 스릴과 약탈의 즐거움을 맛본 이 ‘귀족 훌리건’들은 무장해제가 쉽지 않은 형편이었고 중앙 정부가 쉽게 통제할 수도 없는” 곤란한 인간들이었다. 국가는 이들을 회유할 방법으로 국외 파견을 결정하였다.

아메리카 각 지에 파견된 이들은 총으로 무장한 소수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돈이 될 만한 곳을 찾아 무력을 행사하였다. 이때 파견된 전사 귀족들은 대체로 에스파냐의 척박하고 황량한 내륙 지역 출신이었다. 이들은 무력을 통해 부를 얻을 수만 있다면 세계 어디든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했기에 이들 앞에 나타난 원주민은 죽여야 할 대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카리브해의 섬에 도착한 선원들은 주저 없이 원주민을 살인하고 약탈하였다. 이스파뇰라섬에서 직접 경험한 것을 기록한 라스카사스 신부의 다음 증언은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가톨릭 신자들은 마을을 공격하면서 어린이, 노인, 임산부, 혹은 출산 중인 여인까지 한 명도 살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칼로 찌르거나 팔다리를 자르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마치 도살장에서 양을 잡는 것처럼 갈가리 찢었다. 그들은 한칼에 사람을 벨 수 있는가, 머리를 단번에 잘라낼 수 있는가, 혹은 칼이나 창을 한번 휘둘러서 내장을 쏟아낼 수 있는가에 대해 서로 내기를 걸었다. 어머니의 품안에 있는 아이를 낚아채서 바위에 집어던져 머리를 부딪치게 하든가 강물에 집어던지고는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했다. “악마의 자식들아, 그곳에서 펄펄 끓어라.” …… 그들은 키가 낮은 교수대를 만들어서 발이 겨우 땅에 닿을까 말까 할 정도의 높이로 사람을 매달아놓았다. 구세주 예수와 12제자를 기념한다면서 13명을 이렇게 매단 다음 불타는 장작을 발치에 두어서 산 채로 태웠다.”

 

비뚤어진 믿음을 가진 가톨릭 신자들의 잔혹한 행동은 원주민들에게 가톨릭에 대한 반감마저 불러 일으켰다. 에스파냐인들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그들로부터 계속 도망을 다니던 쿠바 추장 하투에이가 잡혔다. 그는 도망을 쳤다는 이유만으로 사형에 처해졌고, 죽기 직전 가톨릭 수사로부터 가톨릭 신앙을 갖지 않고 죽으면 지옥에 가서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자 그는

“가톨릭 신자들은 모두 천국에 갑니까? 라고 물었다.

“그렇다” 라고 수사가 대답하자, 그는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지옥으로 가겠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처럼 무자비한 폭력을 동반한 에스파냐의 가톨릭 신도들에 대해 원주민들은 강한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의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의 수는 1,500만 명에 달하였다. 오죽하면 이런 난폭한 병사들을 콘키스타도르(정복자)라 불렀겠는가.

아메리카 문명을 파괴한 유럽의 정복자들은 그들의 정복 사업을 위해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의 노동력도 착취하였다. 원주민은 정복자들이 빼앗은 금‧은광이나 그들이 건설한 사탕수수, 담배 등을 재배하는 대농장에 끌려가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이처럼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엄청난 희생을 주장하는 견해를 ‘흑색 전설’이라 부르는데, 이로 인해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은 괴멸되다시피 하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유럽인의 신항로 개척을 역사적 진보의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암흑의 중세를 지나 근대로의 발전을 가능케 한 여러 역사적 사실 중 하나로 평가하였던 것이다. 신항로 개척으로 서유럽은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아프리카-유럽-아메리카를 연결하는 삼각 무역의 꼭짓점으로서, 유럽의 위상은 더욱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도시의 상공업자들은 크게 성장하였고, 교역망이 확대되면서 주식회사 등의 근대적 기업이 등장하였다. 이른바 ‘상업 혁명’이라 부르는 경제적 대 전환이 일어난 계기가 바로 신항로 개척이었다.

유럽인의 입장에서 보면 신항로 개척은 약동의 시작이자 번영을 가져다 줄 식민지 건설의 발판이었겠지만, 원래 그곳에 살던 원주민의 관점에서 보면 신항로 개척은 비극의 시작이자 피식민 세계로 들어가는 지옥의 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쉽게 ‘신항로 개척’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가 시작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동안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문명들이 만나게 되었고, 전 지구적 교류가 가능할 수 있었던 첫 걸음이 바로 새로운 바닷길을 향한 유럽인들의 모험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는 말처럼 이긴 자 만이 역사를 기록할 수 있고, 이렇게 기록된 역사는 기억을 통해 대를 거쳐 재생산되기에 결국 이러한 평가는 유럽인의 시각을 반영한 결과물일 뿐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는 끔찍했던 역사가 유럽인들에게는 호시절의 역사로 인식되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역사가 지닌 양면성을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상륙한 날인 10월 12일을 기념하는 방식의 차이에서도 역사의 양면성이 드러난다. 미국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이 날을 ‘콜럼버스의 날’로 기념한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온 300년 되던 해인 1792년 뉴욕에서 처음 콜럼버스의 날을 기념한 것을 시작으로 백 년 후인 1892년에는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은 이날을 승리의 역사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멕시코에서는 이날을 ‘인종의 날’로 부르는데, 이는 에스파냐, 인디언, 아프리카 흑인들의 피가 합쳐져 하나의 인종이 됐다는 의미이다. 문화 및 인종의 융합 측면에서 이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칠레 역시 멕시코와 유사한 이름으로 이날을 기억한다.

한편 볼리비아는 2002년부터 10월 12일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개명하였다. 미국 내에서도 종래의 입장과 결을 달리하며 ‘원주민의 날’로 개명하여 기념식을 가지는 도시가 있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버클리이다. 심지어 우루과이 인디언들은 10월 12일이 아닌 10월 11일을 기념한다. 그들은 이날을 ‘마지막 자유의 날’이라 부르는데, 누군가에게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발을 디딘 그 날이 자유를 상실당한 날이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향해 대서양을 가로지른 유럽의 정복자들은 한동안 세계사에서 ‘탁월한 정복자’ 혹은 ‘위대한 모험가’로 불렸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이들이 그들의 업적을 다시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세계사에 남긴 업적을 충분히 높이 평가하되 그들의 야만성과 폭력성도 함께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항로 개척’을 유럽인의 시각에 따라 평가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한때 우리나라의 세계사 연구는 유럽사 중심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세계사 연구자들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등의 서술적 오류를 범해왔다. 과연, 이들이 아메리카와 희망봉을 발견한 것이 맞는가. 이 곳에 원래부터 살고 있었던 자들이 발견한 땅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 발견’이라 부르는 유럽인들의 무지함을 무심코 따라하지 않기를 바란다.

 

□ 자료출처 : <해양과 문학> 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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