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계(臨界)

등록일2020-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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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臨界)

김연식 ㅣ 중앙상선 2항사

 

 

‘임계(臨界)’라는 말이 있다.

사물이 구분되는 한계라는 뜻인데, 비슷한 뜻인 한계(限界), 분계(分界), 경계(經界)와 말맛이 다르다. 주로 ‘임계점’이라는 말로 쓰인다. 댐에 물이 가득 차서 한계수량에 다다른 상태, 그래서 물을 한바가지만 더 부어도 와르르 무너질 지경을 말한다. 물리학은 임계를 모래산으로 설명한다. 댐의 비유와 비슷한데, 모래를 한 알씩 떨어뜨리면 산처럼 쌓이다가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진다. 불안한 에너지가 잔뜩 쌓인 상황에 떨어진 마지막 모래알 하나가 생각지도 못한 큰 사건을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 모래는 그저 모래알 하나일 뿐, 이미 임계점에 있으니 다른 무엇이라도 모래산을 무너뜨릴 수 있다. 댐이나 모래산뿐 아니다. 전쟁이나 사고, 지진 등 세상 모든 사건은 에너지를 임계점까지 쌓다가 한꺼번에 터진다고 물리학은 설명한다.

임계의 가벼운 예를 들자면 이렇다. 배에 내구한계에 이른 오래된 의자가 있는데 하필 내가 앉는 바람에 톡 부러질 때, 해치커버를 여는데 그간 조금씩 낡아오던 유압실린더가 하필 내가 조작하니 터질 때, 전임자들이 방치해놓은 하수구가 하필 내가 사용할 때 막히는 경우처럼 우리는 임계점을 조금 억울하게 경험한다. 당연히 낡은 의자가 부수어진 게 내 탓이라거나, 내가 미숙해서 유압실린더를 터뜨렸다고 누가 말하면 조금 억울하다. 그건 주로 시간의 탓이지 오로지 내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임계에 다다랐음을 경계하지 않은 게 탓이라면 탓이다.

 

임계가 이렇게 억울하기만 한 건 아니다.

얼마 전에 2등 타수가 갑판에 넘어졌다. 안전한 계단을 놔두고 둥근 파이프라인을 밟고 넘어가다 미끄러진 것이다. 다행히 부상은 크지 않았지만 타수는 열흘이 넘도록 허리에 파스를 달고 살아야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다른 선원들은 서로 주의를 당부했다. 가만 보니 일상에 젖은 선원들은 안전의식을 점점 잃고 있었다. 귀찮아서 안전모를 안 쓴다거나 일을 빨리 마치기 위해 위험한 곳으로 가로질러가는 일이 태반이었다. 안전의식이 무너지는 임계에서 타수가 가벼운 사고를 당했고, 그 덕에 선원들은 경각심을 회복했다. 이후 선원들은 안전장구를 빼먹는 일이 없었다. 당연히 사고가 더 일어나지도 않았다.

 

임계는 ‘기폭제’라는 말과 얽을 수 있다.

흔히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총성 두 발이 1차 세계대전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전쟁의 책임이 전적으로 암살자 가브릴로 프린치브에게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당시 발칸반도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였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종교갈등, 슬라브족과 게르만족의 민족갈등, 발칸반도에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오스트리아의 야욕, 유럽으로 진출할 구실을 찾던 러시아, 식민지 이해관계를 둔 각국의 대립, 치열한 열강들의 경쟁, 동맹을 중심으로 한 세력형성 등 당시 이 지역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가스와 산소가 적당히 차있을 때 작은 스파크 하나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듯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의 전쟁이 일어났고, 이해관계가 얽힌 각 나라들이 차례로 참전하면서 도미노 넘어지듯 줄줄이 전쟁이 확산했다. 총성은 분노의 에너지로 가득한 발칸에 기폭제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황태자에게 총을 쏜 암살자의 죄는 과연 어디까지 일까. 그에게 1차 세계대전 전체 희생자의 원망을 돌릴 수 있을까. 사라예보의 총성이 세계대전을 낳았다는 말은 극적 인과를 위한 수사일 뿐이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년이다.

물리학의 설명처럼 이 사고 역시 불안한 에너지들이 누적된 와중에 스파크가 터져서 발생했다. 안전에 대한 만성적 무관심, 업계의 유착, 관제실의 안일함, 회사의 관습, 이윤과 안전을 맞바꾼 탐욕, 선장과 선원의 태만 등 여러 조건이 모여 화약고를 만들었다. 임계의 모래산을 떠받친 이 모든 게 참사의 공범이다. 그렇기에 누구든 마지막 모래알이 될 수 있었고, 당시 선장이 꼭 이준석씨가 아니어도 사고를 낼 수 있었다. (물론 승객 구조 여부는 별개다.)

당장 모든 국민이 공범이다. 이렇게 참사가 일어난 원인 중 하나는 “나만 아니면 돼”라는 의식이 아닌가. 그간 우리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공공연히 허락해왔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1박2일>을 보면서 벌칙을 정하는 강호동이 “나만 아니면 돼”라고 말할 때 깔깔거리고 웃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었는가.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용인하고 심지어 웃어넘기는 사이, 우리는 각자의 무의식에 불안한 에너지를 보태고 있었다. 그 결과 어떤 일부는 제 책임을 다하지 않고 혼자만 살아나오지 않았는가. 그 많은 학생과 승객을 남겨두고 말이다. 이런 배경을 살피고 나면 세월호 사건을 “단순한 교통사고”라고 말한 정치인의 지적 수준이 얼마나 유아적인지 알 수 있다.

 

댐은 거듭 무너질 수 있다.

사라예보의 암살자를 처벌하고 마지막 모래알을 탓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 이준석 선장의 형량보다 관심 가져야 할 게 분명히 있다. 세상 만물은 늘 임계를 향해 에너지를 모으고 있고, 우리가 각성하지 않는다면 누구의 실수로든 댐은 거듭 무너질 수 있다. 지금 누가 어디서 모래산을 쌓아 올리고 있지는 않은지, 댐의 물이 한계수위에 차도록 무관심한 사람은 없는지, 그리고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이 공공연하지 않은지 살펴보고 반성할 때다. 1년이 넘도록 차가운 바다에 가라앉은 세월호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 자료출처 : <월간 海바라기> 2015년 4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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