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양의 꿈 1956

등록일2020-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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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양의 꿈 1956’ 서문

 

 

내 어릴 적 1960년대, 70년대에 학교를 다니면서 이런 말을 곧잘 들었다. “영국의 어머니들은 식탁에서 자녀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얘야, 이 빵을 어디서 가져왔니? 이 빵의 재료인 밀은 우리 선원들이 생명을 걸고 저 험한 파도를 헤치며 배로 실어 날랐단다. 선원들에게 감사해야 한다.”라는 말. 당시는 우리 경제가 막 일어설 때여서 전 국민적으로 국산품 애용 운동이 확산되었고 정부는 ‘오직 수출만이 살 길’임을 부르짖었으며 자연히 해운입국이란 표어도 생겨났다. 그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해운계 대학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선원이 되었고 언제부턴가는 선원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까지 다니고 있다.

 

해운계의 물을 먹으며 살아온 지 어언 40여 년(학생 시절부터 치면), 돌이켜보면 감회가 적지 않겠지만 유감이 있다면 우리 사회가 갖는 뱃일과 선원에 대한 인식이다. 그동안 현대화가 많이 진행되어 한국 사회는 문명화된 겉모습과 함께 사람들의 의식도 그에 걸맞게 변화되었지만, 대양을 건너며 물류를 수행하는 선원에 대한 인식은 아직도 중세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내가 해운계에 발을 디뎌 놓으면서 지금까지 시종일관 느껴 온 불만이다.

 

그럴 때 떠올랐던 생각은 주로 어릴 적 학교를 다니면서 배운 영국 어머니가 자녀에게 가르친 ‘해양 잠언’이었다. “얘야, 이 빵을 어디서 가져왔니? 언제나 선원들에게 감사해야 한다.”라는 말. 매우 간단한 말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나는 이 영국 어머니의 말씀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의문스러웠다. 사실 사회 속의 개인들이 살아가는 데에는 빵 말고도 다른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필요하며 그런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역할도 중요할 텐데 특별히 선원만이 이렇게 받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의문이 증폭되자 나중에는 영국의 어머니들은 과연 식탁에서 식사를 하기 전에 자녀들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드는 것이었다.

 

한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부흥하면서 언제부턴가 학교에서는 국산품 애용이란 구호와 함께 해운입국 표어도 사라졌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언제부턴가 영국 어머니의 해양 잠언에 대한 나의 의문 의심도 가라앉았고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고 세월이 많이 흘렀다. 2012년 여름, 나는 아내와 함께 독일 베를린에서 미술 유학 중인 두 아들을 만나러 갔는데 간 김에 영국 런던을 들러 ‘영국국립해양박물관’을 관람하는 기회가 있었다.

 

대항해시대에 진행된 영국의 해양 개척 활동 유적을 풍부하게 간직하고 있는 영국해양박물관은 런던 교외에 위치하고 있고 주변의 넓은 대지에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어 하루 여정으로 다닐 만한 명소이다. 입장권을 구입하고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번갯불에 맞은 듯 꼼짝도 않은 채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안내 데스크에 앉은 안내원의 뒤로 벽에 대형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그것을 본 순간 나는 아,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것은 대항해시대에 인도로 떠나는 상선의 선원들과 환송하는 부두의 가족 지인들의 이별을 묘사한 사실화였다. 갑판 위의 선원들은 뱃전 아래 환송객을 향하여 모자를 흔들고 있었는데 얼굴 표정은 밝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슬픔이 깃들어 있었고, 부두에서는 회사의 직원들과 항만 관리들이 비교적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며 가족인 듯한 사람들은 매우 애절한 눈빛을 던지며 손수건을 흔들고 있었다. 이보다 더욱 나의 시선을 붙잡았던 것은 그림의 하단에 위치한 어린 아들을 품은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근대 초기 영국의 인물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앞치마를 두른 가정주부 차림의 어머니는 눈빛으로 아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아들아, 이 빵을 어디서 가져왔니, 선원에게 감사해야 한다, 이렇게.

 

오랜 시간 갇혀 있었던 ‘영국 어머니의 말씀’에 대한 나의 의문은 모두 풀렸다. 그러고 나서 나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았다. 한때 외쳐지던 ‘해운입국’이라는 구호는 왜 들리지 않는 것일까? 해운강국, 바다가 땅이다, 라는 말도 유행했는데. 우리는 과연 해양 국가인가? 만약에 그렇다면 해양 국가란 무엇일까? 해양의식 해양 사상이 부재한 해양 국가, 무엇이 문제인가? 이런 의문들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한국 경제 발전기에 국가 기간산업 중의 하나인 해운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출에 국가의 명운을 건 당시 정권의 정책과 국민의 호응에 해운이 필수 요소였다는 사실 외에도, 해상 운송의 최일선에 선 해외취업선원들이 벌어들인 막대한 외화가(그들은 오랫동안 가정을 떠나 막막한 바다 위에서 파도와 싸우며 일을 해야 했다) 제조업으로 상품을 만들어 수출을 하려 해도 자본이 없어 공장을 못 짓는 한국 경제의 현실에 목마름을 적시는 단비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대한민국 국가 성립 초기에 우리에게도 해양 사상이 존재했다. 1945년 광복 이후부터 1960년대 말까지 해기교육기관과 해운 기업, 해상의 승선 직무에서 해기·해운인들에 의해 진행된 ‘해양 의식화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시기에 해운은 국가를 구성하는 중요한 지체들 중의 하나였기에 ‘해운’의 명령은 곧 국가의 명령이었다. 그러므로 대양을 건너는 수많은 해상 운송인들이 거친 파도와 가정과 사회를 떠난 외로움과 기본 근로시간을 훨씬 넘는 중노동을 견디면서 개인의 행복보다 사회와 국가의 앞날을 먼저 생각했다. 그들은 바다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건 강력한 해양 사상으로 무장된 개척자들이었다.

 

이 글은 그러한 해양 개척기에 해기전문인들, 그중에서도 현재 한국 해운의 기초를 세운 해운 1세대의 삶과 그 사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들 중 지금 생존해 있는 분은 거의 없다. 이 글은 한국 해운사의 측면에서 볼 때 한국 근현대 해운 개척사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부분과 관련하여 여러 저작물이 이미 나와 있고 나는 그 저작물을 주로 참고하여 재구성, 기술했다, 그러므로 독자 여러분들께서는 이 시대에 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 같은 것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나의 바람은 오직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해운 개척자들의 삶과 해양 사상을 일반 사회에 알리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글의 흐름에 있어서 다분히 서사 구조를 채택했고, 사실에 대한 원인 규명과 결과 분석이 없는 부분에서는 추론 추정이 없지 않았음을 미리 밝혀 둔다.(심호섭, ‘대양의 꿈 1956’ 필자)

 

 

<대양의 꿈 1956>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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