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바다와 신앙경험' 우수원고 채택 - 이연 님의 '예수 사랑하심은'

등록일2021-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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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사랑하심은

 

 

하나님을 언제 처음 만났느냐는 질문, 신앙인이라면 적어도 한 번쯤 받아봤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단번에 대답했다. “여덟 살.” 분명하다.

1993년 9월, 강남의 모 병원. 난 부잣집 딸로 태어났다. 넓은 집, 넉넉한 형편의 가정. 부족한 것 없이 자랐었다. 잠시였지만.

부모님이 비싼 돈을 들여 사립초등학교에 진학시켰다. 성적이 가장 좋아야 학급의 반장이 될 수 있고, 악기 하나씩은 다뤄야 했으며, 수영은 기본, 스케이트도 탈 줄 알아야 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학원이나 과외 학습이 몇 개씩 줄지어 기다렸다. 그나마 가장 즐거웠던 것을 꼽자면, 수영 강습. 선생님이 무섭지도 않았고 지루하지도 않았다. 학교 수영 시간에 뒤처지지 않으려 엉겁결에 시작했는데 덕분에 일주일에 두 번씩은 연필을 잡는 대신 즐겁게 헤엄을 칠 수 있어서 기뻤다. 수영하는 날에는 체력 소모가 크니 다른 학원이나 과외 일정이 없었으니까.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기독교 학교였다. 매주 수요일 아침이면 전교생이 모여 교목이셨던 분의 설교 말씀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하루는 목사님이 부활절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못 박히셨던 고난과 부활을 다룬 영화를 예배시간에 틀어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덟 살부터 열세 살의 초등학생들이 보기에는 다소 잔혹성이 짙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시 면류관에 찔려 피가 흐르는 머리. 모진 채찍질에 등이 패이고 결국 손과 발에는 굵고 긴 못이 박히는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게 내뱉으신 말.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예배당에서 내 옆에 앉은 짝꿍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어.” 짝꿍은 되물었다. “왜?” 나도 내 마음을 알 길 없었다. 어린 마음에 영상 속의 고난이 너무 가혹해서 내가 대신 짐 질 수 있으면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아마 그 값진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셨을 것이다.

학교에서의 하루가 끝나고 수영을 배우러 갔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몇 분간의 스트레칭 후 물속에 들어갔다.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에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수영장 벽을 발로 밀어 출발했다. 순간 아킬레스건 부근이 뜨겁게 욱신거렸다. 발길질을 멈추고 물 밖으로 나와, 통증의 근원지를 찾아냈다. 피가 흐르고 있었다. 수영 선생님이 놀라서 달려와 응급처치를 해주시고 물 안으로 들어가셨다가 출발 지점 벽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확인하고 올라오셨다. 아마 그곳에 베여서 다친듯하다며 어머니께 연락드리겠노라 하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신발 뒷축과 다친 부분이 맞닿아 쓰리고 아팠다. 그때 생각했다. 이런 상처에도 너무 아픈데 예수님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아침에 보았던 영상의 예수님 발, 그리고 내 발의 상처를 겹쳐보았다. 때 묻지 않은 어린 내 생각과 시선. 나는 그날 하나님을 처음 만났다.

아이러니하게도 학교에서 매주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드리는 나를 양육하는 어머니는 무속신앙에 빠져 지냈다. 굿을 하느라 한 번에 수천만 원, 신점을 본다고 수백을 썼다. 아버지는 불교. 매 주말 절에 가서 기와에 소원을 쓰고 향을 피웠다. 어른들의 사정은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우리 집은 행복의 지속과 평안을 위해 무당과 절에 빌었으나 언제부터인가 흔들거리고 기울었다. 좁은 집으로 이사를 했고 밤에는 가끔 부모님 사이 고성이 오갔고 나 혼자 있는 집에 검은 양복 아저씨들이 찾아와 빨간 종이들을 붙이고 갔다. 그래도 고액의 굿은 지속되었고, 절에 쏟는 돈도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좋아하는 수영을 못하게 됐다. 가장 부질없는 것은 멈추지 않았으나 쓸모 있는 것은 하나둘 멈추었다.

나아지는 것 없이 몇 해가 흘렀다. 어머니는 무당에게까지 빚을 졌고 아버지는 실직했다. 이윽고 이혼가정이 되었다. 어머니가 가까운 사이부터 시작해 먼 친척에게도 돈을 빌리고 잠적했다. 집에는 형사가 찾아오기도 했다. 아버지와 벌레가 들끓는 단칸방에 살면서 눈물로 지새우는 날이 많았다. 현실에 지친 아버지는 폭력적으로 변했고 그 성미의 피해자는 나였다. 가시 돋친 말에 마음이 찔렸고, 모진 매질에 나가떨어지기도 했다. 주일에는 집에서 나와, 아침부터 초저녁이 되도록 교회에 있을 수 있어서 주일 하루만 바라보고 하루하루 버텼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교회에서도 중등부가 되었다. 중학생이 되고서 첫 겨울, 필리핀 단기선교 소식이 들려왔다. 신청서를 받아들고 집에 돌아왔다. 선교 참가비용이 걱정돼서 차마 신청서에 이름 한 자도 적지 못하고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어렵사리 아버지에게 여쭈었다. 단기선교에 보내줄 수 있느냐고. 아버지가 깊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그래라.” 하였다. 우리 사정이 어떤 줄 아느냐, 돈이 아깝다, 이런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예상을 벗어난 반응에 짐짓 놀랐다. ‘이건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곳에서 나를 보고 싶으셨나 보다.’ 그때 그렇게 생각했다.

선교를 위해 봉사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했고, 나는 찬무, 찬송을 연습했다. 연습 기간에 교회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니 마음이 가벼웠다. 무거운 공기로 가득한 집에 있는 시간이 줄어드니 행복했다. 한 달여의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필리핀에 달했다.

필리핀은 한낮에도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백화점과 간판에 빛이 번쩍거리는 상점이 즐비한 곳, 그 뒤편 골목에는 우리를 붙잡고 손을 내밀며 구걸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푸르고 맑다 못해, 투명하게 느껴지는 해변과 커다란 호텔이 있는 동네, 그곳과 멀지 않은 어느 마을은 악취가 진동하는 빈민가였다. 넓고 쾌적한 교회든, 좁고 열악한 교회든 우리는 예배했고 봉사했고 찬양했다. 교회에서 만나는 이들과 눈을 마주치며 웃고 손을 맞잡으며 기도했다. 세상은 빛과 어둠으로 갈릴지라도 믿는 자의 마음은 빛밖에 없었다. 실로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선교 일정이 마무리될 무렵, 바닷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시간이 생겼다. 쉬지 않고 찬양하고 중보기도를 한 덕에 목에서 쇳소리가 나고 발은 모기에게 수없이 물려 팅팅 부어있었다. 몸이 그렇게 축났음에도 오랜만에 내가 좋아하는 수영을 할 수 있다니, 그것도 맑고 넓은 바다에서! 잠시 주어진 시간이지만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새벽부터 흐려진 날씨에 구름이 잔뜩 드리우고 파도가 제법 높아졌지만, 물놀이를 앞두고 설레는 마음에는 구름이 끼지 않았다.

바닷물에 딛는 발. 차갑고 간질거렸다. 그 느낌이 좋아서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깊이 뻗어 나갔다.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수업을 마치고 수영장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던 때, 지금보다 넉넉하고 편했던 생활, 수영하다 발을 다쳐서 절뚝이는 걸음에서 하나님을 떠올리던 날. 그 순간 머리 위로 바닷물이 덮쳤다. 순식간에 간질거리던 바닷물이 나를 매섭게 삼켰다. 아무 생각 없이 나아가다가 모래가 푹 꺼져버리는 곳에 당도해서 뭍에서 그다지 먼 곳이 아님에도 수심이 급격하게 깊어진 것이다. 겨우 몇 초, 셀 수없이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휘감았다. ‘난 수영을 6년이 넘게 했다. 몸에 힘을 풀고 헤엄을 쳐보자. 발장구를 치면서 팔을 뻗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너무 무섭다. 나가고 싶다. 여기서 죽는 것인가?’ 앞으로 나아가려 할수록 되돌아가는 파도를 따라 내 몸도 더 뒤로 밀려났다. 발이 닿는 곳에서만 수영해 본 나는, 머리까지 삼키고도 남는 깊은 바닷물에서 한없이 나약하고 미약한 존재였다. 그리고 내 몸짓은 세찬 파도 앞에서 점점 힘을 잃었다. 잠깐씩 겨우 머리를 물 위로 빼내고서 소리 악! 하고 질러보고 해변에서 모래 놀이를 하는 다른 이들에게 손을 흔들어도 봤지만 소용없었다. 숨이 점점 차오를수록 초연해졌다.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곧 죽고야 말 것입니다. 저 땅으로 나아가고 싶은데 하나님 뜻이 아니라면 저를 거두어가세요. 너무 무섭습니다. 두렵습니다.’ 순간, 무슨 힘이 난 것인지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쥐어짜며 팔을 물 밖으로 꺼내고 고개를 들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쳤다. 이윽고 내 손목을 낚아채는 강한 손길이 느껴졌다. 선교팀 일원이 나를 발견하고 다가온 것이다.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그 손을 힘껏 붙잡았다. 살고자 하는 생각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나를 구하러 온 이마저 물 밖으로 나가기 힘들 정도로 잡고 늘어졌다. 상황이 더 최악으로 번질 수 있었지만 “안돼! 걱정하지 말고 힘을 풀어!” 하는 소리에 희미해지는 정신이 번뜩 깨어나 몸을 맡겼다. 그리고 모래사장에 몸을 누일 수 있었다.

긴장이 풀리고 오한이 들어 몸이 덜덜 떨리는 와중에 내 마음에 어떤 음성이 들어찼다. “딸아, 얕은 물에도 깊은 물에도 평안할 때도 힘겨울 때도 어디에나 내가 있다. 너의 찬양과 기도를 내가 들었다. 지난날의 기도도 오늘의 기도도 다 내가 들었노라.”

눈물이 흘렀다. 안도감, 감사함, 두려움, 경외심이 모두 뒤엉켜 눈물을 자아냈다. 하나님은 여덟 살의 어린아이 곁에도 살아계셨고 물속에서 꺼져가는 생명 곁에도 살아계신 것이다.

나를 구한 이도 분명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다. 그가 말하길, 물속에서 장난치며 인사하는 것으로 여겼다가, 어느 순간 느낌이 이상해 달려 와보니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힘겨워하는 내가 있었다고 한다. 내가 잡아끄는 힘이 너무 강해서 두려웠지만,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하며 한 걸음씩 밖으로 향했다고 한다. 나에게도 그에게도 믿는 자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나는 얼마간의 휴식 뒤에 다시 기운을 차렸다. 마음 한편에는 수영 좀 배웠다며 우쭐하는 생각도 있었으나 하나님이 손끝으로 창조하신 바다, 그 자연 앞에서 어찌나 작은 존재였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선교는 마무리됐다.

돌이켜보면 겨우 여덟 살에 하나님을 만난 것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맞닥뜨린 부모님의 이혼도, 가정폭력도, 어머니의 부재도, 가세의 기욺도 버텨낼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에도 남아 있는 발의 흉터를 볼 때마다 그날의 순수한 신앙을, 믿음을 되새긴다. 수영장에서 새기신 흉터, 바다에서 살리신 목숨을 갖고 살아가는 나는, 하나님의 증인이다. 첫 믿음의 때와 큰 기적을 선명히 새기고 사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일 것이다.

 

■ 이연, 은혜와 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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