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등록일20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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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춘

 

작가 : 조셉 콘래드. 1857년 출생

저작 연도 : 1898년

장르 : 단편소설

 

 

작가 소개

조셉 콘래드는 19세기와 20세기, 근대와 현대를 잇는 대표적인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또 선원으로서 겪은 해양경험을 소재로 작품을 쓴 해양문학가로서도 유명하다.

 

콘래드는 흔히 영국 작가로 불리어지지만 그의 태생은 폴란드이다. 그는 원래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독립운동가로서 험난한 정치적 역정을 걸어감에 따라 그의 가족은 생활이 평탄치 않았고,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이것은 나중에 콘래드로 하여금 해양작가가 되게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수많은 도전적인 빈털터리 청년들이 바다를 일터로 삼고 생업을 해결한 것처럼 콘래드도 바다로 나아가 선원이 되면서 인생을 시작하였다.

 

훗날 그는 인문학과 문예창작 공부에 매진하여 선원생활(선장)을 마친 후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되는데 단편소설 ‘청춘’은 그가 겪은 해양생활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서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의 하나이다. 그의 작품은 그로 하여금 해양소설가로서 명성을 얻게 하는 동시에 문학사의 관점에서 보면 본격적인 현대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들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상선의 선장 출신의 그는 실로 역사상 가장 ‘문학적인’ 선원이고 선장이 틀림없다. 그의 해양문학 작품에는 당시 영국 해양사회의 명암과 개인의 꿈과 도전과 갈등, 자아의 발현이 묘사되어 있고, ‘선원정신’이 주제전개에 묻어 있으며 이러한 사실로 보건대 당시 영국의 대중일반은 해양의식화 과정을 거쳐가고 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 볼 수 있다. 영국이 해양국가라는 것은 콘래드라는 해양의식에 충실한 해양작가를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이유는 충분하다고 하겠다.

 

 

 해상노동의 특성

임금노동에 관한 개념은 경제학자이며 세계 공산주의자들의 좌장인 칼 마르크스에 의하여 정립되었다. 노동자의 노동, 노동력은 그 자체로서 상품의 가격을 형성하는 구성요소가 되며 자본가는 노동자에 의하여 생산된 상품의 가치를 극대화하여 시장에서 판매를 하게 되는데 이 때 발생하는 이윤의 혜택에서 노동자가 제외됨으로써 그 결과 노동자는 착취를 당한다고 보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당시 마르크스는 다른 평화적인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유럽 자본주의의 현실문제에 대하여 매우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그는 집필과 강연을 통해 대중에게 자기의 주장을 알렸고, 유럽의 노동일반의 연대를 도모하여 시위와 폭동까지도 주동하였으며, 공산주의자 선언(Menifesto de Commune)을 완성하여 당시 유럽사회와 미국에까지 그의 주장을 알렸고 훗날 ‘선언’의 공산주의자 강령은 러시아를 위시한 공산국가들의 헌법처럼 되었다.

 

이러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최대 피해국은 물론 한국이다. 6.25 동란은 세계 전사상 가장 슬픈 전쟁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전의 일이지만, 그런 한편으로 유럽에서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은 자본가의 노동자착취라는 자본주의 체계의 모순에 각성과 수정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날 우리가 채택하고 있고, 또 그렇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는 1일 8시간 노동시간제가 바로 그것이다. 마르크스가 생존하던 시기에 유럽의 노동자들의 상황은 사실 비참했다. 어린이와 연약한 여성에 관한 노동이 어떠한 사회적 배려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노동시간도 턱없이 많아 노동자들은 밥먹고 잠자는 시간외는 노동을 해야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유럽사회에 자본주의적 생산과 인적 노동구조를 이루는 분업의 형태는 대량의 국제간 물류를 수행하는 해상의 선박에서 선행적으로 나타났다. 대항해시대에 해운을 주도해간 포르투갈, 스페인, 네들란드, 영국의 해양입국 이데올로기는 전 국민을 바다로 향하게 했고, 대양을 건너는 항해선에서 선원들은 대자연과 맞서며 선박을 운항했다. 당시 선원들의 근로 행태는 문학작품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범선 무역선의 선원들의 항해와 삶을 그린 콘래드의 ‘청춘’에서 선원들은 당직근무와 비당직근무의 노동에 종사하고 있고 그들의 업무는 선장, 항해사, 조타수, 목수, 조리사 등 선내업무를 분업하여 수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범선에서 선원들의 노동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바다, 그 중에서도 대양은 태풍, 또는 폭풍의 발원지이고 천둥, 번개, 삼각파와 긴 파장의 너울성 파도를 동반하는 대자연 현상의 영원한 두려운 벌판이다. 지금에야 최첨단과학의 공법으로 설계하고 정밀한 위치확치 확인 계기, 나침의와 자동조타장치에 의한 보침성, 디젤엔진에 의한 막강한 추진동력으로 나아가는 금속선에서 거주공간 또한 안전하고 편리하게 확보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열악한 주거시설에다가 구조적으로 대자연에 거의 노출된 채 항해했다고 말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항해 중 황천을 만나면 돛이 찢겨져 나가고 심하면 어쩔 수 없이 돛대를 찍어내야 하는 일도 있었으며 목선인 탓에 이음매 틈새로 침수는 보통 있는 일이었고, 횡요가 심하여 배가 기울면 기울기를 조절하기 위하여 배의 바닥으로 내려가 바닥짐(밸러스트)으로 실은 모래를 삽으로 퍼 반대편 현측으로 옮겨야 했다. 그러므로 범포와 삭구 다루는 일, 침수를 막기 위하여 새는 틈새를 뱃밥 메우는 작업, 쉼없이 자아야 하는 펌프질, 폭풍에 조우하면 재빨리 돛의 활대에 올라가서 돛을 줄여야 하는 작업 등으로 대양을 건너는 범선의 선원들은 언제나 ‘스탠바이’ 상태를 유지하며 쪽잠을 잤다.

 

이와 같은 노동조건, 생활조건 속에서 갖는 ‘청춘’의 꿈은 실로 그로테스크하다. 그가 처한 항해선의 선원사회 속의 인물들이 ‘꿈꾸지 않는’ 초상으로 실재한다면 그는 꿈을 잃지 않는, 아니 더더욱 꿈을 꾸는 존재로서 환상에 가깝다. 그 환상의 끝에 있을 동양, 그 꿈이 비록 환상일지라도 지금의 그저 초라한 청춘을 뜨겁게 달궈줄 격려해 줄 동양이라면 후회하지 않겠다는 글의 행간에 묻어 있는 뉘앙스. 배의 선수의 선명 밑에 기록된 표어 ‘일하라, 아니면 죽어라’가 시사하는 노동, 노동자에 대한 자본주의적 폭력성과 잔인성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죽도록 일하면 드디어는 모든 것을 극복하고 수평선 너머 꿈꾸는 낙원에 도착하리라는 믿음의 ‘청춘’ 주인공 이등항해사의 인물설정은 이 소설이 그로테스크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된다.

 

 

등장인물

1. 선장 : 19세기 선원사회, 그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한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비틀어진 외모를 가진 노인이다. 퀭한 눈동자와 움푹파인 양볼의 얼굴과 굽은 허리, 안짱다리의 외모이고, 조용하지만 매우 자기만족, 자기도취에 빠지는 성품이다.

 

2. 일등항해사 : 매부리코에다 하얗고 긴 수염의 얼굴을 한 노인. 운명적이며 비관적인 인생관을 지녔으며 매사에 체념적이지만 항해사로서 해양에 대한 경험은 풍부하다.

 

3. 주인공 ‘나’ : 책임감이 강하고 자기주도적인 인생을 살고 싶어하며 늘 새로운 세계를 동경하는 20세의 ‘꿈 많은’ 청년이다. 물질적 가치보다 정신적 가치를 더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어린 나이에(14세) 일찍부터 선원이 되었고, ‘화려한 쾌속 범선’의3등항해사에서 거의 폐선에 가까운 노후선의 2등항해사 직을 받아들이는 이유가 일단은 보다 ‘지휘적인’ 직급에 오르게 되고, 무엇보다도 평소에 늘 동경해 온 동양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항해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형이랄 수 있다.

 

4. 선장 부인 : 어쩌면 작가는 선장 부인의 인물묘사를 통하여 당시 해양사회의 선원에 대하여 선원가족이 갖는 따뜻한 애정과 배려를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 중에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거의 장애인에 가까운 노년의 선장에 대한 선장부인의 사랑은 매우 따뜻하다는 것을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녀는 배가 선적지에서 한달 간 체류하면서 방선을 하여 배에 체류하게 되는데, 이 때 거의 모든 떠나가고 선장, 항해사들, 급사, 주방장만 남게 되고 선장부인은 남은 선원들과 함께 생활한다. 그녀는 선원들을 위하여 주방에서 요리하는 일을 서슴치 않고, 더군다나 주인공인 ‘나’를 위하여 나의 옷의 단추를 깁는 바느질 일을 해 주는 등, 주인공은 그녀로부터 어머니 또는 할머니의 자상함을 느낀다. 출항을 앞두고 기차역까지 그녀의 가방 짐을 들어다 주는 주인공에게 그녀의 늙은 남편을 잘 보좌해줄 것을 당부한다.

 

5. 범선인 무역선 ‘쥬데아 호’ : 400톤 규모의 범선 쥬데아호는 마치 아무렇게나 허물어진 폐가에 비교할 만큼 기괴하다. 선체 곳곳마다 먼지가 꼈고, 헐고, 망가지고, 녹슬었으며 그것의 외관은 건축미와는 전혀 무관할 정도로 멋스러운 데라고는 전혀 없다. 그것의 선미의 선명이 새겨진 부분 아래에는 ‘일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으라’라는 무시무시한 표어가 크게 써져 있다. 사회주의 강령이 실천적으로 전개되던 19세기 말 유럽사회였지만 해양에서는, 해운에서는, 이렇게 선원사회에서는 여전히 부르주아적 노동수행만이 채찍질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소설의 주제전개 상 무역선 쥬데아 호와 그 존재성은 무너뜨려야 할 ‘옛것’ 또는 ‘구악舊惡’의 상징이 분명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단정하기가 그리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쥬데아 호의 그와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인 ‘나’는 쥬데아 호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한다. 쥬데아 호에 대하여 내가 갖는 깊은 애정은 마치 오래되어 낡아빠졌지만 결코 버릴 수 없는 흑백사진의 앨범에 가까운 데가 있다. 그는 비틀어지고 말라빠지고 망가진 옛 전통을 결코 버릴 수 없다. 그는 거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온기를 느끼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형편없는’ 무역선 쥬데아 호는 수평선 너머에 있을 그가 꿈에도 그리는 이국異國 동양으로 데려다 줄 것이 아닌가? 이처럼 쥬데아 호의 상징성은 다중적인 데가 있고, 그로 인하여 해양소설 ‘청춘’의 주제전개는 그로테스크해진다.

 

 

작품 소개

그 시절 영국은 바다의 제국이었다. 전 지구적으로 수많은 식민지를 가졌고 영국령의 광대함은 해가 지지 않는 영국이 되게 했다. 그들의 해양 패권은 항해, 모험, 발견, 교역, 침탈, 점령, 식민의 다양한 얼굴로 해석된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확립한 세계국가 영국의 힘의 근원은 상당 부분 바다로부터이다. 소설 청춘의 이야기 중에서 ‘그 당시 영국은 바다와 인간이 서로 얽히고 섥히고 엮이는 그런 곳’이라는 작가의 서술처럼 영국은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개인사적으로 바다는 영국 국민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바다로부터 수많은 혜택을 거두어들였지만, 동시에 또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영국 본토 연근해에서의 선박 사고와 인명 희생은 물론이고 원양으로 나아가면서 겪은 항해경험에는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위대한(?) ‘바다라는 대자연과의 맞섬’이 있었고, 해양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그렇다치더라도 그와 같은 극심한 고생의 해상노동과 어쩔 수 없는 질병과 사망과 난파, 침몰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바다로 나아간 개인들의 ‘이유’는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미지로 설명하건대, 매우 기괴한 시대 풍경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바다, 그 너머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가? 동양, 바로 동양이 거기에 있다. 작품 속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 앞에 모든 동양이 있고, 전 생애가 있었지’라는 동양, 그 동양 말이다. 대항해시대 동안에 동양의 수많은 물자가 서양으로 흘러들어갔다. 그 기간 동안 서양은 가히 동양을 빨아들이다시피 교역했다. 거기에는 다수 불평등무역과 수탈과 노예무역 같은 악행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빨아들인 물자는 자본주의라는 잘 준비된 용광로에 녹아들었으며 그 에너지는 서구사회의 시설적 인프라가 되어갔을 것이다. 유럽을 여행하노라면 입을 떡 벌리게 하는 아시아인들의 기를 죽게 하는 잘 지어지고 잘 보존된 건축물들, 거리들의 감동은 이러한 시대적 사건들의 상세와 무관하지 않다.

 

한 때 동양은 어쩌면 서구인들에게 ‘꿈’이었을 것이다. 16세기 이후로 본격적으로 동양의 매력적인 물품들이 유럽으로 흘러갔다. 그 물류현상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향료무역’이다. 그들은 후추, 육두구, 정향 등의 향료를 실어가기 위하여 목숨을 걸었고, 중국의 은, 인도의 면직 등도 그들의 ‘빨아들임’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다만 물질적인 측면에서만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서구의 동양에 대한 열망은 정신사적으로도 그러한 경향이 있었다. 중세와 결별하고 계몽주의와 과학주의로 새 시대를 열면서도 서구는 한편으로 모순되고 결핍되는 사회적 실존으로서의 개인들의 고뇌가 있었다. 그들 가운데서는 이러한 벽을 극복하기 위하여 몽상적인 낭만을 일삼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몽상적인 낭만은 다름아닌 바다 수평선 너머 펼쳐질 아름다운 세상 즉, 동양에 대한 동경이었다. 문학용어로 말하자면 엑조티시즘(exoticizm), 이국주의異國主義인 셈이다.

 

소설 ‘청춘’의 주인공은 이와 같은 엑조티시즘으로 충만한 젊은이이다. 그가 동경하는 이국은 다름 아닌 동양이다. 그에게 동양은 언제나 꿈이고 환상으로 남아 있다. 그런 그가 동양으로 항해하는 상선의 이등항해사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 꿈같은 일이다. 그가 승선근무를 시작한 무역선의 선수의 선명이 새겨진 자리 밑에는 이런 표어가 기록되어 있다. ‘일하라, 아니면 죽어라.’라는 말. 지금의 노동문화의 측면에서 보면 악질적인 선주의 인성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지만, 당시의 해상노동의 가혹함을 이처럼 대변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그처럼 고달픈 해상노동의 나날을 보내면서도 주인공은 청춘의 꿈을 잃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국 동양이 있기 때문이다. 화물폭발과 황천항해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항해를 계속하는 이유가 그리운 동양과의 만남 때문이기에 이 작품은 시종일관 순수와 그로테스크함의 양 편으로 흔들림을 계속한다. 작품 속의 ‘아, 어리석고, 아름다운 청춘이여!’라는 주인공의 독백처럼.

 

글, 심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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