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해양작품 우수원고 채택

등록일2023-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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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생각하는 일

배가브리엘

 

 여행 계획을 세울 때 빠지지 않는 것은 근처의 바다를 찾아보는 것이다. 어디를 가더라도 바다는 보고 오는 것이 습관 아닌 습관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방문할 때 근처 바닷가 마을인 친퀘테레를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대만 타이베이에 갔다가 굳이 기차를 타고 와이아오 해변까지 다녀오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 부산에 갔다가 기장 바다를 보고 오는 것과, 서울에 갔다가 인천 바다를 보고 오는 것의 차이랄까? 하지만 나는 후자의 여행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그 바다에서 서핑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호수처럼 바람이 없는 바다에서는 패들보드를 꼭 타고 온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것이 오히려 좋지 않다고 하듯이 내가 바다에서 생업을 일구는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배를 타거나 물질을 하는 분들의 모습, 심지어 수족관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모습이 방송에 소개될 때마다 동경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내게 즐거웠던 일을 떠올리라면 대부분 바다와 관련된 것들이므로 - 학교에서 갔던 소풍과 사생대회, 사촌들끼리의 해수욕, 동생을 잃어버린 줄 알고 종종거리며 울다가 동생이 태연하게 파라솔 아래 앉아 수박을 먹고 있어 맥빠지게 안심해 버린 것들과 같은 기억이 내 안에 켜켜이 쌓여 있다. 차라리 바다가 나와 떨어져 있는 것이 낫다고 여기는 것은 지금 내가 있는 곳을 떠나 바다로 도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말 아침에 아무 계획도 없이 강원도 바닷가로 가는 스스로가 다 큰 어른처럼 대견하게 느껴진다.

 부산에서 태어났고 해운대에서 자랐다. 외국을 비롯한 타지 생활을 오래 했지만 여전히 해운대를 생각하면 저릿저릿하게 애틋한 느낌이 찾아온다. 굳이 다른 나라의 도시에 살 때에도 휴일이 되면 바다를 찾아갔던 것은 이런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벨기에의 브뤼셀에 살았던 때 주말이 되면 네덜란드의 스헤브닝겐까지 기차를 탔고, 휴가를 내어서는 포르투갈 에리세이라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 바다에서 하는 일이라면 멍하게 앉아있는 것까지 좋아하지만 서핑을 할 수 있는 바다라면 더더욱 좋았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시티 서퍼"라는 표현이 바닷가에서 매일 서핑을 하는 사람들의 겉모양을 흉내내어 탈색된 머리에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 헐렁헐렁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비꼬는 뜻에서 사용된다는데 나야말로 시티 서퍼였다. 매일 서핑을 하러 가기엔 여유가 없고, 그렇지만 주말이 되면 바다로 가고 싶어 몸이 뒤틀리는 신세였다. 당시에는 운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차, 버스, 택시, 무엇이든 탈 수 있는 것을 타고 가야 했는데 당연하게도 목적지는 하나같이 교통편이 좋지 않은 교외나 시골이었다. 포르투갈의 코임브라에 서핑을 하러 갔을 때에는 간이역에서 내려야 하는 것을 몰라서 정거장을 지나쳐 버렸다. 다음 역에 내려 하염없이 다음 기차를 기다릴 때의 서러움, 그리고 기묘한 두근거림이라니. 이제 막 봄이 시작되려는 계절에 남들보다 약간 일찍 포르투갈 바다에 들어갔고, 발가락이 뻣뻣해지는 추위 속에서 열심히 파도를 탔다. 같은 숙소에 묵는 인연으로 나의 서핑 버디가 되어주었던, 나만큼 성격이 급했던 여행객은 체격이 작고 왜소한 내가 바다를 견디는 게 대단하다며 엄지를 치켜세워 주었다.

 서핑을 좋아하는 이유를 물어본다면 바다에서 할 수 있는 일들 중 가장 간편하고 산뜻하며 단순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이빙을 하듯 헤엄을 치는 것도 좋지만, 서핑은 보다 넓고 멀리 있는 바다까지 가질 수 있게 한다. 나에게 서핑은 그냥 보드를 잡고 멀리까지 헤엄쳐 갔다가 보드 위에서 해변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다른 장비는 필요하지 않고, 날씨만 따뜻하다면 거추장스러운 수트를 안 입어도 된다. 게다가 진정한 서퍼들은 보드에 연연하지 않고 널빤지로도 파도를 탈 테니까 어쩌면 정말 가난하고 검소한 스포츠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서핑은 여러 사람들과 즐기면서 시작하게 된다 해도 결국엔 혼자로 끝나는 운동이다. 수영이나 달리기처럼 혼자 하는 운동만을 좋아하는 나에게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는 운동인 것다. 물론 아주 잠깐 동안은, 같은 바다에서 파도를 기다린다는 이유로 내 근처에 둥둥 떠 있는 사람들과 손을 들어 인사하기도 하지만 - 나처럼 낯가림이 심한 사람에게는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러나 몰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다가 타이밍을 맞추어 등을 돌리는 순간부터는 완벽하게 혼자이다.

 내가 파도를 잡아탈 수 있는지, 보드 위에 올라설 수 있는지, 해안가까지 매끄럽게 흘러갈 수 있는지의 여부는 오로지 나와 파도에 달려 있다. 바다와 나, 라는 표현이 더 이상 어울릴 수 없는 것이다. 파도를 기다리다 그 위에 올라서고, 얼굴을 물에 처박으며 파도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다시 보드를 붙잡고 올라서는 것까지 모두 내가 해야 한다. 고독하지만 고독하지 않고, 쓸쓸하지만 쓸쓸하지 않은 운동이다 - 언제나 바다가 있으니까. 사실 안전을 위해 혼자 서핑하지 않는 것, 그리고 밤에는 서핑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남들 몰래 심야 서핑을 즐기고 싶어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한국에 들어온 후 계속 서핑을 하지 못했는데, 때마침 서핑이 한창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유독 많은 사람들이 검은 서핑 수트를 입고 해변을 돌아다니자 소심한 나는 기가 눌렸던 것 같다. 부산은 물론이고 강원도 양양, 속초, 강릉에도 온통 서퍼들이건만 나는 부끄러움이 지나치게 많은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주말에 강원도까지 간다. 고속도로는 막히고 휴게소는 혼잡하지만, 그래도 바다까지 간다. 직접 기차문을 열고 내려야 한다는 것을 몰라 지나쳤던 역을 생각하고, 겨울 기운이 가시지 않은 포르투갈 바다에서 고작 두 명이 무모하게 파도를 헤쳤던 것을 떠올리고, 바람이 전혀 불지 않아 갈 때마다 패들보드로 만족해야 했던 네덜란드를 기억한다. 내가 이미 갔던 바다들과 앞으로 가고 싶은 바다들을 생각하다 보면 동해든 속초든 고성이든 도착한다. 나와는 달리 쾌활하며 붙임성이 좋은 서퍼들을 부럽게 바라본다. 부러운 마음과 시기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신기하게도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갑갑함이 어느 정도 트인다. 나는 아기 때부터 물을 좋아해서, 칭얼거릴 때에는 엄마가 욕조에 물을 받은 후 튜브를 씌워 넣어놓았다고 한다. 지금도 나는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 온몸이 나른해지고, 멀리서 바다를 상상할 때에는 가슴이 뛴다. 이번 주에는, 또 이번 주에는 하고 서핑샵에 들어가 보는 것을 계속해 목표로 삼고 있는데 언젠가는 불가피하게, 나의 부끄러움을 이길 정도로 강력한 유혹이 찾아오는 순간에는 그 목표를 이루게 되지 않을까 싶다. 바다에서 낚시를 하는 것이 나의 일은 아닐지언정, 바다를 생각하는 것이 어엿한 나의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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