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해양작품 감상문 우수원고' 채택 - 정승민 님의 ‘빙해항해를 읽고'

등록일2021-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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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 전’, ‘사보’, ‘서독’. 지나간 시간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는 단어들이 서두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다. 왠지 예감이 좋다. 내 친구들은 세월의 손때가 가득 묻은 글에 쉽사리 매료되곤 하는 내 모습에 학을 뗀 지 오래다. 그러면서 슬며시 툭, 내뱉는다. 나이든 이의 옛 무용담을 들어주는 것만큼이나 따분한 건 없다고.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단순히 온고지신 따위의 고리타분한 이유 때문은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못났던 순간을 들려주는 사람은 몇 없다. 대부분 자신의 인생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찬란했던 순간을 털어놓을 뿐이다. 다른 이의 추억 한 켠을 엿볼 수 있음에 감사하기도 하거니와, 미지의 영역을 알아감에 신비함을 느낀다.

 생각보다 글이 굉장히 잘 정돈되어있어 놀랐다. 사실, 글을 읽기 전 조금의 두려움이 덮쳐왔다. 나와 내 동기들은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 실습선에서 고작 2주 남짓의 시간을 보낸 것이 바다 경험의 전부일 정도로 지식이 일천했기 때문이다. 잘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는데, 정말 기우에 불과했다. 이따금 학교 과제로 중앙해양안전심판원의 해양안전심판 재결서를 분석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재결서가 안겨주는 수많은 정보에 정말 뇌가 멈춰버린 것만 같은데, 필자가 정말 필요한 정보를 추려내 독자의 이해를 도우려 안간힘을 썼단 사실이 글에 절절히 묻어난다. 그러면서도 수려하기보단 간결하고 명료히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것이, 온몸으로 “내가 선장이다”라 외치는 듯하다.

 다른 항해 서적과 달리, 글을 읽는 동안 정말 내가 필자에게 이입된 것만 같았다. 흔히 통념적으로 선장은 이런 상황에도 절대 동요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결국 선장 역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알지 못하는 위험에 뛰어들기 전 온갖 자료를 뒤져보며 결국 두려움을 느끼는 모습, 선원들의 생명을 걱정하는 모습, 제멋대로 동요하는 선수 때문에 마비되어버린 몸, 유유히 지나가는 타선에 얄미움을 느끼는 모습까지.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선생님, 그리고 선배들의 이야기를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긴 조금 어려웠다. 좌초나 충돌하는 꿈을 꿨다거나, 배가 너무 많아 선장님을 불렀다던가, 밤에 홀로 당직을 서며 온갖 잡념에 사로잡혔다거나…. 당연한 일이다. 실제 항해는커녕 시뮬레이터조차 경험하지 못한 탓이다. 2학년으로 진급하고 RADAR & ARPA 수업을 들으며 처음 시뮬레이터를 경험하자마자 무지했던 작년의 나를 책망했다. 비록 실제 항해에 나서는 선배 항해사들의, 선장님들의 그것에 비교할 바 있겠느냐마는, 내 행동 하나하나가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단 걸 깨달았다. 성적이 좋다는 이유로 조원들에게 떠밀려 선장 역할을 맡았는데, 시뮬레이터 BRIDGE에 들어갈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내 우유부단함이 배를 좌초로, 충돌로 몰고 갔고, 내 실수 하나로 조원들의 성적까지 함께 결정 난다는 사실에 엄청난 부담을 느꼈다. 우리 조의 사고 장면이 스크린에 띄워질 때면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나, 정말 배 몰아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처음엔 힘들기도 많이 힘들었다. 사고가 날 때면 마음고생도 많이 했다.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을지 고민도 해봤다.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계기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수많은 사고에 무뎌져 가며 ‘어떻게든 되겠지’란 생각으로 내 주관을 지켰다. 내가 내 의견을 확신했으니 선교팀 내에서의 의사결정도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그렇게 자신감을 찾았고, 그다음부터는 시뮬레이터 수업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물론 고작 시뮬레이터에 의지해 점수에 연연했던 내 경험과 한배를 탄 사람들의 생명을 책임져야 했던 선장의 경험은 결코 비할 바가 못 된다. 저 조그마한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시행착오를 반복했고,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Near Miss를 거쳤으니 위험천만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면서, 리더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필경 이 글을 남긴 선장 역시 난생처음 겪는 위기에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이 배가 주위의 얼음과 함께 얼어붙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살아나갈 수는 있을지, 사고 후 조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러나 아제리아호는 무사히 항해를 끝마칠 수 있었다. 비록 필자 본인은 빙해 지역을 항해하면서 자연의 위력은 인간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한다는 사실을 느꼈다며, 자연에 겸손히 순응하라며 너스레를 떨고 있지만. 무사히 빙해 지역을 항해할 수 있었던 건 위기 상황에서 책에서 배운 지식을 떠올린 선장 덕분이요, 엄습하는 공포감 속에서도 평정심과 결단력을 잃지 않은 선장 덕분이다.

 다시 배로 돌아갈 일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곧 다시 실습 항해사 생활을 시작할 것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3등 항해사로 바다를 누비게 될 것이다. 발만 담가봤던 바다를 이제 내 삶의 터전으로 삼아야 하는 이 시점에서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리고 항해사로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 마치 이정표처럼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무용담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자각하지 못했다.

 소중한, 그리고 자랑스러운 자신의 경험담을 글로 전승해준 필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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