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르낙의 詩

등록일2020-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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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낙의 詩

김미진ㅣ불문학 박사

 

 

까르낙은 선사시대 선돌 3000개를 품고 있다. 그래서 그 이름도 ‘돌무더기가 있는 곳’이라 불린다. 기원전 3000년에서 5000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 이외에는 4킬로미터 이상 나란히 줄지어 선 선돌들의 목적과 용도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작은 바다’라는 뜻의 르 모르비앙(Le Morbihan) 만(灣)에 있는, 수십년째 인구가 삼천, 사천 밖에 되지 않는 소읍이다. 이처럼 이름만으로도 그 곳의 풍경이 그려지는 까르낙에서 으젠 길빅(Eugène Guillevic, 1907-1997)은 태어났다.

1942년 첫 시집 󰡔테라케(Terraqué)󰡕, 그리고 1961년 시집 󰡔까르낙󰡕은 바다와 돌의 고장, 까르낙에 대한 시인의 남다른 애착을 잘 보여준다.

 

여러 바다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어부의 바다,

항해가들의 바다,

수병들의 바다,

바다에서 생을 마치고자 하는 자들의 바다.

 

난 사전(事典)은 아니기에,

우리 둘에 대해 말할 것이다

내가 바다라 할 때는,

그건 항상 까르낙의 바다다.

(󰡔까르낙󰡕, 158쪽)

 

길빅에게 까르낙은 시적 대상이 아니다. 개인적인 기억이나 브르타뉴 지방만의 토착적인 정서를 불러내기 위한 구실이 아니다. 까르낙의 선돌들과 바다는 육화된 詩로 그 곳에서 길빅은 자신의 시학을 완성한다. 그것은 “근원”, “핵”(󰡔시학󰡕, 221쪽)으로 부단히 나아가는 시(詩)다.

먼저 바다쪽부터 살펴보자. 바다는 “無”의 가장자리에 있으며, “無”와 뒤섞여 있다.(󰡔까르낙󰡕, 143쪽) 거대한 덩어리로 존재할 뿐, 가늠도, 포착도 불가하다. 무형(無形)은 바다의 근본적인 속성이다. 아무리 큰 파도를 보내도 해변에 다다르면 어느새 사라지고 만다. 바다는 “바위들”처럼 단단한 “골격”을 가지고 싶다. 그래서 혀인 파도로 쉴새없이 “바위들”에게 알랑거린다. 하지만 가능할까?

 

넌 바위들을 꿈꾸지

골격을 가지고 싶어서.

 

계속해, 계속해,

바위들에게 네 파도로 아첨을 해

(󰡔까르낙󰡕, 177쪽)

 

바위가 될 수 없다면 땅 속으로라도 파고 들고 싶다. 때로는 습지가 되고, 강도 되어보지만, 바다는 어느 순간 다시 “無”로 되돌아간다. “풀과 하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파도는 육지로 계속 밀려오는 것이다.

 

네가 또한 원하는 것은

땅 속까지 길게 이어지는 것,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가, 풀과 하나가 되는 것.

 

넌 강들을 만들어 내고,

해묵은 습지들을 만들어 내지.

 

하지만 그 곳에서 너는 사라져버리지

몸을 잃어버리고

 

無가

너를 관통해버리지.

(󰡔까르낙󰡕, 201-202쪽)

그런데 왜 바다는 땅 속 깊이 파고 들어가 “풀”과 하나가 되고 싶은 것일까? “풀”을 부러워하는 것은 바다만이 아니다. 시집 󰡔시학 L’Art poétique󰡕을 보자.

 

나무는

땅 속에 뿌리를 박고 있다.

 

시는

시 속에 뿌리를 박고 있다.

(󰡔시학󰡕, 226쪽)

 

“풀”과 “나무”는 길빅이 지향하는 시를 구현한다. 아주 조그마한 씨앗에서 비롯되었지만 영원히 성장을 멈추지 않는 시,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자기력(磁氣力)으로 서로를 계속 끌어당기며, 합체를 거듭하는 정해진 “크기가 없는”(󰡔시학󰡕, 276쪽) 시다.

 

나의 시와 성당 :

비슷함.

 

서서,

끝을 향하는

 

수직으로,

높은 곳을 향해,

 

저절로 가지고

오며,

더욱더 커져가는 것을 맞아들이는.

(󰡔시학󰡕, 156쪽)

 

길빅은 까르낙에서 시의 또 다른 모델을 찾아낸다. 바로 까르낙의 “선돌”이다.

 

까르낙의 선돌들은

모두가 시(詩)

(󰡔시학󰡕, 212쪽)

 

외관은 소박하지만 “선돌”은 수천년 세월의 켜만큼 심오한 비밀을 담고 있다. 실제로 길빅의 언어는 그 “선돌들”을 모방하고자 한다. 그 결과, 형용사는 매우 드물고, 생략 또한 빈번하게 이루어져 아포리즘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시가 간략하다. 하지만 침묵과 밀도 높은 시어의 사용 때문에 신비롭지만 때로는 난해하다는 평가도 받는다.

반면, 바다는 인간적이다. ‘이번에는 반드시 저 곳에 다다르고 말거야’라고 외치는 듯 몸을 크게 일으켜보지만 어느새 스러지고 만다. 매번 “無”로 끝날 줄 알면서도 그 열망을 버리지 못한다.

 

부딪혀라, 부딪혀라, 부딪혀라,

그것이 너를 사로잡고 있다면

 

우리에게

그 풍경은 장대하다

 

잘 알겠다

그것이 너를 사로잡고 있음을

수직으로

땅 위로

너의 몸을 일으키게 하는 그것

(󰡔까르낙󰡕, 176-177쪽)

 

파도는 무수한 “경계들”에 막혀, 멈추고, 사라진다. 파도도, 그리고 시인도 그 “벽”을 넘을 수가 없다. “선돌”같은 “시”를 열망하지만, “성당”처럼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는 “시”를 바라지만 실현은 녹록하지 않다. 길빅은 어느새 바다와 매우 닮은 자신을 발견한다.

 

너는 온다 너는 간다

경계들 안에서

 

네가 만들지 않은

그 어떤 법 안에서

 

우린 둘 다

그 벽을 알고 있지.

(󰡔까르낙󰡕, 207쪽)

 

바다도, 시인도 그 “벽”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쓰고, 또 쓴다. 그들에게는 “말해야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대양 역시

쓰고, 또 쓴다.

밀물 때마다

모래 위에 쓴다.

매일같이 쓴다,

늘 같은 것을.

 

그것은 틀림없이

자신에게 말해야만 하는 것,

 

늘 같은 것이지만

그 누가 그것을 지겨워할까?

 

질투하지마라 :

대양이니까.

 

□ 자료출처 : <해양과 문학> 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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