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선의 '한국해양사 서문'

등록일20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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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에 代하야

1953년 해군본부 발행 '한국해양사' 서문

 

바다를 잊어버린 국민

 

한 민족 또는 국민의 생활은 한 개인의 생활에 견주어 말할 수 있다. 행복은 생활에서 나고 활동은 건강에서 오고 건강은 그 체질에 대한 정당한 인식 자각과 및 거기 응하는 필요한 용의 노력으로써 얻는 것이다. 개인생활에 있는 이러한 법칙의 범위를 넓히면 민족 또는 국민 생활의 법칙이 되는 것이다.

개인이고 민족 또는 국민이고 이른바 생활이란 것은 환경에 대응하는 태도이다. 그리하는 수단이오 방편인 것이다. 그 겨레가 그 환경을 적절하게 이용하면 그 국가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불행과 곤란에 울지 않지 못하는 것이다. 환경에는 역사를 말이 이미 생긴 사회환경과 지리로 말미암아 생긴 자연환경의 두 가지가 있지마는 역사라는 것도 실상은 자연적 요소를 의거로 하여 생성발전하는 것이며 그 지리적 조건이야말로 인류 또는 국민의 생활을 제약하는 최대원동력이라할 밖에 없다. 독일 철학자 Herder와 같은 이도 ‘역사는 연속한 지리요 지리는 정지한 역사니라’고 하는 격언을 만들기도 말하였다.

 

적절하게 환경에 대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개인생활로 말하면 그이의 천성 체질을 발휘함이오 민족 또는 국민생활로 말하며 그 국토의 본연한 성질을 잘 발휘함이 그것이다. 이를테면 대제국은 대륙국으로 해양국은 해양국으로 산악국은 산악국으로 반도국은 반도국으로 다 각각 저의 특질 장처를 발휘하여 그 당연한 복리를 향수하는 것이오. 그렇지 않고 천부한 자격을 모르거나 혹 어그러트리면 그 약속된 복리를 받지 못하기는 새로 도리어 의외의 화해(禍害)를 입지 말란 법도 없다. 세계의 총명한 민족 또는 국민 모두가 자기 국토의 본질을 바로 알고 그것을 잘 활용한 자들이다.

 

그런데 우리의 민족 또는 국민생활과 그 역사는 자연적 조건-지리적 환경에 대응함에 있어서 어떠한 인식과 얼만한 총명을 나타내었는가를 한번 살펴보자. 우리 국토는 지형상 삼면에 바다를 두르고 일면만이 대륙에 연한 반도이다. 곧 조선은 반도국이오 또 홀죽한 몸이 수천리 길이를 가진 가장 전형적인 반도국이다. 동 남 서 삼면만에 8천6백9십3평(약 우리 2만2천리)의 해안선을 가지고 도서까지를 합하면 17, 269평(약 우리 43000리)의 해안선이 있어서 면적에 비례하여 해안선 길기로 세계에 첫째 가는 연해국이다. 세계에서 해안 길기로 유명한 희랍과 .....도 면적 5평방리에 대하여 해안선이 1리에 불과하고 세계 제일의 해운국이라 이르는 英吉利도 겨우 7평방리에 대하여 1리이니 이에 비하여 조선은 매 3평방리에 대하여 1리의 해안선이 있는 셈이다. 대륙에 연접하였다는 북의 일면에도 압록 두만 양강이 거의 뺑 돌려싸어서 조금했드면 강과 바다를 연결해서의 한 섬이 될 번도 하니 저 16세기 전후 구라파에서 출판한 동방지도에는 압록 두만 양강을 마주 부쳐서 조선을 둥그런 큰 섬으로 표시한 실례가 더러 있기도 하다 (일례 1596년 ‘얀 호이렌 린스호텐’의 동인도수로기부도) 우리나라는 島國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반도국임이 사실인 것이다.

 

조선이 반도국으로서 바다에 껴안겨 있는 사실은 진작부터 여기사는 인민들의 인식하는 대상이 되었었다. 조선 고대의 신화에서 그것을 명확하게 간취할 수 있다. 곧 국조 단군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인간의 처음 나라를 평지에 세우셨는데 장가는 ...... 하백의 따님에 드렀다고하니 .....은 대동강이 바다로 드러가는 목장이에 있는 곳이며 또 아드님을 강화섬에 보내서 3랑성과 제천단을 모았다하니 강화도는 고대에 있어서 서해의 모든 것을 주름잡는 위치에 당하는 곳이다. 신라의 왕통은 박 석 김 삼성이 돌려가면서 계승하였는데 박씨 김씨는 하늘에서 나려온 씨요, 석씨는 동북해외에서 떠드러온 종족이었다한다. 낙동강구의 가..왕국은 하늘에서 나려온 수로왕과 해외에서 떠드러온 허황후와의 통합으로써 창업한 바라고 전한다. ( 글자희미 ) 우리 고대 여러 나라들은 내륙계통의 왕권이 해상계통의 ( 글자희미 ) 출현한 바 통합조직이었음을 표현하려 한 모티프로서 과연 물과 바다로써 국토를 삼는 반도국가의 건국담다운 신화라할 것이다. 곧 신화를 만들어 낸 시대의식에는 바다가 퍽 큰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이는 물론 당연히 그랬어야 할 것이오 아니 그러면 도리어 괴변이 될 것이다.

 

고요할 때는 시퍼런 주름살이 끊임없이 연속하여서 갈매기 바보새의 만만한 업자적 노릇을 하다가 성이 나면 산처럼 곤두서고 우레처럼 소리지르면서 하늘을 집어삼키고 땅을 뭉그지르려하는 하다 밀물은 산하대지를 휩쓸 듯이 더러덤비다가 썰물은 꽁지가 빠져서 쫓겨다라나기를 법칙처럼 엄하고 금석처럼 이쁘게 꼬박꼬박 되풀이하는 바다 세계만물을 거느려가서는 태양이 아침이면 시뻙언 일만귀신에게 떠받들려서 ( 글자희미 ) 소사올랐다가 저녁이면 황금만경이 잔잔한 행보석을 깐 위로 천천히 안식소를 찾어드러가는 바다. 고래가 눈 기둥을 뿜고 ..어가 안개 장막을 치는 바다. 본 적이 없는 사람과 이름 모를 물건이 해류를 타고 떠드러오는 바다. 이 천지간의 엄청난 존재와 불가사의할 경계가 우리 조상네의 주의 끌지 아니하였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놀라움과 궁금함과 용기를 ..발함으로써 그 속의 비밀과 저 밖의 세계를 알아보리라 하는 생각을 우리 조상네들이 아니하였을 수 있을까. 우리 삼면의 바다에는 당시 청년의 기운찬 팔뚝이 롱궁이 배를 썰물에 밀고나가서 무서운 소용돌이와 사나운 물결로 더부러 씩씩하게 싸우는 광경이 시방 우리 눈에도 보였울 듯 하다. 그네는 연습과 경험으로써 드디어 수륙양..동물로서 바다를 생활무대로 하여 활동하였을 것이 필연하고 명백한 사실일 것이다. 압기울소 이 시대의 일은 글에 기록되지 않고 이약이에 전함이 없어서 후세의 우리가 그 실제를 알지 못함이다. 우리에게 ‘호머’나 ‘바이론’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용장활발한 해상 활동의 사실이 후세자손의 피를 용충 쥐였을는..것이다.

 

역사시대에 들어와서의 조선 겨레는 바다를 잊어버린 사람의 모양으로 기록이 우에 나타났다. 줄잡아도 국민의 대부분은 바다의 인식감각 흥미 야심을 가지지 아니한 양하였다. 이미 뛰노는 무놀과 함께 신경이 춤출줄을 모르고 짠 바람에 살을 걸림이 남자의 유쾌한 일임을 잊어버렸다. 바하고의 인연을 생각한다고 하면 다만 메력 다시마가 오고 도미 민어를 공급하는 먼 어느 시골 쯤으로 아는 것이었다. 이것은 섭섭한 일이오 슬픈 일이오 또 기막힌 일이었다. 우리 국민생활이 과정에 있어서 가장 비통한 사실이 무엇이였느냐할 것 같으면 그것은 분명히 반도국민 임해국민으로서 바다를 잊어버린 일 그것이었다. 민족생활은 여기서 순 돈좌頓挫(조아릴돈,꺾을좌)하고 역사는 이로부터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안 가지의 바다에서 떠났다는 사실이 어떻게 많은 불행을 우리에게 가져왔는지를 모른다. 바다를 알고 지낼 시기의 영광이 어떠하였음은 우리가 알지 못하지마는 바다를 잊어버린 뒤의 우리의 환난이 어떻게 큰 것은 우리가 분명히 체험하고 또 시방도 그 시련의 중에 있다 할 것이다.

 

세계 각국의 바다 쟁탈전

 

여기서 우리가 눈을 세계역사에 돌려서 만국 흥망의 자취를 둘러보기로 하자. 역사의 책장을 떠들 때에 인류세계의 역사는 바다의 함께 열리고 또 바다와 함께 전개진행한 사실을 볼 것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세계의 문화는 애급에서 발생하고 인도에서 발생하고 지나에서 발생하였다고 하지마는 그것들은 요하건대 각국국민의 고립한 국민생활들이 결코 세계통동의 전체적역사는 아니다. 세계적의 역사는 페니키아인이 독특한 배를 만들어가지고 지중해로 떠나와서 통상으로 식민으로 연안각지에 활동하던 때로부터 시작하였다. 그리시아, 페르시아, 로오마, 카르타고 등 여러 민족이 지중해를 무대로 하여 활동하고 세력을 다투고 패업을 이룩하는 것이 곧 세계 역사의 진행 그것이었다. 이 가운데서 앞서서 그리시아가 동부구라파와 서부아세아를 연락한 이른바 헬레네스 세계를 실현하고 뒤져서 로오마가 통일과 조직의 힘으로써 인류 최초의 대제국을 건설하여 인류역사에 불멸할 영광을 나타내었는데 이것이 죄다 지중해를 이용 활용 선용함에서 나온 결과임은 누구나 아는 바와 같다. 특히 서양고대역사상에 있는 큰 사건이라 하는 것은 살리미스 펠로포네수스 포에니의 모든 싸움과 같이 죄다 바다에서의 일이다. 특히 로오마와 카르타고와의 싸움은 전수히 해군의 경쟁이었음은 고쳐 말할 것도 없다. 출발점에서 그러한 것처럼 서양역사의 대세는 항상 바다를 끼고서 변전하는 점에서 동양역사로 더불어 이대특색을 짓고 있다.

 

동양에도 물론 바다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나대륙의 중원이 역사진행의 중심무대가 되어서 마치 서양역사상의 지중해처럼 서방의 여러 민족이 중원의 경쟁을 취하여 달려들고 나가자빠지고 이러나고 걱구러졌든 까닭에 동양의 바다는 항상 역사의 초점에서 원리되어 있었다. 역사의 범위가 동양 하나에 그칠 때에는 이러해도 관계치 않았지마는 시운이 진전하여서 동서兩洋을 통동해서 세계사란 것이 행진하는 시세에 이르러서는 바다 본위의 서양사에 내륙중심의 동양사의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 아니 세력의 근본적 우열이 생긴 것은 16세기 이후의 이른바 근세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와 같다.

 

국토 인민 사회 문화 무엇으로나 오래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할 동양이 근세기에 들어올수록 갑자기 전락 쇠..하여 오다가 마침내 동양의 대부분이 서양의 반식민으로 화하기에 이르렀음은 무슨 까닭인가. 거기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말할 수도 있겠지마는 국민생활 그 역사의 진행이 바다와 함께 있고 함께 있지 아니한 점이 무엇보담 큰 원인임을 우리는 지적하고 싶다. 고대의 페니키아인이 지중해에서 중세의 노르만이 북해서 근세의 포르투갈인 서반아인 영국인이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 내지 남북극양에서 모험 탈투한 저네 서양인이 마침내 바다를 통해서 세계를 저의 것으로 한 것일 따름이다. 동양의 역사에서도 元시대 이후에 차차 바다로 나가는 민족활동.. 생겨서 명 청 양대로 나려올수록 점점 왕성하여진 까닭에 오늘날 ..양 전지역에 있는 중심 세력인 이른바 화교의 지위를 작만한 사실은 우리에게 국민발전과 바다와의 관계를 개닫게 하는 큰 증명이 되는 것이다. 이 관계를 함껏 집어늘인 형태가 곧 근세에 있는 서양제국의 세계에 활보하는 것이다. 서양에 대한 동양의 전락은 대체로 1492년 콜롬보의 아메리카 발견 1497년 바코다가마의 희망봉회항 1520년 마젤란의 태평양진출 이후의 일로서 항해술 발달의 도와 함께 동서양 성쇠의 차가 점점 심해진 것이다. 돌이켜 지남침도 동양에서 창조된 것이오, 화포도 동양에서 증명된 것이어늘 이것을 해상활동에 이용해서 능히 세계의 일곱 바다를 제압하고 마침내 인류의 특권계급연한 지위를 서양인이 취득하였음을 생각할 때에 우리 동양 사람은 감개하기보담도 부끄러움을 통감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다.

 

국세의 강약이 해상세력의 대소로서 제정됨은 벌써부터 일로서 얼마 전까지는 영국이 해상과 함께 세계의 패권을 붓잡았더니 제2차대전 이후의 형세변화로 말미암아서 미국이 그 지위를 대신하고 결국은 한편의 미국 한편의 소련이 현대세계의 양대위세력으로서 인류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투쟁도중에 있음은 우리가 쓰라린 시련으로써 눈앞에 보고 있는 사실이다. 일즉 영국은 그 기발 아래 해가지지 않음을 자랑하였으며 오늘날 미국은 태평양 대서양을 좌우에 끼고 있음을 든든하게 알고 있다. 대서양은 시방 세계 해상교통로의 가장 중요한 선에 당하는 곳으로서 세계해상교통이 77퍼센트가 여기서 행한다 하며 일년에 1천만톤 이상의 화물이 집산하는 대항구 31 중의 24가 이 대양을 향하고 있어서 20세기의 지중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교통은 주로 서구와 북미 사이의 관계에 속하는 것이다. 대평양은 주위의 지방이 아직 경제적으로 충분히 발달되지 아니한 관계로부터 교통량이 대성양에 비해 멀리 떨어지지마는 거기가 정치적 군사적으로 국제적 중요성이 절대한 것은 지난번의 태평.... 이전의 ....전쟁을 말미암아서 두루 인식된 바이며 또 동양 또 남양 제국의 발달은 따라서 그 경제적 성능이 우정우정 증상될 것이 당연한 일로서 벌써부터 20세기는 태평양시대라는 말이 행하고 있는 터이다. 이제 미국은 이 세계의 두 큰 바다를 좌우에 끼고서 그 역량과 경륜을 마음껏 발휘할 처지에 있는 것이다. 미국이 현대세계의 대표세력됨은 결코 그 풍부한 물자와 위대한 공업에만 말미암은 것 아니라 실로 고금을 통하여 국가세력의 원천이 되는 바다 그 가장 큰 바다의 임자이기 때문이다.

 

바다가 국가방위선 민족활동무대 또는 국제무역과 국제 교통로로서 가장 중요함은 이를 것 없거니와 어로 양식과 해초채취 등의 광대풍부한 생활자원으로서 일국 경제의 上에 가지는 가치도 실로 절대한 것이 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바다를 가진 나라가 가지지 못한 나라보담 더 흥왕하고 또 바다를 가졌던 나라가 바다를 잃어버린 뒤에 급자기 쇠..하여진 실례가 많거니와 근세에 이르러서는 각국이 자각적으로 바다를 얻으려하며 작은 바다를 넓히려하며 심지어 어느 해변 또는 해상을 혼자 차지하려고 많이 노력함은 진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다. 구라파의 여러 나라-로서아 파란 독일연방들이 발트해의 패권을 다루기에 어떻게 오래 또 많이 ....하여 쉬지 아니하는 사실은 실로 이 바다를 가지고 가지지 못함이 그 정치 경제 교통 국민 생활에 중대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 로서아가 세계에 짝이 드문 큰 영토를 가지고도 바다다운 바다를 가지지 못한 것을 섧게 생가하여 그 건국당초 곧 .....의 때로부터 서방으로 손을 뻗어 바다를 움키려고 애쓴 것은 깊은 흥미와 함께 큰 교훈을 삼을 일이다.

 

로서아는 북방에서 뜨비나강을 통하여 북극양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바다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쓸만한 바다를 찾는 운명이 진작부터 시작되었다. 맨먼저 저항이 적은 이용하여 .....를 손에 넣고 벌링 해협에까지 도달하여서 북극양을 혼자 차지함을 얻었지마는 거기서 얻은 바다도 결코 가치의 큰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얼지 않는 공해를 얻어야 한다 함이 드디어 로서아의 전통적 국책을 이뤄서 ....를 먼저 발트해로써 ‘서방으로의 창’을 ...하여 1703년에 .....한 네바강의 ...에 국도....를 건설하고 1721년에는 가데리아 잉레르만란드 에스토란드 리브란드 등을 점령하고 그 뒤 로마노프조의 에라자베드 시대에 다시 ....으로 진출하고 1795년 카자린 2세의 죽기 전에 구르란드를 점령하고 1809년에 ......인 핀란드를 탈취하여서 이에 서방으로 완전한 창을 내기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다시 북해와 대서양으로 진출하는 문을 열려 하여 스칸디나비아 서해안의 나르빅 항을 욕심내다가 제위와의 사이에 정치적 분쟁이 일어났었다.

 

또 남방에서는 ....대제의 때에 이미 또ㄴ강구를 점령하고 이에 크리미아 반도와 오데싸로 이르는 해안을 점령하고 다시 발칸 반도의 주민을 ..동하여 ....로 더불어 5차나 교전하였지마는 영국이 ....를 원조하여 이를 방해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보스프로스 해협을 지나서 남하하지를 못하였다. 또 19세기의 중엽으로부터는 동으로 태평양쪽에 손을 내밀었다. 서비리아의 ....로 일로동진하든 로서아가 1851년에 흑룡강구에 니골라이에프스크를 건설하고 1858년에 ....조약으로써 청국으로부터 흑룡강 이북의 땅을 얻고 1860년 우리 철종 11년에 청국이 영 불 2국과 개전하였다고 패하매 로서아가 중간에 들어 강화를 시키고 그보수로 청국으로부터 .....흑강이동의 땅을 얻어서 울라디오스톡-동방의 관문을 건설하여 이 결과로 조선이 두만강을 격하여 로국으로 더불어 국토를 서로 대게 되었다. 그러나 울라디오스톡 곧 ......도 갈강하는 부동항은 아니므로써 로서아는 다시 ........의 눈을 조선반도와 남만주의 방면에 번드거렸다. 1861년에 일본국내의 수선스러운 틈을 타서 대마도에 뛰어들었다가 영국의 항의로써 퇴각하고 그 뒤에도 영국과의 마찰을 무릅쓰면서 조선의 제주도 일본의 북해도 등에 어금니를 내밀며 또 우리 다도해상의 보길도를 점령하려 하다가 중동전쟁에서 일본이 승..함을 인하여 이를 단념하고 다시 ........의 광무년간에 목포해상의 고하도 진해만의 밤구미 등을 집적거리다가 일본에게 방해되어서 번번히 실패하고 1898년에 청국으로부터 요동반도를 조차하여 여순구에 군항 대련에 상항을 경영하여 비로소 부동항을 가짐에 성공하였다. 이것이 ..일전쟁의 결과로 또한 ..멸되었다가 태평양전쟁의 뒤에 공산소련이 제정시대의 국책을 ....하여서 다시 만주에서도 대련 조선에서는 청진을 저의 손아래에 넣어버렸음은 우리가 눈으로 본 바이다. 이밖에도 로서아가 19세기말 이후에 트란스 카스피 지방으로수터 ........로 진출하기를 꾀하다가 영국에 저지된 일이 있으며 소비에트 연방이 된 뒤에 북극양 방면의 교통을 편리하게 할 목적으로 발트해와 백해를 결합하는 이른바 스타린운하의 개..에 착수하여 1933년에 전장 227.. 연장으로 세계제일이라는 대공사를 완성하였음 ....또한 로서아의 해양에 대한 전통적 국책의 일현견으로 볼 수 있는 일이다. 로서아가 이렇게 두고두고 바다에 세력을 얻으려고 함에서 그 큰 나라 노릇하는 기..을 보는 동시에 오늘날 세계 양대립세력이라고 하면서 바다를 마음대로 하는 미국이 어떻게 긔승스러움에 비하여 바다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소련의 병신스러음을 도리어 불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바다와 국력과의 관계가 이렇게도 중대하므로써 근세의 강대한 모든 나라들은 일제히 바다로 진출하려 하며 다가의 연안으로 발전하려 하며 바다 넘어의 대안으로 비약하려 하며 그리해서 이른바 ‘바다를 포..하려 하는 노력’에 앗기는 것이 없는 것이었다. 바다를 둘러싼 세계의 쟁탈전은 이렇게도 심하여 왔다.

 

바다와 조선근고사

 

여기서 이야기를 조선으로 돌리자. 조선은 기다란 반도국으로서 남이 애를 태우고 어드려하는 바다를 옛적부터 무척 많이 가졌었다. 그런데 이러한 큰 재산 큰 보배의 임자임을 조선 겨레가 잘 인식하지 못하고 따라서 잘 이용하지 못하고 그래서 이 갸륵한 바다가 조선인에게 있어서는 도야지에 진주란 격이 되고 말았다. 정치가는 바다를 국계計민생의 추진에 활용하지 못하였으며 사업가는 바다를 식산흥업의 발전에 이용하지 못하였으며 청년은 ....노도 혈기를 ....시키지 아니하고 雲外天邊에 모험심을 發作하지 아니하였다. 물론 조선민족의 성립에는 해양적 요소도 많이 섞여 있으며 조선민족 생활의 과정에는 ....오월과 왜유구 남양을 범위로 한 해상활동의 빛난 ....도 없는 것 아니지마는 그런 것 저런 것이 다 희미한 묵은 꿈 속에 숨어 버리고 어찌어찌하는 동안에 바다는 다만 태풍과 괴어가 사람과 배를 한꺼번에 집어삼키는 무서운 존재로만 생각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끝이 신라시대에는 당나라 해적이 다도해 일대를 ....하고 고려..년에는 왜구가 반도전해안을 ....하고 이조5백년간에는 당당한 영토인 울릉도 죽도 거문도 보길도를 외국이 자의약취하되 이를 어찌하지 못하여 서남동삼해상에 각국측량선이 부드나듯하되 이것이 무엇인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하늘이 무슨 필요로 조선에 바다를 주셨는지 조선사람이 무슨 염치에 바다를 가졌는지를 알 수 없었다. 신지발견 자원취득 상권확장을 위하여 눈이 빨개서 다니는 호랑이떼를 다만 ....선 이양선異樣船이라는 이름으로써 먼 산 구경하듯하며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우리가 강하여서 이긴 줄로 알고 사해태평의 꿈을 꾸는 것이 20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있는 동방 반도국민의 실태이었다.

바다를 잊어버린 조선이 어떻게 변모하였든가? (첫째는) 조선민족에게 웅대한 기상이 없어졌다. 바다는 천지간에 있어 무어라기보담 가장 위대한 존재물이다. 그래서 그것을 ....하는 자에게도 위대의 감화를 주어서 그 심.. ....하게 하며 그 氣字를 웅..하게 한다. 산악을 울리는 듯한 노도 사람의 의지력을 ..양하여 수천水天이 서로 씨름하는 아득한 지음은 사람의 ....심 발전력을 ....하여서 사람으로 하여금 갑갑답답한 육지의 둑겁이집을 벗어나서 시원 훤칠한 새 천지의 개척을 생각케 한다. 저 제노아의 뱃사람 콜롬보가 먼바다 밖으로서 못 보던 물건이 떠들어오는 것을 보고 저 밖에도 세계가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용감스럽게 대서양 상으로 배를 타고 나가서 드디어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것 이하로 지리발견시대의 허다한 발견자는 죄다 바다에 이끌려서 천고....의 대사업을 성취한 자들이다. 우리 신라 진평왕 때에 (587) 대세라는 귀공자가 신라라는 갑갑한 산곡간에서 살다가 말겠느냐 하고 구칠로 더불어 배를 남해에 띄우고 오월 저쪽의 큰 세계를 찾아나가서 어찌 된지를 모른다는 이야기가 사기에 전하거니와 시원한 세계를 찾는 이의 향하는 곳은 바다일밖에 없다. 바꿔 말하면 바다를 찾는 이는 시원한 세계를 얻는 것이다. 19세기 하엽의 위대한 지리학자 랏셀(F. Ratsel)이 바다는 ‘소천지로서 대천지로로’ 나아가는 정신을 주느니라고 한 말은 진실로 바다의 인류와 민 정신에 미치는 감화력을 단적하게 표현한 말이다.

 

그런데 조선은 모처럼 국민정신을 활발화하기에 가장 좋은 원동력이 될 바다를 가졌건마는 이 훌륭한 보배의 가치를 이용하지 못하였다. 조선국민은 밖으로 내어뻗을 기운을 부당하게 고폐압축한 탓으로 그것이 국내에서 자가중독작용으로 전화하였다. 곳 좁은 바닥 안에서 일자리를 다투노라고 마찰과 갈등을 거듭하였다. 억개를 서로 부비고 발등을 서로 밟은까지는 관계찮지마는 이해와 감정이 점점 얽흐러져서 주먹을 서로 들고 발길로 서로 걷어차기에 이르지 아니하면 그치지 아니하였다. 조선역사상의 암이라 할 당쟁이란 것은 무엇을 말미암아 생긴 것이냐 할진대 그 가장 근본적 원인은 국민의 기풍이 ..달하지 못하였음에 있다 할 것이오. 그리고 국민의 정신이 액색....하여진 근본적 이유는 곧 국민의기발장發場의 최대무대일 바다를 이처럼 버렸음에 있다고 나는 단언하고 싶다. 진실로 조선국민으로 하여금 바다를 인식하고 바다를 친근하여서 그 기상을 웅대하게 하고 그 심정을 ..달하게 하고 그 이상을 ........하였던들 조선의 사회와 그 역사는 분명히 시방 그것과 같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이익과 사업과 명예와 행복이 얼마든지 바다밖에 있음을 알고 또 그것을 붙잡으려 하는 이에게 조그만 벼슬 한 자리와 냄새 나는 녹미 몇쯤을 다투기 위하여 음모와 간계와 잔인무도한 방법으로써 하는 당파 싸움을 할 생각이 날 리 없는 것이다. 40리 한양성의 성 구멍 안에서 두꺼비 씨름을 하는 것과 하늘만큼 큰 바다의 세계에서 인생의 모든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과를 골라잡을 마당에서 집안끼리 갈가뜯고 잡아먹다가 마는 비린내나는 정쟁을 취할 리가 어디 있을까 시방부터 백여 년 전의 재미있는 一詩人인 이....이라는 조선인이 손바닥만한 작은 나라 안에서 동인이니 서인이니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당쟁에 빠져서 다른 정신을 차라리 못하는 골을 보면은 조그만치도 조선사람 노릇할 마음이 없지마는 그러다가도 금강산이 청명한 볏발을 받고 바다 위에 솟아 있는 한가지일 때문에 조선서 사노라는 뜻을 퍽 인상적으로 표현한 시를 지은 것이 있다. 바다는 어떻게 답답한 가슴도 시원하게 하며 또 당파싸움은 ...... 당파싸움 그것에 멀미내는 이의 실망낙심까지도 능히 구제하는 것이다.

 

(둘째는) 조선나라와 및 그 인민을 가난하게 하였다. 바다가 한 나라를 부유한 데로 인도하는 큰 길임은 동서고금의 역사가 ..연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큰 사실이다. 카르다고와 라마와 아..비아의 옛일은 그만두고라도 근세의 포도아,서반아,화란으로부터 영국, 불국, 독일국의 부강이 다 어디로서 온 것이냐 하건대 물론 바다에서이다. 특히 근대의 국가들이 다투어 배를 짓고 항로를 개척하고 해외통상의 범위를 넓히고 또 그것을 유지발전할 만한 해군을 건설하기에 바쁨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해상세력의 대소는 곧 국가부강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조선은 삼면환해의 반도국이었건마는 그 바다는 오랜 동안 잠을쇠를 채어 있었다. 그 바다에는 ......가 없었으며 피가 돌지 아니하였으며 수족이 움직이는 일이 없었다. 국내의 인민이 썰물을 타고 나가지도 아니하였으며 해외의 화물이 밀물을 타고 들어오지도 아니하였다. 찬물 뜨순물이 섞여 흘러서 각종수산물의 무진장이라는 말을 듣는 천여의 대자원이 부질없이 버려져 있어서 조선의 바다는 존재가치를 가지지 아니한 무용장물이었다. 임자가 돌보지 않는 동안에 남의 상선 어선이 대신 와서 이 이익을 거둬 가되 앗기운줄 분한 줄조차 알지 못하는 정도이었다. 이 바다 안의 뭍에서는 댓가비 갓과 집푸럭이 신과 풀먹인 베옷을 걸친 허다한 인민이 움같은 집속에서 된장 국물로 변변히 얻어먹지 못함을 한탄하고 앉았었다. 5천년 문명국이라 하되 그것을 표상하는 크나큰 건축 하나가 있을까. 3천리 금수강산이라 하지만 사람 다닐 만한 길 하나를 만들어 놓았을까. 속곱질 같은 정치와 아이장난 같은 산업으로써 죽지 않은 목숨을 억지로 끌고 나가는 것이 대체로 우리 그 전 생활이오. 시방까지도 그것을 많이 벗어나지 못한 형편이다. 식구는 많고 살림은 구간하매 집안 안에 말썽만 많고 백사가 두서를 차릴 수 없음은 실로 어찌헐 수 없는 일이다. 줄잡아서 1천년 이래의 조선의 사회, 문화, 민족생활에 신신한 빛이 없음은 그 원인의 거의 전부가 생계의 빈곤함에 있었다. 째질듯하게 가차하다 함이 조선 중세 이후의 상태에 맞는 말임은 우리 국가 각 방면의 경제적 수자를 보면 얼른 살필 수 있는 일이다. 헐벗고 죽물 흘려먹는 정도의 생활에서 무슨 여유 있는 정치규범과 문화 사실을 찾을 수 있는 있을 것인가. 근대조선이 무엇무엇은 왜 다 이 꼴인가 하고 그 원인을 ..구하여 보면 그 끝에는 대개는 빈곤이라는 한 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면 이 흉악한 빈곤은 어디로서 온 것인가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선조조에 임진홰란의 7년 풍상을 치르고 다시 수3십년의 동안에 인조조의 정유 병자 2번 호란을 당하고서 조선의 사회경제는 마침내 파멸의 일보 앞에 놓여졌다. 이 지경이 되매 아무리 조선의 정치가라도 발들의 급한 불을 꺼야 하겠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었다. 인조시종이후 몇 대 동안에 있는 사회경제상 약간의 개혁은 이러한 정세하에 행해진 것이다. 그러나 병이 염통에 있거늘 손끗 발끗해 약간 외과수술을 베푸는 것으로 효험을 볼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에 식자의 사이에 조선빈곤에 대한 원인 검토가 행하였다. 그리하여 얻은 바 결론은 누구나 똑같이 첫째는 국내교통의 불비 곧 수레 다닐 만한 길이 없어서 화물의 유통이 편리하지 못함이오, 둘째는 해외통항의 ..새 곧 외국 무역으로써 국내경제를 북돋을 줄 모르는 까닭에 나라가 구차하다함이었다. 오랜 동안의 쓰라린 경험으로써 겨우 이 점에 생각이 간 것이었다. 영조, 정조 사이에 이르러 문화정신이 크게 바뀌고 나라의 말못된 형편을 생활양식의 교정으로써 구제하겠다 하는 사상가의 한 그룹이 있으니 박지원 이덕행, 박제가 등이 그 가운데 정정한 자들이오. 그네들은 위선 조선보담은 많이 진보한 생활양식을 가지 지나에서부터 배워오자 함을 주창하였음으로써 역사가가 이네들을 북학론자라고 이른다.

 

박지원은(1737-1805) 호를 연암이라 하여 한문학자로도 탁월한 지위를 가지는 어른이거니와 한편으로 북학론자의 중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사상가이었다. 그의 명저에 ‘기허생전’라는 것이 있으니 그 개요를 말씀하건대-

효종 시절에 서울 남하산 묵적동에 허생원이라는 가난방이 隱士(예전에별슬을하지않고숨어살던선비)가 있었는데(...중략...).....

하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여러 방면으로 당시의 시대사조를 살펴보게 하는 귀중한 재료거니와 그 중의 ‘차불행역중 주불통해외 국안득불빈 민안득불곤’이라 한 구절은 그때의 진보적 사상가들이 바다에 눈을 떴음을 보이는 것이오. 또 일본 大阪에서의 미곡무역과 동지나해상에서의 무인도 개척이 다 막대한 성공을 가져왔다 하는 점은 곧 해상활동의 이익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려 한 의..이었다. 대처 임진왜란에 다수한 인민이 일본으로 사로잡혀 가서 그것이 포도아의 노예상인의 손으로 넘어가서 남양 각지에 우리 인민이 산재하게 되고 그 중의 얼마는 도로 본국으로 돌아와서 해외의 사정을 전한 가운데는 외국여행자의 상투套로서 남방지방을 이상적 산경으로 과장한 이야기가 꽤 많았으니 이런 것이 은연한 가운데 민간에 돌아다니고 여기 힌트를 얻어서 북학론자의 이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박연암의 붓 끝에 ....허생원의 이야기일 것이다. 남방의 해외에는 살기 좋은 세계가 있다 하는 민간 전승을 한번 더 신앙적으로 지양하여서 조선민족의 이상국토를 만들어 낸 것이 근대민간신앙의 주축이 된 이른바 ‘남조선’이라는 것으로서 ‘海島中眞人出’할 때에 우리가 다 영광과 복리를 누리게 된다 하는 관념은 조선민족의 海事思想發展史上으로 극히 주의할 점이 들어 있는 것이다.

 

 

조선의 수군약사

 

세계의 어느 국민의 사이에고 현실세계의 불만을 관념적으로 만족해 보려하여 공막....한 지음에 이상국토를 만들어놓고 그를 동경하며 그를 ,..구하는 일이 흔히 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국의 위치는 흔히 먼 해상에 둔다. 고대의 지나인인 삼신산 또 봉래도를 동방의 해상에 있다고 생각하고 희랍의 철학자 플라토가 아틀란티스라는 산경을 대서양상에 그렸음등에 그 적례이다. 조선민족이 그의 이상세계를 남방해상에 만들어 가졌음이 또한 인류사상경향의 한 유형으로 보임직도 하다. 그러나 조선민족의 ‘남조선’이란 것은 단순히 관념적의 산물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왜 그러냐하면 조선민족은 일찍이 남방해상을 말미암아서 많은 문화 빚과 행복의 씨를 얻어 들어온 확실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자이니까. 남방의 바다에 복락이 있음이 사실이지 결코 관념만이 아니었다. 위선 신라의 하대에 장보고하는 해상위인이 있어서 시방 전라도의 완도를 중심으로 하여서 지나의 산동반도 항주만과 일본의 북구주해안과 내지 남양의 여러 항구를 교통감으로 잡아 매어놓고 동방해상에 큰 이상을 가지고 해상왕으로서 문화 무역을 통한 대활동을 한 것은 우리 조상네들도 얼마쯤 전문하였을 일이다. 또 고려일대 475년간에 때를 따라 성쇠는 있었을 법하다. 반도의 서해 남해에 기이한 물건과 신통한 소식을 싣고 다니는 배가 언제고 끊여 본 일은 결코 없었다. 이러구러 남방의 바다는 조선민족의 구원한 희망이었으니까 ‘남조선’이 관념적의 산물이 아닌 것은 아니어도 그 내부와 배후에는 명확한 사실이 들어있던 것이었다. 진실로 조선민족으로 하여금 남방 바다에 관한 기억을 좀 더 해명하게 가지고 남방 바다에 대한 인식을 좀 더 확실하게 붙잡았더라면 조선의 국민경제가 이러토록 궁핍..곤에 빠지지는 아니 하였을 것이다. 일찍이 신라는 황금국으로 아라비아의 상인에게 부러움을 받고 ‘코레스’(고려-필시 조선중세의 제주인)는 해상의 용자로 포도아의 항해자에게 두려워하는 바가 되었다. 이것을 한 시대나 한 지방의 일에 그치게 하지 말고 조선민족으로 하여금 항상 이와같은 해상발전의 주인 노릇을 하게 하였더라 하면 줄잡아도 구라파에 있는 화란 백의의의 富榮쯤은 손에 침받고 움켜쥐였을 것이 아닌가. 하늘이 맡기신 보고를 내어버린 국민에게 구자의 설움이 있음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셋째는) 문약에 빠진 버린 것이다. 바다는 물과 하늘이 큼을 다투는 세계요 물결과 물결이 힘을 다투는 세계요 물과 사람이 굳셈을 다투는 세계로서 천지간에 있는 가장 장쾌활발한 투쟁이 거의 쉴새없이 연출되는 무대이다. 바다이 세계에서 소용되는 것은 남아의 의기요 청춘의 피요 씩씩한 기상이오 든든한 팔뚝 뿐이다. 무릇 ....과 ....과 잔열과 안일은 바다의 생활에서는 무엇보담 큰 독약이 되는 것이다. 저 바이런이 노래한 ‘에게’바다의 해적활동과 중세기이래로 허다한 로맨스 작가의 ....하는 대상이 된 스칸디나비아의 위킹(Vikings) 생활 등은 어떠한 느리광이 꼼지라기의 신경이라도 홍두깨처럼 불끈 .... .... ... 않고는 말지 아니할 것이다. 불란서의 지리학자 르클류는 그 명저인 세계문화지사의 지적환경론 속에 바다가 무서운 의지와 정열과 ....를 가진 모양을 그리고 또 바다와 함께 지내는 항해자는 바다에서 받는 바 쉴 새 없는 인상으로 말미암아 그 생활이 엄..진..하여지는 이유를 자미있게 설명하여 있다. 바다를 친하는 자는 진취적이오 분투적이고 필사적인 생활을 가지게 된다. 개인은 콜롬보가 되고 마젤란이 되고 캡틴쿡이 되며 국가로는 도도아 서반아 화란 등으로부터 내기 영길리 불란서 서전 ...가 되는 것이다. 한간 구들과 몇 쪽 널마루를 세계로 하여서 메마른 창자를 쥐여짜서 半남아로 부르고 ..바져 있는 것은 바다를 아는 이의 참을 수 있는 생활이 아니다. 고래의 잔들이를 두드리고 ..어의 볼퉁이를 쥐여지를 듯한 기운을 가지는 이는 좀먹은 책상 뒤지기와 초상 치르고 제사 지내는 것을 인생의 대사로 아라서,하래비,손자와 아비,자식이 진끠빠져여윈 ......논ㅅ배배미를 붙들고 놓지 못하는 생활에 견디지 못할 것이다.

 

조선민족이 본질적으로 무용스러웠음은 역사가 이를 증명하는 바이며 더욱 고구려의 국제환경과 신라의 역사적 사명이 무용본위의 국민훈련을 요구하였음으로써 국민의 기풍이 저절로 꿋꿋 씩씩함을 숭상하였음도 일반이 아는 사실이다. 통일신라 이후에 외국을 걱정하여 무력을 준비할 필요가 없어지고 한편으로 당나라의 ....한 문화를 수입하고 모방하는 가운데 문약의 풍이 생기며 다시 고려건국의 직후에 과거제도를 시행하여 국가의 인재를 뽑아쓰는 방법이 문학으로써 최고표준을 함음에 미쳐 글 배우고 지금이 인생의 제일 큰 일이 되고 무용과 군사관계는 점점 푸대접을 받고 거기 따라서 문약의 기습氣習은 가속도로 증진하였다. 그래도 계주,여진,몽고의 여러 신흥민족을 차례차례 대항하여 각각 수십년에 미치되 일즉 군사적으로 굴복한 일이 없었음은 조선민족 무용성의 뿌리가 어떻게 깊고 단단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바다에 있어서도 조선민족의 용맹스러움은 육상에서만 못하지 아니하였다. 조선민족과 지나민족과의 최초의 대충돌인 한무제의 침입군에는 ..업이라는 자가 누선장군의 이름으로서 수군5만을 거느리고 산동반도로부터 발해를 건너 대동강을 치거슬러 왕검성(그전의 평양)의 덜미를 공위하였었지만 한나라의 수군은 조선군의 항전에 ....지 못하여 마침내 패군의 쓴맛을 보게 되었다. 이 뒤 수나라 당나라의 여러 번 침입에 다 수군이 따라 왔었지마는 그것들도 번번히 패전 이외에 아무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 때 조선편의 수군이 어떠한 편제로 있었는지는 자세치 아니하지마는 수군을 대항한 자는 역시 수군이었으리라고 볼 것이다. 그러고 방면을 고쳐볼진대 우리 신라시대로부터 고려상엽에 걸쳐서 일본의 서남지방이 어떻게 오래 그리고 많이 반도해인에게 물려지내어 왔음은 시방도 남아 있는 북구주 해안의 방어시설이 대단하였음에 이를 살필 수 있다. 신라말년에 반도가 다시 3국으로 나누이고 북방세력을 대표하는 태봉과 남방남력을 대표하는 후백제가 불꽃이 일듯한 패권 다툼을 할 때에 태봉 편의 남방제압군은 후일의 고려태조로 된 왕건이란 장수인데 왕건은 백선장군의 이름으로서 수군을 거느리고 후백제의 해상봉쇄를 행하여 크게 용명을 나타내였었다. 고려왕씨의 일족은 필시 예성강에 본거를 두고 조선의 서해상에 활동하던 해상 세력의 지도자로서 그는 이 배경으로서 태봉에 들어가 지위를 얻어서 他日의 왕업을 건설한 자로 인정된다. 고려 현종 10년(1019) 940년쯤에 고려인이 여진인을 거느리고 병선 50....으로써 일본의 대마도로 북구주일대를 ....하여 일본의 조야를 ....케 한 사건은 실로 반도 인민의 해상활동력이 오히려 강대하였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조선인은 해상에서도 더 굳센 민족이었다. 이러한 根基가 있었음으로서 이 뒤 고려의 원종 열왕 2대에 걸치는 원나라의 2번 일본정토에 큰 협력을 하기도 하고 창왕의 선년으로부터 이조의 세종조에 걸쳐 여러 번의 대마도정토를 행하여 다 좋은 전과를 거두기도 하고 또 고려하엽에 왜구를 대항하는 필요상으로부터 수군을 창설하고 전함과 화포를 발명개량하여서 그 ....한 기세를 꺾기도 한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에 들어온 이후의 대세는 무용의 면이 날로 주는 반면에 문약의 풍이 날로 커진 사실을 가릴 수 없이 되었다. 어느것이 먼저요 나중임을 질정해 말하기는 어려우되 이러한 경향이 분명히 바다에서 멀어지고 바다를 잊어버리는 사실과 함께 진행하였다. 필시는 문약하짐으로 바다에서 멀어지고 또 바다에서 멀어짐으로 더 문약한 풍이 자랐을 것이다. 조선반도에 관계있는 해상관계의 허다한 전설은 국내에 국내에 전하는 것 국외에 전하는 것을 막론하고 죄다 신라시대의 일로 되어 있으며 고려이후의 문헌에는 바다 관계의 설화를 다시 얻어볼수 없게 됨은 대체로 반도인민의 바다를 떠난 생활이 고려이 강降의 일임을 나타내는 좋은 증가라 할 것이다. 그런데 조선민족의 문약에 빠진 연대도 이로 더불어 어근비근함이 사실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조선민족이 바다에서 멀어진 뒤에 첫째 국민의 깃 kd이 졸아들어서 집안 안에서 복작 복작하는 가운데 당쟁과 같은 구진 결과를 가져오기에 이르고 둘째 해상활동과 해외무역의 이익을 내어버리고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경제가 빈궁에 빠져 사회 문화 모든 것이 그 때문에 발전하지 못하고 셋째 바다를 동무하여 용장하게 살았어야 할 민족이 바다를 소박하여 위축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민족정신과 그리고 생활태도가 다 유약....에 빠져서 그림자 같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다시 한번 ‘랏셀’의 말을 빌려보건대 ‘바다는 제 국민 발전의 원천’이어늘 우리는 이 근원을 틀어막고 또 잊어버리고서 당연한 국민발전의 기회를 상실하였던 것이다. 희랍과 라마의 역사는 우리와 같은 반도국민의 지리적 약속을 보여주는 좋은 거울이랄 할 것인데 희랍,라마 역사의 영광스러운 ,...은 육지에서 퍼지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퍼졌다. 희랍의 문화세계 라마의 권력국가가 다 바다를 거쳐서 전개된 것임이 새삼스레 설명을 요할 것도 아니다. 사실을 말하면 희랍인이고 라마인이고 둘이 다 바다를 좋아하던 민족을 아니었다. 희랍의 유명한 속담에 ‘“마레아”의 끝을 돌아가거든 집을 잊어버려라’ 한 것이 있고 또 ‘매씨나’(시칠리섬의 해항) 해서嶼에는 괴물이 있더니라 한 전설은 다 바다를 무서워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며 라마인도 역시 바다를 싫어해서 용장으로 이르는 키케로도 아테네로 갈 때에 가까운 해로를 두고 일부러 먼 육로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렇지마는 좋아하든지 언짢아했던지 희랍인은 인구증가로 식민지를 만들려 하며 해상활동의 위험함을 무릅쓰지 아니치 못하였으며 라마인은 지중해의 제패를 위하여 카르다고와 희랍과 동방의 여러 나라로 더불어 바다를 무대로 하는 많은 싸움을 되풀이하지 아니치 못하였다. 바다는 장괴한 존재인 동시에 위험한 처소임으로 해상활동으로 유명한 인민의 사이에도 바다에 대한 공포감이 결코 없지 아니한 것은 고래로 모험, 탐험의 많은 업적을 내고 마침내 세계굴지의 해운국이 된 ....국민 내지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류톤 민족의 신화에도 바다는 잔인빈욕한 강탈자 살육자로 표상되어 되어 있고 처음 지중해 뒤에 인도양으로 웅비한 사라센 인민도 홍해를 빠져서 인도양으로 나가는 해협을 Bahei Mandeh 루淚의 문이라고 이름 지었음 등에 나타나는 바와 같다. 이네들도 다 바다가 무섭기는 하지마는 무서운 바다를 들어가야 국민의 발전과 부영이 있다하고서 ....와 장거를 결행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의 진보가 함께 항해술이 진보하고 선박의 동력이 발달하고 또 그 몸뚱이도 커져서 드디어 세계의 모든 바다가 이네의 앞에 항복하게 된 것이다. 바다는 이러한 국민에게 영토와 재물과 함께 영광을 주었다. 그런데 조선 인민은 이 반대의 길을 걸어서 호호무변한 바다가 신변에 있음을 잊어버리고 손바닥만한 국토 안에서 다랍고 구차하고 갑갑한 꼼지락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악스럽던 운명의 속에서 놓여서 신흥국민으소서의 빛난 출발을 하는 자리에 섰다. 민족의 생활과 역사의 진행에 커단 전기를 주어서 모든 것을 무리로부터 합리로 부당으로부터 정당으로 옮겨오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대목에 있다. 조선인의 국민생활과 및 그 역사를 찝덥지 못하게 한 모든 원인을 밝혀내어서 똑바른 생활가치를 새로 만들어야 할 중요한 기회이다. 그 가장 큰 원인이 경제적으로 구차하였음과 사회적으로 당쟁에 심하고 통일성과 조직력이 부족하였음과 제2차적으로는 국민의 기풍이 유약무기력하여 진취와 건설에 합의하지 못하였음에 있었다고 보겠는데 이 몇가지 ...풍...습은 실로 다 반도국민으로서 바다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유도..치된 것이라고 봄이 결코 억지가 아니다. 설사 이 이유를 승인하지 아니할지라도 우리 국민의 눈과 마음과 힘을 바다로 전향시켜서 이 시원한 세계를 생활무대로 하는 때에 국민의 기풍이 저절로 고쳐져서 어느 동안에 되는지 모르게 역사의 방향과 색채가 돈頓 연히 일변하리라 하는 결과를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우리의 자연환경을 또 한번 살펴보자. 우리 국토가 반도로서의 모든 약속을 가졌음은 새삼스레 닐컨할 것 없거니와 마찬가지의 반도 가운데서도 조선반도에는 독특한 여러 조건이 갖추었음을 주의해야 한다. 지도를 펴고 보자. 조선반도에는 남방과 서방의 두 해안에 길고 짧은 무수한 팔뚝이 불쑥 불쑥 내밀고 그 좌우에 깊고 후미졌다. 서해안의 장산곶串 태안반도 남해안의 .. 반도 고성반도처럼 이러한 지형을 지리학자들은 리아스식이라고 부른다. 서반아의 북서부에 이러한 지형이 있어서 그것을 ‘리아’라고 부름에 인한 것이다. 조선반도의 남 서 양 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의 세계상에 있는 전형적의 것이다. 그러나 조선반도의 이러한 지肢(사지,팔다리)절은 서반아반도에 비하여고 훨씬 현저하기 때문에 학자의 중에는 이 특징을 명백하기 위하여 새로 조선식해안이라는 명사를 만들어 쓰는 이가 있다.

남해안은 서해안에 비하여 지절의 발달이 더욱 현저하여 그 길이가 40..에 달하는 것이 있고 그 좌우에는 흔히 깊은 후미가 생기고 앞에는 많은 섬이 벌려 있다. 임진왜란에 이충무공이 ..원지이든 ..산도와 명나라 수군의 근거지이든 고금도가 다 이러한 지절을 짊어지고 생긴 해만을 이용한 것이며 가깝게는 아일전쟁에 일본해군이 집결하여서 아국의 발틱함대를 맞이한 곳으로 드러난 진해만이 또한 그 하나이다. 반도릐 남해안에이러한 지절이 특별히 발달하여서 마치 남태평양의 모든 것을 죄다 움켜쥐려는 기세를 보이며 그것을 실행하기에 훌륭한 어선 상선 군함 등의 큰 근거지가 무수히 생성되어 있음은 어떠한 지정학적 의미를 가진 것이다 할까. 하늘이 반드시 유심하게 이 지형을 만드신 것은 아닐지라도 이러한 국토를 가진 국민이 이 재미있는 지형 훌륭한 자연적 조건을 무의미 무가치하게 버려둠이 가할까 천여불수면 반수기..이라는 말과 같이 조선국민은 이 지형을 활용할 줄을 몰라서도 일즉 원나라가 여기를 근거지로 하여 두세 번의 일본 정벌을 행하였으며 일본은 앞서서 호시..어지로 생활물자를 여기서 벌어가고 뒤에는 아일전쟁의 최후슬리를 여기를 의지하여 결정하였다. 구한국의 광무년간에 아국과 일본이 진해만을 저의 것 만들 량으로 업칠뒤칠두껍이씨름을 하다가 마침내 이것이 일본의 손으로 돌아가는 때에 다른 날 조선해협과 일본해상의 해전이 결정되고 또 우리 한국의 36년 동안 무서운 시련이 여기 결정되었다. 귀중한 보배를 거느리지 못하면 오직 도적놈의 위해를 받고마는 셈이었다. 우리 대한민국의 전도가 이 남해안의 특수지형의 가치를 정당히 발휘하고 못함에 많이 달려 있음을 생각해야 될 것이다.

 

또 우리는 여기 역사상에 나타난 임해국민으로서의 실적을 반성하려 보자. 인류의 역사가 바다와 함께 발전한 것처럼 조선의 역사.. ..面에 있어서 바다와 함께 생장하였다. ..고의 조선은 발해에 애둘러서 성립하였다. 그것이 고구려가 되고 삼국이 되고 통일신라가 되고 고려 이씨조선이 됨을 따라서 조선반도의 역사는 황해에 에둘리고 지나해에 에둘려서 동방해상의 뚜렷한 존재를 이뤘다. 그리고 이 반도는 바다에 다다른 나라로서 마땅히 가질 ..다의 특수한 역사를 만들어내었다. 이이 말씀한 한 수 당 여러 나라의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세력 박차버린 것도 그 하나이니와 서로는 5개 송 원의 여러 왕조와 남으로 류구琉球 남양과 동으로 일본의 모든 나라를 대수로 하여 무역 문화수입 교통중계의 상에 여러 가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사실에도 주의를 요할 것이 많다.

 

또 지나의 발해연안으로부터 산동반도를 지나고 강회지방에 이르는 황해 동지나해 연안각지에는 아득한 옛날로부터 우리 조선계인민의 활동과 거주한 사적이 줄대어 있어 왔다.

 

지나의 주나라 시대에 회수淮水(강이름,회) 유역에 나라를 세우고 인정을 행하여 그 근처의 36국이 와서 붓 조차서 주의 대립세력이 되었다 하는 서라는 나라는 지나의 고사에 동방계통의 민족으로서 동방민족의 한 특징이 되는 國祖卵生전설 나라를 세운 임금이 알 속에서 나왔다고 하는 고사설화를 가졌었다고 하니까 이 전설은 줄잡아도 조선계통의 인민이 황해를 가운데 두고 이쪽 언덕 저쪽 언덕에 똑같이 분포하여 살던 시대가 있었음을 보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나의 당나라 시절에 만든 정사의 하나인 송서와 양서에는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고 있음 어느 시대에 백제는 바다를 건너가서 요서의 진평군 등지를 점거하여 거기 백제군郡을 두었음을 기록하여 있다. 이것을 사실이라고 하면 육지에서는 고구려가 막혀서 될 수 없는 일이지만 은 아무 방해를 받지 않는 바다를 건너가서는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음이 물론이다. 백제의 이 일도 후세의 역사가들은 의심스러운 일로 쳐서 대게는 말살해 버리게 되었지마는 지나의 정사 특히 반도국가에 대하여 수이여 여기는 버릇이 심한 당대의 문헌에 전하는 사실을 이유없이 부인함은 불근신不謹愼(謹愼말이나행동을삼가고조심함)의 심한 일이라 하겠다. 돌이켜 생각하면 백제의 이 사실처럼 반도계인민의 해상활동의 사실이 문헌적 생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얼마나 많이 ..몰되었을까를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저 신라하대의 해상왕 장보고의 사실도 당서와 일본기 등 외국 문헌을 의..하여 그 위대한 활동내용을 우리가 알지 아니하는가.

 

다시 해상활동의 기본이 되는 항해술 해전법의 .. .. .. 능력을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어에 선박을 배라고 이르고 작은 배를 거루하고 이르는데 이 말이 먼 남양해인의 말과 연락을 가진 듯함은 우리에게 재미있는 상상을 자아내지마는 이것은 아직 모르는 체하자. 아무리하든 조선의 항해술은 그 연원이 심히 구원久遠한 것으로서 옛날 어느 시기에는 반도인민이 오랫동안 동방해상에 혼자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던 사실은 일본편의 문헌에 많이 드러나 있다. 일본의 신화에는 ......존이라는 이가 처음 배를 만든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이는 우리 반도로 더불어 특수한 관계를 가지는 자이며 그 배를 만든 목적은 신라국의 금은보화를 가져다 쓰기 위함이었다고 하며 또 배 만드는 재료도 반도지방을 거쳐 전해오니라고 하였으니 이 이야기는 필시 일본조선술의 이 연원이 반도에 있음을 반영하는 설화의장意匠일 것이다. 그 역사시대에 들어온 뒤에도 큰 배를 지으려 하던 공장工匠을 신라로부터 데려간 실례가 있다. 일본서기의 응신왕 31년후에 각 지방의 ..上船 500척이 무고항에 모였다가 신라 무역선의 실화한 것에 ..소되매 신라로서 배 잘 짓는 이를 데려다가 새 배를 짓게 하니 이 이들의 후손이 ..진꾸 하변군 ......에 정주하여 대대로 나라의 배를 지어바치는 ..명부의 일족이 되었다 한다. 또 일본은 지나의 남북조시대(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전)로부터 해로를 말미암아 사신을 지나의 남조에 왕래시켰는데 그것이 북방항로를 경유하는 시기에는 많이 신라의 배를 이용하였으며 설혹 저의 나라의 배를 타고 도사공은 많이 신라사람을 썼다. 그것은 신라의 배가 일본에 비하여 견고하며 신라의 사공이 결과로는 ..선이라는 새 선형을 창조하여 이를 제복하기에 성공하였다. ..선이란 것은 배의 면판에 쇠로 뿔을 만들어 부쳐서 대적의 배를 들어 바다에서 깨뜨리는 설비를 한 배를 이름이니 근대 외국군함의 충각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당시 동양의 전선에는 이러한 장비가 없고 고려만이 이를 가졌음으로서 고려의 해군 한때 천하무적이었다. 일본의 어느 역사가는 이것으로서 세계 철갑선의 시조라고 말하였지마는 실상은 쇠의 충각에 그치고 아직 전면장갑이라고 볼 것을 아니었다.

 

고려의 정왕2년(1350) 이후에 왜.. 일본인의 해적이 우리 해상에 ..략을 행하여 그 화가 날로 심하여지고 반도의 전해안은 물론이오 심지어 개경 부근에까지 왜적의 칼부림이 있기에 이르러서 고려의 국가생활에 중대한 위협이 되었다. 처음에는 왜적이 뭍에 오른 뒤에 방..함으로 전과가 신통치 못하더니 최무선이란 어른이 해적인 바에 수상에서 막아야 옳다 하여 조정에 건의하여 다시 수군을 설치하는 동시에 당시의 신무기인 화포술을 고심연구하여 고성능의 화약을 군함에 싣고 해상에 나가서 왜..의 집결한 것을 화공..멸하 뒤로부터 왜..의 기세가 겨우 꺾였음은 우리 해군사상에서도 특별히 영광스러운 부분이다. 고려의 뒤를 이어이씨조선에서 왜..을 가상적이니 당면실제의 적으로 하여서 견고 경.. 쾌속의 여러 요소를 구비한 전선을 만들려 할 때 적인 왜..로부터 지나의 강남 내기 류구까지의 선형을 모아다가 주밀하게 비교연구하여서 각각 그 長處를 따서 조선독특의 전함형을 창조하고 특히 적의 공격을 받는 일 없이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구선이라는 고금무류의 선형을 ..출하기에 이르렀다. 구선의 분명한 창조연대는 알 수 없으되 태종13년(1413)에 상감이 임진강에 나가 구선과 왜선이 서로 접전하는 모양을 구경한 사실이 사적에 기록되어 있다. 이 구선이 그 뒤 어떻게 된 것은 문헌상에서 微考하기 여렵고 이씨조선상엽이래로 우리 수군에 전승되는 일반형에 판옥선이라는 것이 있고 그 판옥이라는 이름은 널빤지만으로서 집처럼 둥그렇게 포장하여 적군의 시석矢石(화살,시)과 ....을 면하게 한 것으로서 구선과 판옥선은 대개 같은 종류의 것 혹 기록상의 판옥선에 구선도 포함된 것이 아닌가고 나는 생각한다. 여하간 구선과 판옥선은 이 뒤 해상방수守를 말하는 이의 큰 주의를 끈 바로서 율곡 이선생 같은 어른도 선조 초년에 남의 근심을 덜기 위하여 판옥선을 많이 많들어야 할 필요를 역설한 일이 있었다. 옛날의 구선과 판옥선이 이충무공의 손에 들어가서 근본적의 대수정이 더해져서 선체왼통을 쇠로싸고 갑판위에는 쇠못의 모를 부어서 적군이 발을 부치지 못하게 한 완전 무적의 신형선으로 위용을 나타내게 되었다. 곧 충무공의 구선이다. 임진왜란의 ..정이 가신 이충무공의 공이 약음에 대하여 이충무공의 전과는 많이 구선의 위력이었음은 여기 ....히 것 거릴 것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충무공의 새 구선은 판옥선으로부터 ..갑선으로 대진보한 것으로서 곧 세계상에 있는 철갑선의 원조인 것은 이미 일반으로 공인된 바이다. 이씨조선의 후기에도 전선의 개량에는 늘 주의를 더하였음은 숙종..6년(1700)에 강화인 ....의 고안한 제도에 의하여 나라에서 륜선-노대신 바퀴로서 물을 떠밀어서 추진하는 배를 만들고(륜선의 論은 이미 명종의 대로부터 있었다) 영동16년(1740) 전라수사 전운상이 해..선-頭底尾大 前大後小하여 해..의 모양과 같이 생긴 새 선형을 만들어내어서 널리 각 수영에 이 배를 만들어 두게 한 사실 등에 나타났음과 같다. 여하간 이씨조선에서는 전대에 예를 보지 못하는 독립한 수군의 제도가 확인하여 있어서 경국대전 속대전 등에 거하건대 대중소 군함7백수십척(경국대전에서는 대..선 중..선 소..선 등 727 대전회통에서는 각목이 변경되어서 전선 방선 병선 구선 ..후선 해국선 소..선 ....선 급수선 ..선 멸소선 퇴..선 등 787척)에 수군48800명(경국대전)이 상비...되어서 반도연해의 ..처바다에 그 진영이 배설되어 있었다. 이렇게 5백여년 동안 독립한 수군의 전통을 지켜내려 오기는 아마 동양뿐만 아니라 온세계에 있어서도 희..한 일이 아닐까 한다. 조선은 분명히 역사적 해군국이던 것이다.

 

그 다음 조선민족의 바다에 대한 감각은 어떠하였던가. ........무변무애하고 광..노도가 건곤을 뒤잡이길 하는 바다를 보고 그는 공포하며 ..축하다가 마침내 용기가 소..되고 활동이 저지되고 말았던가 아니었다. 그는 성내는 바다가 그대로 순한 바다인 줄을 알며 바람과 밀물을 타면 우리에게 새 천지 새 생활을 선사사는 정다는 바다인 줄을 진작부터 깨달아 알았다. 그리하여 일본의 군도는 진작에 그의 식민지로 이용되었다. 오월과 강남은 그의 무역지로 교통되었다. 한참 신라중엽이후 국민의기가 ....되었을 무렵에는 ..연히 거선을 바다에 띄우고 지나의 천주 경주 동남아세아의 점파占婆 진.. 남태평양의 ........ 파라.. 인도양의 나인국 ....도를 거쳐서 드디어 인도반도를 종관縱貫하고 서남아세아를 역유歷遊하고 동라마제국의 기이한 문물을 구경한 이가 각금 있었다. 당시의 남해상 교통중심이던 시방 수마트라도의 항구에는 신라여행승이 체류滯留하는 이가 뒤를 끈는 이도 없고 5인도의 유명한 불교학재에는 고구려 신라의유학승이 언제든지 많이 있었으며 그 어떤 이는 수십년 거기서 부하다가 그대로 세상을 떠나는 이도 있었다. 신라 성덕왕 때에 해로로 인도로 건너가서 서역제국을 두루 구경하고 여러 해만에 시방 파미르 고원과 중앙아세아의 대사막을 거쳐 육로로 당나라 장안으로 돌아와서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여행기를 남겨놓은 혜초라는 이가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조선인민은 결코 바다의 겁쟁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한국의 부흥과 함께 조선민족생활의 일대전기를 만들 시운에 임하였다. 국민의 기풍을 고치지 않고 국민경제의 새 길을 트지 않고는 국가의 부흥과 민족의 갱생이 다 없다. 오래 ....하였던 우리의 신경을 ....하며 힘껏 침체하였던 우리의 심..을 ....하여서 용장활발 웅박雄博원대한 신정신 신기상을 가짐이 아니면 새 나라를 세우는 보람과 새 민족생활을 출발하는 기의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이에 우리 국토의 자연적 약속에 눈을 뜨고 역사적 사명에 정신을 차리고 또 우리 사회의 병들었던 원인을 바로 알고 우리 인민의 살게 될 방향을 옳게 깨달아서 국기민족 백년대계의 든든한 기초를 놓아야 하는 것이다. 거기 있어서 우리가 반도국민 임해국민으로서 잊어버린 바다를 다시 생각하여 잃어버렸던 바다를 도로 찾아서 그 인식을 바르게 하고 그 자각을 깊이하고 또 그 가치를 발휘하고 그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첫걸음이오 또 큰 일이 된다. 바다를 .... 바다에 서고 바다와 더불어서 우리 국가민족의 무궁한 장래를 개척함이야말로 태평양에 둘려 사는 우리 금후의 영광스러운 임무이다. 일망무변한 남방 대양을 향하여 불쑥불쑥 내민 반도남안의 무수한 팔뚝이 낫낫치 국민의기의 발양發揚(양,오르다)과 국가경제의 배양상에 보람 있게 활동함으로서 우리가 다시 한번 우리 역사를 변모시켜서 우리 민족의 총명과 용감함을 나타내어야 할 것이다. 누가 한국을 구원할 자이냐. 한국을 바다의 나라로 일으키는 자가 그일 것이다. 어떻게 한국을 구원하겠느냐. 한국을 바다에 서는 나라로 고쳐 만들기 그것일 것이다. 이 정신을 고취鼓吹하며 이 사업을 실천함이야말로 가장 근본적 그리고 영원성의 건국과업임을 우리는 확신하는 자이다. 경제의 보고 교통의 중심 문화수입의 첩경捷徑 물자교류의 대로 내기 국가발전의 원천 국민훈련의 도장인 이 바다를 내어 놓고 더 큰 기대를 어디다가 붙일 것이냐. 우리는 모름지기 바다를 외워두었기 때문에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바다를 붙잡으로서만큼 찾아가지고 또 그것을 지켜야 한다. 진실로 인도하기를 옳게 할 것 같으면 일찍 바다의 위에서 유능유위한 많은 증거를 보인 우리 국민은 금후에 있어서도 반드시 이 장단에 큰 춤을 추어서 다 함께 구국의 대大원 을 이룰 것이다.

 

단기4287년10월1일

 

六堂 최남선

 

□ 자료출처 : 한국해양사(1953년 대한민국 해군본부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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