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은 누구인가?

등록일20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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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형은 누구인가?

 

근현대 대한민국 경제 사회 발달사에 있어서 이시형이라는 인물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오늘날 한국 경제의 대동맥을 이루는 해운산업의 초기 단계에 훌륭한 인재들을 양성한 교육자이며, 학교에 재직하지 않을 때에는 몸소 험한 파도를 헤치며 항해 생활을 계속 한 전형적인 해양인이다.

 

1960년대 70년대 한국 해운 도약기에 육상에서 해상에서 한국 해운의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치고 이시형의 지도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초기 한국 해운에 있어 그의 영향력은 특별했다. 이것은 이시형의 투철한 해양사상과 함께 해방 후와 6.25 전쟁 상흔으로 드리워진 암울한 시대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일제강점 말기 태평양전쟁에서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수송선(화물선)의 죽음의 항해에서(당시 많은 수송선들이 미군의 폭격으로 침몰했다) 살아남은 선박기관장 이시형은 해방되자 귀국하면서 가장 먼저 한국 해운을 일으킬 해기사 양성 교육기관 설립 작업에 들어갔다. 한국 해운의 초기 단계와 도약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재들을 길러낸 지금의 한국해양대학교는 바로 그때 학교이다.

 

해방 후 한국의 경제와 산업은 아무것도 해볼 만한 것이 없었다. 일제는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중요 시설을 뜯어 갔고 남은 시설조차도 그것들을 운용할 전문인력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때에 기술 인력을 양성할 학교를 세운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문제는 학교를 설립하고, 그리고 설립 후 운용할 여건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는 데에 있다. 이시형은 지금의 진해에 미군정으로부터 일제 때의 해군통제부 시설을 인수받아 해양대학을 세웠다.

 

이시형이 해양인물로서 빛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해운입국을 위하여 수많은 고난을 감내한 그의 희생정신에 있다. 사실 그는 스스로도 고백했듯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의 생각과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화를 내는 경우가 많았고 복장은 늘 허름하여 넥타이와 양복이 구겨진 옷을 입고 다녔으며 차림새가 너무 평범하고 덜 세련되어 행정실 직원과 함께 해운국에 출장이라도 가게 되면 처음 보는 사람은 이시형을 행정실 직원으로 행정실 직원을 학장 이시형으로 잘못 알아보곤 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위대한 해양인물로 존경받는 것은 해운과 해양활동에 한국의 명운이 달렸음을 일찍부터 깨닫고 모두가 어려웠던 고난의 시기에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은(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겠지만) 힘든 시기에 자신의 직임을 떠나지 않고 오직 희생정신으로 꿋꿋이 지켜냈다는 데에 있다.

 

한국 해운의 도약기 그 이전에(해방 후부터 약 1950년대 말까지) 해양대학이 폐교될 위기가 약 6차례 있었다. 가장 어려운 때는 6.25전쟁 중이었다. 당시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피난을 다녔고 학교는 공산군의 폭격을 받아 거의 전실된 상태였다. 학생들이 떠나갔고 교직원들도 하나 둘 떠나갔다. 부산 거제동의 천막 교사에서 아무것도 없는 교육 시설 속에서 학교가 이어간 것은 기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955년도에, 부산 영도 동삼동(지금의 남고등학교 교정)에 교사를 세우기까지 이시형과 교직원들과 학생들은 고난의 행군을 감행해 갔다.

 

이시형이 한국해양대학의 군산 시절 학장으로 재직 시(개교 2년째), 재학생과 교직원들 대상으로 교훈을 공모했다. 그때 1기생 손태현의 교훈이 당선되었다. 그의 교훈은 5개 훈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의 각오는 바다의 매골”이다. 그리고 또 학내 구성원들이 부를 단체가요를 공모했는데 1기생 이준수의 것인 ‘해대요가’가 당선되었다. 이들 교훈과 해대요가는 학교 행사와 단체활동에서 외워지고 불러졌다. 이후 교훈과 해대요가는 미래 한국 해운을 짊어져 나갈 예비해기사들에게는 험한 해상생활을 버텨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 심호섭, 홈페이지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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