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르낙의 詩
김미진ㅣ불문학 박사
까르낙은 선사시대 선돌 3000개를 품고 있다. 그래서 그 이름도 ‘돌무더기가 있는 곳’이라 불린다. 기원전 3000년에서 5000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 이외에는 4킬로미터 이상 나란히 줄지어 선 선돌들의 목적과 용도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작은 바다’라는 뜻의 르 모르비앙(Le Morbihan) 만(灣)에 있는, 수십년째 인구가 삼천, 사천 밖에 되지 않는 소읍이다. 이처럼 이름만으로도 그 곳의 풍경이 그려지는 까르낙에서 으젠 길빅(Eugène Guillevic, 1907-1997)은 태어났다.
1942년 첫 시집 테라케(Terraqué), 그리고 1961년 시집 까르낙은 바다와 돌의 고장, 까르낙에 대한 시인의 남다른 애착을 잘 보여준다.
여러 바다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어부의 바다,
항해가들의 바다,
수병들의 바다,
바다에서 생을 마치고자 하는 자들의 바다.
난 사전(事典)은 아니기에,
우리 둘에 대해 말할 것이다
내가 바다라 할 때는,
그건 항상 까르낙의 바다다.
(까르낙, 158쪽)
길빅에게 까르낙은 시적 대상이 아니다. 개인적인 기억이나 브르타뉴 지방만의 토착적인 정서를 불러내기 위한 구실이 아니다. 까르낙의 선돌들과 바다는 육화된 詩로 그 곳에서 길빅은 자신의 시학을 완성한다. 그것은 “근원”, “핵”(시학, 221쪽)으로 부단히 나아가는 시(詩)다.
먼저 바다쪽부터 살펴보자. 바다는 “無”의 가장자리에 있으며, “無”와 뒤섞여 있다.(까르낙, 143쪽) 거대한 덩어리로 존재할 뿐, 가늠도, 포착도 불가하다. 무형(無形)은 바다의 근본적인 속성이다. 아무리 큰 파도를 보내도 해변에 다다르면 어느새 사라지고 만다. 바다는 “바위들”처럼 단단한 “골격”을 가지고 싶다. 그래서 혀인 파도로 쉴새없이 “바위들”에게 알랑거린다. 하지만 가능할까?
넌 바위들을 꿈꾸지
골격을 가지고 싶어서.
계속해, 계속해,
바위들에게 네 파도로 아첨을 해
(까르낙, 177쪽)
바위가 될 수 없다면 땅 속으로라도 파고 들고 싶다. 때로는 습지가 되고, 강도 되어보지만, 바다는 어느 순간 다시 “無”로 되돌아간다. “풀과 하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파도는 육지로 계속 밀려오는 것이다.
네가 또한 원하는 것은
땅 속까지 길게 이어지는 것,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가, 풀과 하나가 되는 것.
넌 강들을 만들어 내고,
해묵은 습지들을 만들어 내지.
하지만 그 곳에서 너는 사라져버리지
몸을 잃어버리고
無가
너를 관통해버리지.
(까르낙, 201-202쪽)
그런데 왜 바다는 땅 속 깊이 파고 들어가 “풀”과 하나가 되고 싶은 것일까? “풀”을 부러워하는 것은 바다만이 아니다. 시집 시학 L’Art poétique을 보자.
나무는
땅 속에 뿌리를 박고 있다.
시는
시 속에 뿌리를 박고 있다.
(시학, 226쪽)
“풀”과 “나무”는 길빅이 지향하는 시를 구현한다. 아주 조그마한 씨앗에서 비롯되었지만 영원히 성장을 멈추지 않는 시,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자기력(磁氣力)으로 서로를 계속 끌어당기며, 합체를 거듭하는 정해진 “크기가 없는”(시학, 276쪽) 시다.
나의 시와 성당 :
비슷함.
서서,
끝을 향하는
수직으로,
높은 곳을 향해,
저절로 가지고
오며,
더욱더 커져가는 것을 맞아들이는.
(시학, 156쪽)
길빅은 까르낙에서 시의 또 다른 모델을 찾아낸다. 바로 까르낙의 “선돌”이다.
까르낙의 선돌들은
모두가 시(詩)
(시학, 212쪽)
외관은 소박하지만 “선돌”은 수천년 세월의 켜만큼 심오한 비밀을 담고 있다. 실제로 길빅의 언어는 그 “선돌들”을 모방하고자 한다. 그 결과, 형용사는 매우 드물고, 생략 또한 빈번하게 이루어져 아포리즘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시가 간략하다. 하지만 침묵과 밀도 높은 시어의 사용 때문에 신비롭지만 때로는 난해하다는 평가도 받는다.
반면, 바다는 인간적이다. ‘이번에는 반드시 저 곳에 다다르고 말거야’라고 외치는 듯 몸을 크게 일으켜보지만 어느새 스러지고 만다. 매번 “無”로 끝날 줄 알면서도 그 열망을 버리지 못한다.
부딪혀라, 부딪혀라, 부딪혀라,
그것이 너를 사로잡고 있다면
우리에게
그 풍경은 장대하다
잘 알겠다
그것이 너를 사로잡고 있음을
수직으로
땅 위로
너의 몸을 일으키게 하는 그것
(까르낙, 176-177쪽)
파도는 무수한 “경계들”에 막혀, 멈추고, 사라진다. 파도도, 그리고 시인도 그 “벽”을 넘을 수가 없다. “선돌”같은 “시”를 열망하지만, “성당”처럼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는 “시”를 바라지만 실현은 녹록하지 않다. 길빅은 어느새 바다와 매우 닮은 자신을 발견한다.
너는 온다 너는 간다
경계들 안에서
네가 만들지 않은
그 어떤 법 안에서
우린 둘 다
그 벽을 알고 있지.
(까르낙, 207쪽)
바다도, 시인도 그 “벽”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쓰고, 또 쓴다. 그들에게는 “말해야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대양 역시
쓰고, 또 쓴다.
밀물 때마다
모래 위에 쓴다.
매일같이 쓴다,
늘 같은 것을.
그것은 틀림없이
자신에게 말해야만 하는 것,
늘 같은 것이지만
그 누가 그것을 지겨워할까?
질투하지마라 :
대양이니까.
□ 자료출처 : <해양과 문학> 24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