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수와 해대요가

등록일20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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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수와 해대요가

 

이준수는 한국 해운 교육계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그 동안 수많은 해양 인재를 배출한 오늘의 한국해양대학교가 굳건한 반석 위에 서게 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본래 이 학교는 부산 영도의 동삼중리, 그러니깐 지금의 남고등학교 교정에 있었다. 멀리 한국 해운의 미래와 학교의 전망을 내다본 학장 이준수는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과 함께 이전 작업에 착수했다.

 

이전을 위해서는 경제 지형적인 보다 큰 그림의 상상이 필요했다. 이준수는 한국의 수출입과 해운을 떠맡고 있는 부산항의 입구에 위치한 아치섬이 최적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조도라 불리기도 하는 아치섬은 유명한 오륙도를 마주하는 섬으로서 부산항에 기항하는 화물선은 그 사이를 통과하게 되어 있다. 그곳에서는 남태평양으로 향하는 끝없이 펼쳐지는 수평선을 볼 수 있고, 4년 동안의 학교생활을 하는 학생들은 이 푸른 바다를 지나는 화물선들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 바다와 함께 꿈을 키우는 요람으로 되기에 충분한 곳이다.

 

이준수는 학교 이전을 위하여 수많은 노력을 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섬 주민들의 거센 반발을 극복해야 했다. 그 외에도 그는 학교 이전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했고, 교육부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가장 난관은 섬과 육지를 잇는 지금의 연륙교(방파제)를 짓는 일이다. 공사비가 많이 드는 일이라 당시 넉넉하지 못했던 박정희 정부의 재정으로는 예산 책정이 불가능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이것도 해결되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이준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수년 전에 작고한 이준수의 해운계에 있어서의 삶은 한국 현대사회의 성장 과정만큼이나 파란만장했다. 해양대학이 설립되고 1기생으로 입학한 그는 학교가 어려웠던 전쟁 전후 기간 동안에 나중에 평생의 스승이 된 당시 학장이었던 이시형을 도와 해기海技 교육의 기초와 그 전통을 세우는 데에 힘을 보탰다. 학교의 초창기 군산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학내에 학생들이 부를 단체가요를 공모했는데 이준수의 것이 당선되었다. 나중에 ‘해대요가’라 불리게 된, 이 학교에서 수학한 수많은 해양인재들이 졸업하여 험한 해상생활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이 된 10절까지 있는 이 단체가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떼창’의 노랫말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해대요가 6절

웅지를 못 이루면 귀향 안 하리

부모의 슬하도 그리웁건만

천부의 사명은 더욱 크도다.

우리의 고향은 태평양이요,

우리의 무덤이 될 태평양이다.

(노랫말의 전체 내용은 다음 게시판의 ‘해대요가’에서 소개함)

 

이런 단체의 노래가 그들 단체생활을 하는 예비 해양인들의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기훈련 속에서 수시로 불려지고 있었고, 이와 같은 전통은 이후 1960년대와 적어도 70년대, 80년대까지는 계속 이어지면서 자리 잡아 갔고, 아마도 90년대 이후로 희미해져 이제는 거의 사라진 것 같다. 여기에 분명 우리만의 우리 한국인만의 해양사상이 흘러갔을 것인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제는 그 흔적조차도 알 수 없으니, 앞으로도 천리 길 만리 길을 헤쳐 나가야 할 해양한국을 위해서는 참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심호섭, 홈페이지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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