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바다와 신앙경험' 우수원고 채택 - 박찬희님의 '어떤 여행'

등록일2021-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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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나는 모 단체의 부부들과 필리핀의 보홀로 봉사 겸 수련회를 다녀왔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었다. 한 달 여 전에 세부와 보홀 지역에 큰 지진이 났었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가자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이미 결정되어 일정에 맞게 조정이 끝났고, 대금도 지불된 상태였다. 나는 회장으로서 고민 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렸다. 기도하며 준비한 수련회였기에 의견들을 수렴한 후 그대로 강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떠나기 직전인 주말에 그곳에 다시 큰 태풍이 왔다. 그러나 예정대로 떠나기로 했다. 이미 결정된 일이기도 했거니와 우리를 위해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을 필리핀의 형제자매들을 실망시킬 수 없다는 마음이었다.

 

4시간의 비행 끝에 새벽에 세부시티 공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숙소에서 휴식을 취한 후, 아침에 필리핀의 최하층 빈민들 2-300명이 노숙하는 삐에르 꽈뜨로(Pier Cuatro)라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약과 먹거리, 쌀 등을 나눠줬다. 옷을 벗고 있는 아이에게는 옷을 입혀주었다. 조막만한 손으로 내 손가락을 잡고 놓지 않으며 맑은 눈으로 나를 보던 아이, 그 아이의 까만 눈동자 속에 예수님이 계셨다.

 

며칠 후, 세부항에서 승선하여 두 시간을 달려 보홀에 도착했다. 하늘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나 맑았다. 11월 12일 오전, 전 날까지 이런 저런 사역을 한 우리는, 잠깐의 여흥시간을 갖기로 했다. 내일은 큰 비가 온다기에 일정을 바꿔 발리카삭이라는 자그마한 섬으로 가기 위해 알로나비치로 갔다. 빗방울이 아주 가끔 떨어졌지만, 현지인들에게 물어보니 태풍은 갔고 바다는 잔잔하고 좋다고 했다. 우리는 작은 배에 몸을 실었다. 선원은 젊은 사람 두 명이었다. 거의 통통배라고 해야 맞을, 두 줄로 앉으면 움직일 수 없는 방카라고 불리는 작고 가느다란 보트였다. 우리는 그 배를 타고 40분을 달려 발리카삭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약 1시간 정도 머물렀다.

 

그리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기 위해 보트를 탔다. 비 한 방울 안 왔고 화창했다. 배는 한참을 달렸다. 그런데 도착할 시간이 지나도 한참을 지났는데 여전히 도착지가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덮였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그대로였기에 너무너무 추웠다. 비바람을 이겨내기 위해 일행은 모두 오들오들 떨며 구명조끼니 수건이니 온갖 덮을 수 있는 것들로 몸을 덮고, 몸을 맞대고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선원 두 사람의 당황하는 얼굴이 보였다. 공포에 싸인 모습이었다. 그곳에 선교지 교회를 세워두고 있던 한 분이 구조요청 통화를 시도했지만 태평양 한가운데서 휴대폰은 무용지물이었다. 3시간여 가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때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목적지가 안 나오지?” “태풍이 오는 것 같은데?” “우리 조난당한거야?” “섬이 안 나타나면 어쩌지?” “배가 뒤집히면 어쩌지?” 온갖 불안한 말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그 때 선원의 모습이 다시 보였다. 연료가 다 떨어져 가고 바닥만 남았던 것이다. 엔진을 끄고 주위를 돌아봤다. 주위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안개만 가득하고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비바람은 더욱 세찼다. 남은 연료를 아끼기 위해 속도를 완전히 줄이고 경제운전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은 우리의 상황에는 상관이 없는 듯 계속 흘러만 갔다. 우리는 모두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사색이 되었고, 절망하고 포기하는 얼굴들이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그럴 만 했다. 바다에는 어떤 배도 없었고, 바다 한가운데였기에 휴대폰은 조난신고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작동되지 않았다. 배에는 나침반도 없었다. 조난 신고를 위한 연막탄 총도 없었다. 그야말로 절망적 상황이었다. 이제 모두들 마지막 기도를 해야 할 때였다. 아니 모두들 마음속으로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입에서는 불안하고 부정적인 말들이 마구 터져 나왔다. 그 때 큰 수건 하나로 비바람을 막고 앉았던 내가 단호하게 그리고 비장하게 말했다. 이번 여행의 총책임자였기 때문이었다.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마세요!” 나는 상황보다도 그 상황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말을 바꿔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때 그 시간에 한마디의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말이 전체에게 영향을 줄 수 있고, 그런 모습에 배를 움직이는 필리핀의 젊은 두 뱃사람이 더 동요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우리 일행 중 아주 쾌활하게 분위기를 이끌었던 사모님 한 분이 나의 의중을 알아채셨던 듯했다. “무서워요. 그래도 ‘어휴 추워’는 되죠?” 농담을 던진 것이다. 사람들이 “와.”하고 웃었다. 분위기가 조금 나아졌다. 그렇게 농담을 계속 주고받으며 주위를 살폈다.

 

그 때 한 사람이 소리쳤다. “섬이다!” 우리는 모두 그 쪽을 보았다. 신기루일 수도 있었다. 비바람, 안개 속에서 한참을 보았다. 그리고 한두 명씩 섬이 보인다고 소리쳤다. 나는 맨 앞에 앉아 있었기에 볼 수 없었다. 앞에 앉았던 내게는 섬이 보이기는커녕 산더미같이 밀려드는 파도만 보였다. 보트 앞이 파도를 타고 밑으로 내려갈 때 재빨리 앞을 보았다. 분명히 아주 멀리 흐릿하게 섬의 윤곽이 보였다. 신기루를 의심하는 듯 보이던 선장이 그 섬을 향해 배를 돌렸다. 아주 천천히 파도를 오르내리며 배가 움직였다. 파도 때문에 바로 가지 못하고 때로 지그재그로 움직였다. 사람들은 배가 다른 곳으로 가고 있다고 소리치기도 했다. 그 때에야 해난구조선 한 척이 저 멀리서 달려왔다가 우리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3-40분이 더 지나자 섬은 아주 선명하게 보였고 드디어 그 섬의 해변에 도착했다. 그 섬은 약 3시간 전에 우리가 떠났던 바로 그 섬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고난과 탄식의 바다를 표류하다 원점으로 돌아왔다.

 

우리 중 몇 명은 ‘이 배 말고 다른 배를 탔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거기에 우리를 싣고 갈 다른 배는 없었다. 오직 하나 다이빙을 하러 온 배가 한 척 있었지만 그 배도 여의치 않았고 우리는 우리의 배로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얼마 가지 않아 우리의 목적지인 팡라오의 알로나비치가 바로 눈앞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이렇게 확실하고 가깝게 느껴지다니! 하늘은 하얀 뭉게구름이 흘러갔고 먹구름은 아주 멀리 사라져갔다. 날씨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화창해졌고 공기는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선원에게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으니 40분이 걸린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그렇게 아주 안전하게 아주 잔잔히 그리고 덤으로 얻은 생명으로 돌아왔다. 그 배의 선장은 주님이었다.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을 얻은 기쁨과 감사! 그것은 어떤 환희로도, 어떤 감사로도 다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그 누구도,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 생의 마지막 순간에 오히려 담대해진 마음, 두고 온 가족과 교회를 위한 기도 그리고 죽음의 바다에서 실제로 얻은 구원, 그리고 그 기쁨이 어떤 것인가를 뼈저리게 체험하는 세상에 없는 선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날 밤은 모두 일찍 잠들었다. 가장 포근하고 행복한 잠을...

 

다음 날, 우리는 무너진 교회들을 둘러보았다. 보홀 내에서 18개의 가톨릭 성당이 완파되거나 반파되었다. 모두들 400년이 넘는 건물들. 너무나 낡았지만 문화재이기에 쉽게 손댈 수 없었고 더구나 내진설계가 되어 있지 않은 큰 건물들이었기에 피해가 컸던 듯하다. 성 프란체스코가 들었던 음성이 기억났다. "내 교회가 무너져 간다. 내 교회를 세워라." 한국교회가 생각났다. 웅장하게 세워져가는 예배당 건물, 그러나 사람의 소리로 가득한 2천년 전 예루살렘 성전같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사라진 교회. 맘몬이 숨어들어 맘모스를 세우다가 부도나버린 교회들 그리고 이단들 손에 헐값에 고스란히 팔려나가는 예배당. 지진에 무너진 필리핀의 고색창연한 성당보다 더 가슴 아팠던 것은, 한없이 안쓰럽고 부끄러웠던 조난당한 배 위에서의 우리 모습이었다.

 

그 날 저녁 7시, 우리는 현지인 교회인 홀리게이트성결교회(TINAGO, DAUIS, BOHOL)에서 집회를 가졌다. 내가 어눌한 영어로 설교했다. 설교 제목은 ‘One Leper', 내용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겪는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문제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문제입니다.”였다. 미리 준비해 간 영문설교원고는 필요가 없어졌다. 지진과 태풍으로 전기가 끊겼고 차량 배터리에 선을 연결해서 아주 흐릿한 작은 전등 두 개만 설치해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부는 매우 어두웠으나 거기에 주님의 빛이 비취고 있었다.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사가 일었다. 한 명의 한센씨병 환자가 돌아와 예수님께 드린 감사의 마음이 바로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다음 날, 보홀 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세부로 들어오는 중, 항해를 거의 마칠 시간이 다가왔을 때 그 큰 배가 거의 넘어갈 정도의 너울에 크게 옆으로 누웠다. 모두들 놀라고 무서워했다. 그러나 나는 너울을 즐겼다. 이미 사선을 넘어 죽었다가 살아난 내게 두려움은 결코 내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고난의 바다에서 주님이 키를 잡고 계셨음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필리핀으로 떠나기 전 꾸었던 꿈의 현실화였다.

 

귀국 비행기를 타고 날아 착륙 한 시간 쯤 전, 새벽 5시가 가까워졌을 때, 문득 바깥 창문을 보았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곳에 참으로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빛으로 된 수평선이 보였다. 빛은 어둠을 뚫고 찬란히 빛났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태양이 하늘을 향해 떠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님은 깊고 어두운 바다 저 아래서 굴리고 단련하시며 죽음을 겪게 하시어 우리가 가진 믿음의 밑천을 드러내시더니 여행의 종국에는 하늘 이 높은 곳에서 천국의 빛을 비춰 주고 계셨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하고 고난은 믿음을 이기지 못한다. 어둠은 빛을 가둘 수 없고 고난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누를 수 없다. 하나님의 손은 고난 속에서 더 선명히 보인다.(끝)

 

박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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