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9월 1일

등록일2020-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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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9월 1일

김구홍(前 선장)

 

1983년 9월 1일. 김 선장은 리베리아 선적 6천톤급 화물선 ‘아나토리아’를 몰고 동해 북단, 함경북도 청진, 나진 앞바다를 멀리하고 소련(현 러시아) 연안을 치켜 올라가는 항해를 지속하다가 갑자기 해안선이 움푹 들어간 아메리카만 안에 깊숙이 숨어있는 나흐드카 항구 제26번 부두에 접안했다.

경이롭게도 북한 외화 벌이 벌목공들이 기차 화물 칸 외판에다가 한글로 휘갈겨 쓴, 고향이 그립다느니 몸 건강하게 잘 있다는 낙서 글귀를 지우지 않은 그대로, 시베리아에서 실어 보낸 서까래만한 크기의 원목과 함께 나흐드카 부두에 도착해서 본선 화물이 되었다.

요즈음 며칠째 구름이 잔뜩 낀 음산한 날씨가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어 심신이 울적 산란했다. 이른 새벽, 반달 모양새보다 가운데가 조금 더 패어져서 헐렁한 갈고리달이 검은 구름 사이로 하얗게 웃고 있기에 잠시간 께름칙한 기분을 그나마 추스를 수 있었다.

상륙 선원 여덟 명의 귀선을 자정 전에 최종 확인하고 나서 취침 했는가 싶었는데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어리마리 하다가 새벽 같이 눈이 떠졌다.

예정대로 아침 6시쯤에 제2선창이 만재되어 데릭 기중기로 무거운 철판 덮게(폰툰)를 덮는 마무리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는 보고를, 당직 사관인 일등항해사로부터 받았다.

조반을 마친 후 잠시간 짬을 내서, 본선 꽁무니에 바짝 붙여 계류되어 있는 파나마 선적 메리온호에 마실을 갔다.

그 당시만 해도 소련은 공산주의 종주국인데다가 우리나라와는 국교가 트이지 않아 선원들의 행동에 제약이 엄했으나 선장에 대한 예우는 생각 외로 각별해서 별 불편 없이 자유롭게 이웃 나들이를 할 수 있었다.

메리온호의 선장과 기관장은 일본인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한국 통신장과 갑판장을 반갑게 만나 수인사를 나누고, 식당으로 안내받아 한창 환담이 무르익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식당문을 화급하게 밀치고 들어온 조리장이 몹시 당황한 말투로, 한국에 전쟁이 터졌다고 황당무계한 호들갑을 떨었다.

대한항공 747 점보 여객기가 손님 240명과 승무원 29명을 태우고 미국 JFK 공항을 떠나 캐나다 앵커리지 공항에 기착하여 한 시간 반 동안 급유를 마친 뒤 소련 땅 사할린 영공을 경유하는 안전 항로를 따라 비행 중이던 9월 1일 오전 3시 23분경, 고도 3만5천 피트로 상승한다는 통신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9월 1일 오전 6시에 무사히 김포공항에 안착해야 할 비행기였으니까 전쟁이 아닌 난리가 난 것은 당연지사로 괜한 풍문은 아니었다.

퍼뜩, 북괴 집단에서 공중 납치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부쩍 들기도 했다. 커피를 대충 대접 받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급히 본선으로 돌아와 곧장 통신실 라디오 앞에 바짝 매달렸다.

몇 달 전 벙커시유 기름을 싣고 본 항구에 기항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소형 태극기 페넌트를 선원 회관에 기증해서 기념품 코너 벽에 걸어놓았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선원회관을 방문 했던 한국 선원들이 난데없이 뜻밖에 나타난 태극기를 발견하고 반가움은 물론 기이하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고, 공산주의 맹주국인 소련에서 대한민국 태극기를 만날 줄 생각도 못했다며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며 설왕설래 하더라고 메리온호 통신장이 자랑스러운 듯 전해줬다.

사실인 즉슨, 김 선장이 나흐드카항 선원회관을 처음 방문했을 때, 회관 입구에 장식용으로 만국기가 그려진 아치형 고정 현수막에 북한 기는 나란히 끼어있는데 태극기가 빠져 안 보이는 것을 보고나니까 어째 심사가 영 꿀꿀해져서 회관 매니저에게 불편한 심기를 털어놨다. 소련 매니저는 의외로 긍정적 반응을 공손하게 보여주며 오히려 한국 국기가 있으면 기증해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옳다구나 쾌재를 불렀다.

김 선장이 송출선 승선 차 김해공항에서 출국할 때 웨스턴 회사로부터 기여받은 태극기 페넌트를 오래 동안 침대 머리맡에 소중하게 걸어둔 것을 선원회관에 흔쾌히 선사했던 사연이다.

북한 영사관이 선원회관 지호지간에 도사리고 있어 자칫 조심스럽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는데 몇 해가 지나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북한 영사관 직원이 선원회관 기념관에 걸려있던 태극기를 무단으로 회수해 갔다고 한다.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그 망나니 심보치고는 도시 말려도 소용 불가하다.

9월 1일 13시. 계속되는 라디오 뉴스에서는, 대한항공 여객기가 다행스럽게도 소련 영토인 사할린 어느 비행장에 강제 착륙 당했으나 승객, 승무원 모두가 무사하다는 믿을만한 정보가 미국 CIA로부터 날아왔다는 낭보였다.

그리고 조중훈 대한항공 사장이 전세기를 타고 일본 북해도를 경유해서 사할린 사고 현장까지 들어가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국제민간항공협회 차원에서는 승객, 승무원과 기체를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송환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본선이 접안해 있는 제26부두에서 바다 쪽으로 약 200미터 거리에는 크고 작은 군함들이 웅크리고 있는 해군 기지가 있었다. 기지 끄트머리에 방파제 등대가 홍등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원목 부두와 해군 기지가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한 겹 철조망으로 경계를 갈라놓았으나, 엉성한 철조망 사이로 함정들의 동태를 빤히 살펴볼 수 있었다.

아침나절이었다. 조타실에 올라가서 화물 적재 작업 현황을 살피고 있노라니까, 소련 신예 구축함 두 척이 외항 묘지에서 닻을 걷어 막 출항하고 있는 와중에 중무장한 쾌속정이 구축함과 기지 사이를 빈번히 왕래하고 있는 현상이 왠지 심상치 않게 보였다. 아무래도 대한항공 747 여객기 실종 사건과 연관이 되는 징조 같기도 했다.

한편, 앞대가리가 거의 몸체 길이만큼 불쑥 튀어나온 전투기 편대가 무시무시한 굉음을 번개 치듯 뿌리며 사할린 하늘 쪽으로 사라지는 모습도 어김없이 군함의 출동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 같았다. 뭔가 음험한 분위기가 감돌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1일 17시. 소련 외무성에서 대한항공 747 여객기의 사할린 강제 착륙설을 완강하게 부인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 언론에서는 대한항공기가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격추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비관적인 보도를 하고 있어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여객기가 공중 폭파됐을 거라는 쪽으로 여론이 기울고 있었다. 그런 경황에서도 일말의 가냘픈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여객기에 같이 탑승하고 있는 미국 하원의원의 보좌관이 미국에 남아 있어 국무성을 뻔질나게 들락거리며 얻어낸 정보에 의하면 사고 여객기가 소련 영토 내 어딘가에 불시착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에서는, 소련 구조 비행기들이 추락한 여객기 잔해를 수색하고 있는 중이라는 참담한 뉴스도 뜬금없이 들려왔다.

아무튼 269명의 소중한 인명이 무사하기만을 간절하게 빌 뿐이었다. 아직까지 종잡을 수 없는 뉴스만 난무하고 있기 때문에 좀 더 시간이 지나봐야 사고 실체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1일 18시 30분. 본선 각 침실에 흩어져 있는 읽을거리 책 20여 권을 모아서 메리온호와 바꿔 보려고 통신장에게 맡겼더니, 본선 현문 경비병한테 퇴짜를 맞고 맥없이 돌아왔다. 통신장이 챙겨간 책을 매 권마다 책장을 일일이 들춰가며 샅샅이 검사를 마친 후 상부에 보고를 하고 나더니 반출 불가 명령이 떨어졌다고 했다.

1일 19시30분. 한국 문공부 장관의 공식 발표가 나왔다. 대한항공 747 여객기가 사할린 상공에서 제3국의 공격을 받고 바다에 추락한 것으로 사료된다는 애매모호한 요지였다. 거의 같은 시간에 일본 자위대 발표로는, “발견! 발사!” 라고 다급하게 외치는 소련 조종사들의 교신 내용이 감지되었다는 뉴스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건가? 이와 같은 충격적이고 절망적인 비보를 접하고 보니까, 우리나라 정보망이 허술하다 못해 무기력한 데 대한 답답한 분통을 가눌 수가 없었다.

이러한 소련의 만행은 필시 대한항공 여객기의 평상시의 행적을 주도면밀하게 추적 관찰했던 소련 당국이 어떤 음모 작전에 따라 자행된 필연의 결과인 듯하다. 게다가 하필 왜 그 시점에 747 여객기는 항로 이탈 비행을 계속 했었을까? 결국 저들에게 절호의 기회와 빌미를 제공해 준 꼴이 되고 말았다.

그 당시의 소련과 중공의 판세가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도 묵과할 수 없는 한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추론해봤다. 북한을 가운데 두고 서로 자기네 편을 만들려고 줄다리기에 용을 써대는 형국인데, 마침내 북한이 중공 쪽으로 쏠리는 기미가 보이자 이에 놀라 초조해진 소련 당국에서는 애먼 한국을 끌어들여 여타한 타격을 입힘으로써 북한의 호감을 사보려는 생뚱맞은 술책의 일환이 아닐까도 생각해 봤다.

1963년이었다. 김 선장이 교통부 수로국 5급 말단 공무원으로 재직할 때, 미국 시애틀에서 수로 측량선 제3수로호를 인수받아 아찔한 누란의 고비를 헤쳐 나온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일부변경선을 사이에 두고 미국과 소련이 입술을 맞대다시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알래스카 끝단 아쮸섬을 출항하여 일주일 항정인 일본 홋카이도 남단에 있는 하코다테항을 향하여 항해하고 있을 때였다.

저기압의 공동묘지라 일컬어지는 북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험악한 모진 폭풍과 맞닥뜨린 황천항해로 죽을 고비를 헤매고 있을 때, 천지신명의 보살핌이었던지 사할린 연안을 정찰하던 미국 기상 첩보기가 나타나서 조난당한 수로측량선 제3수로호를 안전 항로로 인도해 줘서,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하코다테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막막했던 지옥 항해 일주일 동안 비행기와 배 사이를 오고간 통신 수단으로 이어진 우방의 신뢰가 돈독함에 감사한 맘 이루 말할 수 없다. 특히 고맙고 또 고마운 12명의 조종사의 싸인이 담긴 메모지와 일용 생필품이 가득 담긴 커다란 방수 가방을 바다에 떨어뜨려 놓고 은빛 날개를 갸웃갸웃 하늘 저 멀리 사라져 작별했던 가슴 저린 감회가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었던가.

9월 2일. 새벽 5시 뉴스는 심한 잡음 때문에 청취하지 못해서 갑갑했다. 오전에 현지 대리점 직원이 본선 일정을 알려주러 방선했다. 당연하게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 만행 사건을 거론하면서 항의성 질책을 쏟아 부었다. 허어, 대리점 직원은 금시초문이라며 뜨악해 하면서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라고 공감하는 듯했다. 자세한 진위 여부를 알아보는 대로 전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돌아갔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사고 피해 당사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 진영에서 소련의 만행을 규탄하는 여론이 들끓고 있어 덩달아 본선 라디오도 극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저녁때가 되어가니까 사고 전모가 한 겹씩 벗겨지고 있었다.

일본인 27명과 미국인 53명, 그 외 홍콩, 말레이시아 네덜란드, 호주, 대만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몇 명씩 탑승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 동포가 가장 많이 희생되었음은 불문가지였다. 미국, 일본, 캐나다에서는 국제 항공법을 위반한 소련 당국에 대해 강력한 항의를 함과 동시에 유엔 안보 이사회 소집을 요청해 놓고 있다고 했다.

본선 아나토리아호에서도 내일 아침부터 조기를 게양하고 개개인 상장(喪章)을 가슴에 달 뿐 아니라 일체 상륙도 않기로 선원 간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4년 전 1979년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비보를 접했을 때도 김 선장은 귀족들이 많이 몰려 산다는 말레이시아 페낭섬에서 하역 작업을 하고 있었다.

달 밝은 밤에 사방이 탁 트인 노천 주점에서 선원들과 어울려 거나한 취담으로 세상만사를 노닥거리고 있던 참에, 얼굴색이 까무잡잡한 웬 신문팔이 소년이 한문투성이 신문을 들이대면서 뭐라 뭐라 지껄여대는 것을 손사래 쳐서 쫒아 보냈다. 잠시 후 예의 아까 그 소년이 재차 나타나서 답답하다는 듯이 발을 동동 구르며 재촉하는 몸짓으로 신문을 내밀며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어라, 신문 앞면에 온통 빨간 줄이 어지럽게 그어져 눈길을 끌었다. 얼핏 살펴보니까 이건 큰일이 났다 싶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여자를 포함한 다른 사람의 사진이 눈에 확 들어왔다. 한자 몇 자를 확인할 필요 없이 바로 대통령 시해 사태가 발생했다는 상황 판단이 옳은 것 같았다,

서둘러 술자리를 파하고 숙연한 기분으로 귀선했다. 내일 아침부터 상장을 달고 조기를 게양하는 의식만이 본선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수밖에 없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본선 주변 부두에서 하역 작업을 하고 있던 영국 화물선 마스트에도, 어떻게 알았는지 조기가 나부끼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고마운 맘을 담아 양 손을 흔들어줬다.

그나마 대한항공 747 격추 만행을 감행한 당사국인 소련 영토 나흐드카항 내에서 대한민국 태극기에 검은 리본을 단 조기를 게양했으니, 불의지변을 당한 269분의 고혼에 명복을 더해 드리려는 선원들의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질까. 부디 천당, 극락 천국에 임하소서.

돌이켜 보건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 나라 영공을 불법 침범한 정체가 불분명한 물체가 있었다손 치더라도 어찌 좌고우면 아랑곳 않고 무작정으로 여덟 대의 전투기가 마치 공중전을 펼치듯 비무장 여객기 꽁무니에 따라붙어 열 추적 미사일을 발사해 여객기를 격추시킬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천인공노할 만행이 아닐 수 없다.

9월 3일. 선원들 가슴마다에 상장을 달고, 선교 마스트와 선미에도 조기를 올린 채로 원한에 서린 소련 땅 나흐드카항에 통한의 눈물을 뿌려놓고 어렵사리 출항 기적을 울리며 중공 상하이로 뱃길을 잡았다.

 

□ 자료출처 : <월간 海바라기> 2015년 9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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