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학'이 말하는 것

등록일2020-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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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학이 말하는 것

 

 

13, 14, 15세기에 동남아시아 해역에서 일본의 해양활동이 있었다. 히데요시의 사망과 함께 임란이 종료되고 정권을 잡은 이에야스 정권이 주인장 무역으로 동남아 해역에 배를 띄운 것은 17세기의 일이다. 네덜란드 상선이 나가사키 앞바다의 인공섬 데지마에 상관을 두고 무역을 한 것은 그 이후이다. 이때 시대에 깨어난 일인들이 있었다. 주로 통역관과 의사들이었는데 이들은 상관에서 유입되는 문명 기기들과 외과수술에 필요한 정확한 신체해부도에서 그 동안 그들을 지배했던 중화문화의 허구를 발견하고 새로운 문명의 도입을 자각했다. 그들은 가장 먼저 네덜란드로 표방되는 유럽 문명의 각종 서적 번역에 매달렸다. 이것이 당대에 유행했던 바로 난학(‘난’은 네덜란드의 한자표기 ‘화란’의 ‘란’의 두음법칙 음)이라는 학문의 출발이다. 원서를 번역하기 위해서는 문자를 해독해야 한다. 이 문제는 맨발로 히말라야 산을 오르는 것만큼 무모한 일이었다. 알파벳이라는 문자는 그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난학자들의 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문화, 문명, 예술, 과학, 이런 말들은 그때 생겨난 말들이다.

 

물론 난학이 일본의 개국 근대화와 직결되지는 않는다. 네덜란드와의 교역이 중단된 후 일본도 쇄국의 잠을 자고 있었다. 그렇지만 조선의 개국은 실패했고 일본의 개국은 성공했다. 왜 그럴까? 약 20년의 차이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일본이 서구 열강 앞에서 빗장을 열어야 할 때 난학에서 발원한 지식층이 있었다. 그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많은 인재들이 근대 문명을 찾아 유학을 떠났다. 바다 저 멀리로 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다와 관련이 있었다. 바다 없이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뒷날 조선을 삼키고 대륙으로 뻗은 후 종국에는 열대 남태평양 해역과 군도를 장악한 일과 잘 연결된다. 동남아시아의 해항들과 주인장 무역 또는 이 지역에서 그 이전부터 있었던 교역, 그리고 나가사키 상관의 저 풍요로운 네덜란드 선원들이 전하는 열대 해역의 풍요로움에 야망의 손을 뻗친 일본이었다.

 

이 모든 주장의 주요 참고문헌은 ‘난학의 세계사’ 또는 ‘난학사시’이다.(심호섭, 홈페이지 편집인)

 

* 난학의 세계사, 이종찬, 2014년, 알마출판사

 

* 난학사시, 스키타 겐파쿠, 이종찬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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