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해양사'에서 - 해양문화의 특성

등록일2021-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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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의 특성

 

 

우리가 흔히 해양문화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육지문화와는 사뭇 다르다. 바다 한가운데나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과 육지 한가운데의 내륙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같을 수가 없다. 그들이 마주보고 대하는 자연과 풍토도 다르고, 자연현상이나 자연물에 대한 인간의 감정과 태도도 다르다. 또 전쟁을 치르는 방식도 다르고, 더욱이 획득한 물건을 나누는 방식도 전혀 다르다. 생산하는 방식과 분배하는 방식이 다르니 통치하는 방식이 다를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육지인의 시각을 근거로 해양문화를 보고 해석하거나, 해양민들을 대하면 적지 않은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즉 해양문화와 역사상을 이해하는 데 육지와 농토에 터를 잡고 정주적 성격(stability)을 가진 농경민의 인식과 생활방식으로 해석하면 무리가 뒤따른다. 해양민 혹은 해양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구어낸 역사를 이해하고 역사상을 만들어내는 데는 몇 가지 전제해야 할 사실들이 있다.

해양문화의 특성을 살펴보면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그들은 자체의 세력들로 정치력을 행사하려는 호족성이나 중앙정부에 귀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려는 무정부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해양민들은 어디에 소속되지 않고, 또 지역적으로도 한군데에 침착하게 머물러있지 않기 때문이다. 살기에 행동하기에 적합한 지역을 선택하여 중심거점으로 삼고, 필요에 띠라 수시로 이곳 저곳으로 이동하면서 활동하는 거점성을 갖고 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고대는 해양활동을 하고 해양교류를 하는 데 필수적인 항해술과 조선술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조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거기다가 해양환경은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 다른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해류·조류·계절풍 같은 자연조건은 문화가 만들어지는 데에도 즉각적인 영향을 끼친다. 즉 문화가 만들어지는 틀과 성격이 영향을 받는다. 무한히 넓어 보이는 바다에도 길이 있다. 물론 육지처럼 폭이 좁고 사람이 반드시 그 길에 맞춰서 다닐 필요는 없지만 분명히 길은 있다. 오히려 특별한 경우에는 더 철저하게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하게 불편한 것이 아니라 갈 수 없다거나 심지어는 죽음을 불사해야 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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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일본열도 혹은 쓰시마에서 한반도로 들어오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죠오몽 토기들이 부산 동삼동() 바닷가와 울산 서생포(西) 등에서 발견된 사실들, 그 외에 왜()의 침입이 초기에는 주로 신라에 집중되는 것은 해조류의 흐름과 계절풍의 영향 때문이다. 영산강 유역 등은 일본열도에서 낯선 세력들이 진출하기에는 무리한 면이 매우 많다. 이러한 해양교류의 지역성은 문화의 전파 및 교류는 물론 정치세력의 형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해로, 수로 등 교통로의 확보를 위한 각국들간의 갈등은 해양교통의 특수성 때문이다.

이처럼 특정한 지역, 즉 해양거점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세력은 교역의 중개지 역할은 물론 교역의 성격, 교역로, 교역품 등의 관리 및 통제기능을 한다. 때로는 국가간의 정치교섭에마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자란 해양세력들은 기본적으로 육지와 달리 중앙에서의 통제가 용이하지 않다. 생활방식, 즉 문화 다르기 때문에 마찰이 일어날 소지가 많고, 자연스럽게 경원시한다. 또한 문제가 생겨 중앙정부가 토벌하려고 할 때면 그들은 배를 타고 바다 멀리 도망가거나 다른 데로 가버리면 된다. 심지어는 먼 섬이나 중국, 일본 등으로 도망갈 수도 있다. 물론 육지의 중앙세력은 이를 뒤쫓아올 수 없다.

또 이들을 육지로 몰아놓고 토벌하려고 배를 동원해도 물길을 알 수 없으므로 전혀 접근이 안 된다. 오히려 그들에게 공격당하면 쉽게 궤멸된다. 그러니 그들이 중앙정부에 쉽게 복속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 그들은 대부분 물길, 즉 해로의 요충지를 무대로 활약하기 때문에 교통세라든가 또는 교역을 하면서 부를 축적할 수 있다. 그러니 경제적으로도 부유하고 군사력도 갖추었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호족이 되는 것이다. 해양세력들이 호족적 성격을 띄고, 무정부적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해양문화의 메커니즘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둘째, 해양문화는 모방성, 공유성이 강하다.

해양에서는 다른 지역이나 나라, 문화간에 교류가 빈번하기 때문에 주변 문화와 공질성()이 많다. 농경문화는 꼭 정해진 지역에 거주해야 한다. 떠나는 것을 법으로 급하고 있다. 거기다가 속성상 안정성(, Stability)을 추구한다. 반면에 해양문화와 유목문화는 역동성을 가지고 이동과 교류를 하는 경향이 있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서 말을 달리는 유목민들은 다니면서 여러 사람을 만난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와 종족이 다르고 종교도 다르고, 같은 것이라고는 초원에서 산다는 것뿐인 온통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이런 다른 것을 만나고 이들에게 배울 것을 철저하게 배운다. 초원에서 살아가는 것만은 그들 모두에게 주어진, 결코 고개를 돌린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 숙명이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나은 것을 보면, 또 나은 것을 생각해내고 찾아내면 그대로 흉내내서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낸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생활하는 방식이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해양민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속도가 유목민들보다는 느리고, 영향이 적지만 그래도 역시 서로 모방하는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해로를 이용하여 문화를 교류하고 교섭()할 때에는 모두 동일한 해양을 공유한다. 그런데 바다에는 선을 그을 수가 없고, 담장을 쌓을 수도 없다. 그래서 국경이 분명하지 않다. 또 다른 나라로 가고자 할 때에도 육지처럼 인접한 국가의 영토를 반드시 통과해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정치적으로 제약이 훨씬 덜하고, 교류가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또한 해류, 조류, 바람, 해상조건 등이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이므로 해양민들 사이에는 기술과 경험의 공유하는 일이 서로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기술 모방을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사람들간의 교류가 필요하다. 또한 정치적으로 지리적으로 아주 다르고 또 멀리 떨어진 지역간에도 바다를 항해하여 교역이나 문화적인 교류를 충분히 할 수 있다. 수백㎞는 물론 수천㎞를 아무렇지 않게 항해하는 것이 해양민들이다.

그러니 황해나 남해 같은 지중해적 혹은 내해적인 성격을 가진 바다에서는 각 연안지역들간의 교류가 육지보다도 더 활발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도 부지런히 오고가고, 물자들도 서로 바꿔가면서 배울 것은 배우는 것이다. 특히나 배를 만드는 기술이나 항해하는 방법 등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배워야 한다.

양 나라의 해안지역에서 사용된 뗏목이 매우 유사하거나, 가야고분과 규슈의 니시도바루(西)고분 같은 유적에서 나타난 고대선박이 비슷한 것은 해양문화의 특성과 활발한 교류의 결과이다. 동아시아가 해양을 매개로 활발한 교통이 이루어졌고, 공통의 문화권이 형성되었다는 견해는 많이 있다. 신화나 설화가 유사하다는 점을 논리적인 근거로 삼으면서 주장하기도 한다.

셋째, 해양문화에서 전파하는 일과 이동하는 일은 비조직성을 띠고 있다. 육지에서는 대규모의 보병이나 기병을 빠른 시간에 이동시킨다. 그렇게 해서 정치적으로 점령하고, 문화를 강제적으로 이식시키는 일이 가능하다. 초원에서 일시에 거대한 유목제국이 출현하는 것은 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또한 목적이 분명하면 지속적으로 진출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래서 초원의 유목민들이 늘 중국의 화북지방으로 공격해 들어가고, 그 곳에 정복왕조를 세우는 것이다.

반면에 해양교섭은 몇 가지 면에서 한계가 있다.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야 한다. 기술이 필요하고, 규모가 유목민이나 농경민에 비해 소규모이고, 또 비조직적이다. 그뿐만 아니라 불규칙적이어서 연속적이지 못하다. 그러므로 정말 대규모의 인원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이동하는 일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삼국시대에도 초기에 보면 한일 양 지역에서 국가단위의 진출이라든가 혹은 대규모의 군사이동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인들의 침입 숫자를 보면 규모가 매우 적다. 니시도바루 고분에서 발견된 선박을 가지고 추정하면 당시 선박의 승선인원은 20명 남짓으로 판단된다. 한반도에서 일본열도 진출은 역사적 환경으로 보아 보다 나은 조건이지만 그래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해양은 민간인들이 중앙 정치세력에 예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교역의 추진과 이주를 가능하게도 하였다. 한편 해양문화의 전파나 수용은 인간과 집단의 의지()의 소산인 경우도 있었지만, 반대로 우발적이나 수동적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적지 않다. 그것이 해양문화다.

넷째, 해양문화는 불보존성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역사라는 것은 늘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또 역사학이다. 그런데 해양문화는 그 자신의 행적과 성격에 대해서 기록이나 유물 등 흔적을 남기는 경우가 드물다. 우선 그 담당자가 중앙이나 지방의 관리이거나 또는 실력자가 아니다. 해양을 무대로 활동하는 해양민이거나 지방세력일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스스로 기록을 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한편 유물이나 유적도 육지에서는 어딘가에는 그 조각이라도 남게 마련이지만, 바다에서는 남기는 유형문화가 적을 뿐더러, 설사 있었다 해도 바닷속에 가라앉아 흔적을 확인하기 어렵다. 특히 우리나라는 동해는 수심이 너무 깊어 유물조사 자체가 불가능하고, 서해는 수심이 낮은 반면에 물길이 복잡하고 뻘층이 두터워 인양이 어려우며, 보존 상태도 나쁘다.

중국 지역에서는 요동반도와 압록강 하구유역 등에서 선사기대 선박유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는 우리보다 조사하고 발견하는 조건이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양문화의 기본인 불보존성의 특성을 감안하지 않고, 기록과 유물이 없다고 해서 해양문화가 부재했거나 발달하지 못했다는 식의 역사 해석은 곤란하다.

이러한 몇 가지 전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경시할 경우에는 고대의 해양 역사가 어떠했는지를 이해하는 일은 물론 문화를 해석하는 데에도 상당한 혼란을 초래한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해양문화의 특성 (한국 해양사, 2014.3.31., 윤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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