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이시형

등록일202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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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이시형

-한국 해운 해기 교육의 정립과 선구자들의 헌신

 

이시형은 1910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출생했다. 당시 매우 높은 학벌로 인정받던 도쿄고등상선학교(예전 한국의 3년제 전문대학급)와 고베고등상선학교에 유학한 해기인재들이 한결같이 북한, 그 중에서도 국경 지역 근처임은 특이한 일이다. 그것은 아마도 어릴 적부터 국경 너머에서 들어오는 외국 문물의 영향을 받아서일 것이다. 이시형의 아버지는 신의주가 종점인 경의선 기관차의 기관사였다. 당시에 증기기관으로 달리는 기관차는 가장 첨단의 과학기술 분야에 속했다. 그러므로 그가 성장해서 일본 도쿄고등상선학교의 기관과를 진학한 것은 아무래도 이러한 아버지의 직업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시형은 유학시절 매우 근실하고 조용한 성품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졸업 후의 행적을 보면 그는 독립사상, 항일 저항정신이 매우 강한 해기사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시형이 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우선에서 2등기관사로 승선근무하던 시절, 그 때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치르며 바다에서는 수많은 일본 함정과 민간수송선들이 폭격을 당해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전시에 일본은 군수물자를 생산할 원자재의 상당 부분을 그들이 점령한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의 남방 열도에 의지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실은 수송선들은 미 잠수함의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선단을 이루고 한 척의 구축함이 호위하게끔 했지만 피격 침몰을 모면하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 수송 선단의 선박에 승선하고 있던 이시형은 선단의 선박들 중 한 척이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 날 밤, 그가 승선한 선박의 한국인들을 갑판에 모아 놓고(일제강점기에 화물선에 승선근무한 한국인은 주로 보통선원들이었다) 그들에게 지금의 사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지금 이 전쟁은 일본이 지는 전쟁이다, 우리는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 와 있다, 일본을 위해서 개죽음 당해서는 안 된다, 모항에 입항하면 모두 하선하길 바란다, 라는 대략 그런 내용이었다. 이 날 이시형의 연설을 들은 이들 중에는 훗날 해방이 되고 이시형이 설립한 진해고등상선학교의 별과에 입학한 청년이 있었는데 그가 전하는 바로는, 당시는 일제가 전쟁 중이라 그런 발언은 매우 위험했지만 이시형은 거리낌 없이 말을 하고 있었고 감동을 받은 그들은 어느 누구도 그 날 밤의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시형은 승선근무 중에 상사인 일인 선장, 기관장과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졸업 후 그가 승선생활하던 조선우선은 사관은 대다수 일본인이고 조선인은 하급선원이었는데, 그는 업무적인 사안에서뿐만 아니라 하급선원인 조선인들이 받는 불이익에 대하여 항의를 하곤 했기 때문에 그 결과, 같은 동기생들보다 기관장 승급이 많이 늦었다.

 

이시형은 한국 해운계에서는 기인 중의 기인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의 삶이 특별한 기행이 아니면서도 기인으로 기억되는 것은 그의 솔직담백하면서도 급한 성격 때문이다. 그는 매우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길을 가다가 길가에 거지를 보면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을 벗어 줄 정도로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격이 지나치게 솔직하여 사적으로 공적으로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이 때문에 그를 오해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는 싫고 좋음, 옳고 그름의 구분이 너무나 명확한 사람이어서 주변의 사람을 곤혹케 하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의 한국해양대학 재직 시절, 이러한 성격으로 그의 제자 가운데는 스승의 매를 맞지 않은 제자가 거의 없을 정도로 그는 제자를 훈계하는 데에 스스럼이 없었다(당시에는 사랑의 매는 일반적이었다).

 

그의 품성을 논할 때, 그에게 과연 교육자적인 자질이 있는가, 라고 의심이 들게 하는 것은 사석이든 공석이든 전혀 격식을 차리지 않는 그의 옷차림과 자유로운 처신에 있다. 그는 사실 교육자, 또는 교육행정가적인 자질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는 평상시 옷차림이 별로 단정하지 못했다. 물론 난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허름하다 라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는 평상시 양복을 입었지만 반듯하게 다려 입는 일이 드물었다. 혹시라도 그 전 날 술자리가 있어서 약주라도 든 날이면 이튿날 그의 저고리에는 막걸리인지 안주가 묻은 건지 얼룩이 져 있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은 듯했다. 학장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외부 인사와 식사를 함께 하는 일도 있는데 그럴 때 반주를 마시게 되면 술이 세지 못하고 입담도 별로 좋지 않았던 그는 혼자 자작하며 마시다 한 쪽에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럴 제면 함께 대동한 서무 직원이 손님과 대작하며 잠든 이시형의 역할을 대신하곤 했다. 그런 그가 당대의 문사인 신상초라든지 당시 한국 조선학계의 유일한 조선공학자인 김재근을 직접 만나 이 학교의 교수로 영입할 수 있었던 것은 얼른 납득이 어렵다.

 

광복 후부터 6.25전쟁을 거쳐 1950년대 중반까지의 극심한 혼란정국에 이시형이 한국해양대학장 직을 수행한 것은 한국 해운계를 위해서는 그야말로 천행이었다. 이시형은 하늘이 한국 해운계에 내어 준 사람이었다. 시대는 교육자적인 자질을 가진 고상한 교육자보다는 시대의 고난을 짊어질 오직 사명자를 원했다.

 

1946년 1월 5일, 해기사 양성 교육기관인 진해고등상선학교(이 교정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진해고등해원양성소가 운영되었다)의 문을 연 교장 이시형과 몇 명의 교직원은 1기생 신입생들을 맞았다. 학교 설립은 당시 아직 정부 수립 전이어서 미군정으로부터 허락 인수 받았는데, 일제로부터 막 해방되어 선박도 자본도 화물도 아무것도 갖추어지지 않은 한국 해운의 상황에서 왜 이와 같은 해기사 양성 교육기관을 설립했는가는 이시형과 그와 함께 한 교직원들만이 알 일이다. 학교는 개교 당시 항해과 기관과 각각 40명씩 모집했는데 광복 후의 혼란 정국만큼이나 동종의 다른 교육기관과의 합병, 또는 다른 지역으로 이전 등으로 한 동안 매우 불안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학교는 지금도 그렇지만(현재 한국해양대학교의 해사대학을 말한다) 국립이어서 등록금은 물론 학생들의 의식주 생활이 관비로 운영하게 되어 있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여 특히 식사 문제에 있어서는 양식 부족으로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 구해온다든지 조기방학을 하는 등 애로 사항이 참 많았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학교는 전문교과와 교양교과에서 최소한의 교수진을 갖추었고 학사운영도 그런대로 정상적으로 운영해 나갔다.

 

진해고등상선학교 즉, 진해해양대학(1946년 8월 15일에 개명되었다)이 맞은 1차 시련은 해군병학교(지금의 해군사관학교)가 학교 통합을 제의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말인즉 해군사관을 양성하는 해군병학교와 상선사관을 양성하는 진해해양대학을 합쳐 해양사관 교육을 일원화하자는 언뜻 보면 근사한 내용이었다. 제안을 받은 진해해양대학은 측은 고민에 빠졌다. 당시 진해해양대학의 교정은 진해의 해군통제부 관내에 있었고, 해군으로 보아서는 신생조국의 바다를 수호할 해군사관 양성 교육 시설이 무엇보다 절실한 때였다. 그 해 1946년 10월에 해군병학교의 대표가 와서 다시 한 번 정식으로 두 학교의 통합을 제안했다. 이에 대하여 대부분의 교수들은 침묵을 지켰고, 학생들은 크게 반대했다. 그 후 2개월이 지나서 미군정의 통위부(정부수립 후의 국방부에 해당)로부터 교사를 해군병학교에 양도하라는 일방적인 명령을 받았다. 이시형과 교직원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시형과 교수진과 학생들은 인천으로 올라갔다. 인천에는 일찍이 황부길(이시형보다 도쿄고등상선학교 1년 선배이다, 훗날 해운국장 등 한국해운개척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이 미군정의 부탁을 받아 개교했지만 학사진행에 실패하여 대책이 없던 인천해양대학이 있었다. 인천에서 진해해양대학은 진로가 막막했다. 이시형은 교사를 구할 수 없어 여러 가지로 방편을 모색했는데 해결책이 없었다. 그 때 미군정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인천 월미도에 해안경비대(훗날 해군)가 접수 관리하던, 일제 때 일인들이 유흥업소로 쓰던 적산가옥이 한 채 있는데 그 곳을 쓰라는 것이었다.

 

적산가옥은 옹색한 대로 숙소는 되었으나 문제는 강의실이었다. 교사를 구하기 위하여 인천 시장과 지역 유지들을 만나는 등 백방으로 뛰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에 학생들을 근방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찾아다니게 하여 강의실을 구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찾아다니는 학교에서는 교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교문에 ‘진해해양대학 이전 결사반대’라는 현수막까지 걸고 반대를 하고 있었다. 차츰차츰 교수진들이 이직하고 학생들도 떨어져 나갔다. 이시형에게 매우 외로운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인천해양대학의 선례에서 보 듯 학교가 교사를 마련할 수 없는 시련을 겪는 상황에서는 직임을 맡은 책임자가 떠나가면 학생들도 이산하여 폐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때 어떤 학생이 스승 이시형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학생의 이름은 김주년, 당시 1학년생이었다.

 

그는 학장 이시형에게 자기 집이 군산에 있는데 전번 방학 중에 집에 갔을 적, 군산시에서 해양대학이 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이시형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학생 김주년과 그의 동기생 김경천을 군산으로 파견 보내었다. 아는 지인의 소개로 군산시청 관계자들을 만난 김주년 일행은 군산시가 해양대학의 군산으로의 이전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이시형 학장에게 전달했다. 이로써 해양대학의 군산 이전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군산 시청에서 지역의 유지들과 군산시 교육위원회 위원들과 해양대학 대표가 만나 교사 신축과 학교 운영에 소요되는 경비 제반 관계에 대하여 논의를 하고 서로 간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리하여 1947년 5월에 군산초등학교 별관과 대성동 3번지의 미곡창고로 학교를 이전하고 학교명을 ‘국립해양대학’으로 개명했다. 너무 서둘러 이전했기 때문에 아직 수업할 교실을 구하지 못한 상태여서 우선 인근 초등학교의 교실을 빌려 사용했고, 학생들의 기숙 문제는 군산에 산재하는 여관을 빌려 군산시가 하숙비를 부담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그 뒤 1948년 1월 20일에 군산시가 약속한 대로 신창동에 신교사가 준공됨으로써 학교는 제대로 된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군산에 정착한 국립해양대학은 군산시민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별다른 고등교육기관이 없던 차에 대학이 들어섰고, 또 이 대학의 학생들은 단정하게 제복을 입었고 절도 있게 행동했기 때문에 군산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국립해양대학은 군산에 있으면서 학교의 관할권이 통위부(현 국방부)로 이관되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준 군인 신분으로 대우 받았고 그에 따라 해안경비대의 사관후보생에 준하여 군복과 급식이 이루어졌으며 어려운 사회환경이었지만 비교적 여유 있는 보급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해안경비대에서는 배속장교를 파견하여 학생들에게 사관후보생에 준하는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이 학교에서 이러한 군사훈련은 이후 매우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군산 시절에 국립해양대학은 비교적 안정된 학사 운영을 해 나갔다. 비록 충분치는 않았지만 학사를 진행할 사무실과 교실과 학생들의 기숙사가 있었고 군산시와 정부(미군정 때는 미군정청)의 재정 지원으로 예산을 운영해 나갔고 그에 따라 교직원들과 학생들의 생활은 안정을 되찾았다. 이 시기에,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랬지만 해양대학의 입학생들은 전국적으로 매우 뛰어난 성적의 소유자들이었다. 이것은 당시 한국 사회가 매우 빈곤한 시대였고 학교가 국비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이때에 학생들을 가르친 전문교과 교수들은 비록 교육학을 연구한 적은 없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뛰어난 과학 지식의 소유자들이었다. 학교의 발전을 위하여 학장 이시형은 교수 영입에 각별히 신경을 썼는데 이 때 문인 신상초와 국내 유일의 조선학자 김재근이 교수진으로 참여했다. 그들은 모두 학장 이시형의 해운입국 정신과 해기교육을 사랑하는 진정성에 감동을 받고 들어왔다.

 

학교가 전 부문에 걸쳐 안정을 찾고 학교의 발전에 헌신적인 학장과 뛰어난 능력의 교수진의 지도를 받으면서 학생들은 향후 이 학교의 전통이 될 여러 가지 학교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연극부, 음악부, 문학부…… 등의 동아리가 결성되었고, 해양 의식儀式 또는 해양문화를 표방한 해양축제 ‘적도제’가 이 때 시작되었고, 처음으로 교지가 발간되어 제호를 ‘바다지’라 명명했는데 이 때 발간된 바다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문예지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해양대학만의 전통이랄 수 있는 학교 문화가 상당 부분 이 때에 생겨났다.

 

당시 학교 역사의 초창기에 학생들은 스스로 전통과 학교 문화의 창조자였다. 그들은 학사 운영에도 의견을 내었고, 학생 생활 문제에 있어서는 자치권을 부여받아 스스로 규칙을 정하고 정기 및 임시 자치회를 개최하여 뜨겁게 토론하고 논쟁했다. 그런데 이 자치회에서는 향후 해양대학의 해양정신이 되고 한국 해기사들의 실천적 사상이 될 어떤 주제가 등장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20세 21세 청년들이, 아직 바다를 경험한 적이 없는 그들이 매우 실천적인 해양사상을 들고 나온 것이다. 어느 날 자치회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는 상황에서 누군가 크게 “바다에 죽자!”라고 외쳤다. 그 말이 있은 후 회의는 매우 쉽게 결말이 났다. 그는 2학년 손태현 학생이었다.

손태현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교사를 군산으로 이동하고 이듬해에 학장 이시형은 교직원과 학생들 대상으로 학교의 사상과 이념이 될 교훈을 공모했다. 여기에 손태현의 작품이 당선되었다. 그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1조 우리의 이상은 인격의 완성

제2조 우리의 생활은 진리의 탐구

제3조. 우리의 사명은 칠대양 제패

제4조 우리의 각오는 바다에 매골

제5조 우리의 학원은 명랑한 가정

 

 

이로써 해양대학에 해양사상, 그 이념화 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손태현의 학훈은 교내 행사 때마다 외쳐졌고 군사훈련 때도 정신교육으로 암송되었다. 제4조 우리의 각오는 바다에 매골, 이 이상의 해양정신이 또 있겠는가? 해양사적으로 해양의식화에 사용된 표어의 예를 하나 들면 대항해 시대에 말해지던 포르투갈의 것을 들 수 있다. 그것은 “항해는 필연, 삶은 우연”이란 표어이다. 어느 것이고 간에 그러한 해양국가들의 해양표어에는 바다에 삶의 전부를 건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해양대학 학생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해양사상의 발로는 비단 손태현 개인에 한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시형은 또 교내에 학생들이 부를 ‘단체가요’를 공모했는데 2학년 이준수의 작품 ‘해대요가’가 당선되었다. 그것은 1절부터 10절까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8절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웅지를 못 이루면 귀향 안 하리

부모의 슬하도 그리웁건만

천부의 사명은 더욱 크도다.

우리의 고향은 태평양이요,

우리의 무덤이 될 태평양이다

 

 

우리의 무덤은 태평양, 손태현의 ‘바다에 매골’과 일치하지 않는가! 해양대학 학생들은 수업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 주당 몇 시간은 군사훈련, 매일 승선생활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 때 이렇게 해대요가가 떼창으로 불리어지고 있었고 한국 해운 건설 초창기 우리들의 사랑하는 해운 역군들은 이렇게 의식화 되어 가고 있었다. 학장 이시형이 학생들에게 훈시를 하면서 얼마나 ‘우리의 각오는 바다에 매골’을 설파했는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1947년 10월에 이시형은 1기생 70명이 실습 승선한 ‘KBS2호’에 연습감으로 승선했다(당시 이시형은 일시 해양대학장 직에서 이임했다. 해양대학의 초창기 10년 동안에 이시형은 학교의 진로와 발전을 위하여 학장직에 취임, 이임을 반복했다). 한국 해운 사상 처음으로 외양항해에 나선 실습선은 서해의 황파를 넘어 중국 상하이에 입항했는데 아직 환국하지 못한 교포들과 이름만 들어도 알 독립지사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1948년 2월, 마침내 국립해양대학 1기생이 졸업했다. 그 동안 개교부터 지금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고난을 참아 온 이시형과 교직원들은 뜨거운 감회에 젖었고, 1기생 학생들의 기쁨도 더할 나위 없었다. 그들은 모두 학교를 위하여 한국 해운입국을 위하여 그리고 바다에서의 자신의 꿈을 위하여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신념에 불타고 있었다. 1기생이 2년 반 만에 조기졸업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해방 후 한반도의 복구를 위하여 미국은 원조물자를 제공하기로 했고, 그것을 실어 나를 수송 선박 10여 척을 한국에게 무상원조해 주었는데 당장에 선박을 운항할 해기사가 많이 부족했다. 이에 미군정의 통위부는 해양대학 측과 협의하여 1기생을 조기 졸업시키기로 결정하였고, 결국 1기생들은 4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2년 만에 학교를 졸업했다.

 

이러한 해양대학의 비정상적인 학사운영에는 당시의 한국 사회 경제 실정과도 연관이 있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돌아가면서 남겨 놓고 간 산업시설(그들은 철수 시 가져 갈만한 것은 다 가져갔다. 남은 것은 온전한 게 별로 없었다)과 미국과 우방이 지원한 기계 또는 시설을 다룰 공학기사들이 턱없이 부족하여 해양대학 졸업자는(특히 기관과) 선박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도 수요가 긴급했던 것이다.

 

학교를 설립하고 처음으로 졸업생을 배출하고 나자 자신감을 얻은 이시형은 학과를 증설하여 기존 항해과와 기관과에 조선과를 더 두었다(이후 조선과는 6.25전쟁 중 3기생의 졸업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당시 해기 교육에 대한 학생들의 학구열은 대단했다.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그 시대의 가장 앞서가는 과학기술을 이 분야에서 가장 실력자인 교수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학교의 교무행정은 안정되었고, 특히 이 당시에 신상초와 같은 뛰어난 인문학자가 그들에게 있었던 것은 어쩌면 학생들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는 국제법과 해양법 등의 과목을 담당했는데 그의 강의에는 세계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가 곧잘 이야기되곤 했고 학생들은 그에 따라 인문적인 사고의 지평을 넓혀 나갔다.

 

이 시기에 학생들의 교양의 수준을 한층 더 높여 준 것은 독립애국지사들의 초청강연이었다. 당시에는 아직 국가 성립 과정이어서 일제 치하에서 국내외에서 활동한 독립지사들이 일반 민중을 계도하기 위하여 학교마다 그 분들을 초청하여 강연회를 갖곤 했다. 이 때 독립지사들이 전해주는 생생한 독립운동 이야기는 많은 감동을 주었고, 향후 한국 해운과 해기를 떠맡을 학생들의 국가관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군산에서 ‘국립해양대학’이라는 항해선은 그야말로 순풍을 받으면서, 승무원들은 충분한 영양공급으로 건강을 되찾았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제각각 앞날을 꿈꾸며 희망으로 가득 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향료를 얻기 위하여 서쪽으로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아 남아메리카의 남방으로 끝없이 항진하다가 드디어 만난 수로(훗날 마젤란해협이라 명명되었다)를 통과하여 들어서게 된 아무도 간 적이 없는 바다, 그 망망하고 평화롭기만 한 태평양에 들어선 마젤란 선대의 항해처럼 ‘푸른 희망’ 그 자체였다. 그렇다. 일기는 그지없이 맑고 먹을 것은 잘 준비되어 있고 승무원들은 세상 끝까지라도 함께 갈 만큼 사기는 충만하다.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우리가 도달할 꿈의 항구는 드디어 보게 될 것이다.

 

확실히 그들은 희망이 충만했던 것 같다. 광복 후 사회 전체가 경제적으로 많이 나빴지만, 군산은 버스교통비 등에 교육세를 징수하여 국립해양대학의 재정에 어려움이 없게 했다. 군산의 해양대학은 활기에 넘쳤다. 학생들은 아침 일찍 기상하여 해대 학훈 5개조를 암송하며 단체가요 ‘해대요가’를 부르며 신체훈련과 집단구보를 했고, 아침식사를 하고 각자의 맡은 구역을 청소하고 나서는 줄지어 질서정연하게 학관을 향했다. 그리고 오전수업과 점심식사, 오후수업을 마치면 다시 신체단련이나 군사훈련, 집단구보 등을 했고 저녁식사 후에는 자율학습이나 각자의 취미대로 연극부, 음악부, 문학부 등의 동아리활동을 했다. 주말이면 외출이 허락되어 군산 시내에서는 검은 제복 하얀 모자 하얀 와이셔츠 넥타이를 한 단정한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는데 군산시민들은 이러한 주말 시내풍경을 좋아했다. 확실히 이대로라면 국립해양대학은 이 지역에 터전을 굳게 잡고 멀리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의 침로를 잡아나갈 것이 분명했다.

 

안정된 학사운영, 뛰어난 해기인재들과 교수진, 학교교칙과 내무규칙도 완성되었고, 교지이며 해양문예지이기도 한 ‘바다지’의 발행과 해양축제 적도제와 같은 교내문화와 해양문화 형성을 진행해 가고 있었고, 훗날 선박사관 양성 교육기관에서만 볼 수 있는 선후배간 위계질서도 확립되어 갔고, 실습선이 없었지만 당시의 유일한 해운기업인 조선우선의 협조를 받아 단체실습을 할 수 있었고, 이렇게 해양대학은 운영되어 갔는데 아쉬운 점은 조기 졸업시킨 1기생 이후에는 현직 취업이 불투명한 것이다. 당시 한국 해운은 자력으로는 선대확충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활동상으로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중에 한국 해운의 도약에 따라 현장의 해기사 전체가 전율 공명한 ‘바다에 매골’이라는 해양사상의 정립이었다. 그것의 과정은 외형상으로 보면 손태현의 교훈과 이준수의 해대요가이겠지만 이시형을 중심으로 한 학교 공동체 모두가 동의하고, 공감하고, 함께 진행해 나간 ‘해양의식화 과정’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이 모든 것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사태가 일어났다.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의 꿈을 가져간 일이다. 전쟁은 이시형이 꾸던 꿈, 신순성이 꾸던 꿈, 황부길, 윤상송, 김용주, 홍순덕……, 그들 우리 해운건설의 아버지들이 꾸던 꿈, 그리고 지금 학교에서 바다의 매골을 각오하고 있던 국립해양대학생들의 꿈을 앗아갔다. 꿈이 없는 인간, 미래가 없는 사회, 이것이 당시 전쟁을 당한 우리들의 상황이었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며칠 후 실습을 떠났던 단양호가 돌아왔다. 이재송 선장의 단양호는 서해에서 실습항해 중 전쟁 발발에 따른 선박과 선원동원령에 따라 해군본부의 작전명령을 받고 인천항에 정박 중이었는데, 부두에 공산군이 진입해 들어오자 인천항 갑문 개폐 직원이 도피하고 없어 학생 특공대가 손으로 직접 갑문을 열고 탈출에 성공, 모항인 군산으로 무사히 귀항한 것이다. 학생들과 그들을 인솔한 교직원들이 학교로 돌아왔고, 이시형은 실습선 선장이며 책임자인 이재송의 손을 뜨겁게 잡았다. 두 사람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논의했다(이때 이재송은 해양대학의 부학장 직임을 맡고 있었다).

 

일단은 교직원들과 학생들을 보다 안전한 부산 근역으로 이동시킬 것을 결정했다. 그러고 나서 이시형은 홀로 주거하고 있는 관사에 남아 사태를 관망했다. 하루, 이틀, 사흘…….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전황은 긴박해지고 있었다. 남한의 상당 부분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이제 곧 적은 군산도 집어삼킬 것이었다. 이시형은 깊은 고뇌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무도 없이 텅 빈 학교,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부산에서 쫓겨나서 인천에 있을 적, 교사 건물이 없게 되면 학교는 존재할 수 없다는 뼈저린 경험, 그 악몽이 이시형을 짓누르고 있었다. 포성이 군산 근방에서 들리게 되자 그 때까지 함께 남아 있던 학생 몇 명이 이시형을 재촉했다. 이시형은 그들과 함께 군산 부두 선착장에 계류되어 있던 YMS(소형목조선, 부족한 대로 학생들 실습에 사용했다)에 올랐다. 그리고 부산으로 이동하여 당시 대한조선공사(지금의 한진중공업의 전신) 도크 안벽에 계선했다.

 

이후 이시형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6.25전쟁 중에 국립해양대학이 폐교되지 않은 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외부의 별 특별한 도움 없이 이시형과 몇 명의 교직원과 이합집산하는 수십 명의 학생들만으로, 이리저리 떠돌면서, 그래도 학교는 존재했다.

 

부산으로 피난한 이시형은 조선공사의 도크에 계선한 YMS에 학생들을 모아 학사를 진행하려 노력했다(아마 정상적인 수업은 어려웠을 것이다). 이시형은 여기서 4학년 조선과 학생들의 졸업시험을 시행했다. 그 후에도 이시형은 YMS에 학생들을 모았는데 결국 이 기간에 이 작은 배는 해양대학의 존재의 역할을 한 셈이었다.

 

그 해 10월 서울을 수복하자 이시형과 남은 교직원들은 군산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 군산은 그 때의 군산이 아니었다. 군산의 주택과 항만, 산업시설과 교육시설이 부서져 버렸는데 해양대학도 그 피해를 비켜나갈 수 없었다. 미곡 창고를 개조하여 시설한 식당만 남았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 다시 해양대학의 군산시대가 시작되었다. 턱없이 부족한 교직원, 학생이었지만 이시형은 학사를 진행하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다. 수개월 후, 전황이 재역전되어 다시 공산군이 밀고 내려왔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고 나자 이시형은 다시 부산으로 옮겨갔다. 이렇게 해양대학은 다시 부산에서 학교를 차려야 했다.

 

당시 부산은 임시수도의 정부 인사들과 정치인들 경제인들은 물론 전국의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혼란정국이어서 국립해양대학이 수업을 진행할 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학장인 이시형이 이리저리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부탁을 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아마 이러한 어려움에는 사회일반의 국가 기간산업으로서 해운에 대한 이해부족도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어렵게 해운대국민학교의 교실 몇 개를 빌릴 수가 있었다. 다행한 일이었다. 이시형은 몇 남지 않은 교직원과 4, 50명의 학생들과 함께 학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 해 가을 38도선 근방에서 피아간에 일진일퇴를 하는 긴박한 전황이 계속되자 이시형은 학생들에게 군 입대를 권유했다. 많은 학생들이 스승의 말을 따르면서 군에 입대했다. 후에 전황이 호전되자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교로 복학했다.

 

언제부턴가 이시형의 국립해양대학은 부산 거제리(지금의 거제동)의 교통고둥학교 부지에 천막을 짓고 교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늘 그래왔지만 학생들은(물론 몇 명 되지 않는 교직원들도) 아침이 되면 이곳저곳에서 물려들어 천막교사의 급식으로 아침식사를 했고, 오전 수업, 점심식사, 오후수업, 저녁식사, 이렇게 진행되었으며 저녁이 되면 주변의 민간 주택 하숙집에서 지내고 다음날 아침에 일찍 다시 등교하는 식이었는데, 학생은 물론 학사 운영을 하는 교직원들의 수고가 말이 아니었다. 부족한 시설에 부족한 급식에 게다가 학생생활 지도도 큰 문제였다. 기숙사를 갖추고 승선생활을 선험교육해야 하는데 일과 후에는 학생들이 민가로 흩어지니 난감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제는 학교의 미래가 너무나도 어둡다는 데에 있었다. 국립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가난한 국가가 전쟁을 겪고 있어서 정부의 재정 지원이 매우 어려웠고, 학교가 존속할 수 있는 교사건물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러니 학생들은 자꾸 학교를 떠나갔고, 월급이 열악한 교직원들도 하나씩 둘씩 사직했지만 이를 말릴 수는 없었다(그들 외양항해 가능한 상위급 해기사들은 당시 현직에 자리가 있었고 높은 급료를 받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천막교사에 비가 새어서 새지 않는 옆 천막으로 이동하여 수업하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이시형이 갑자기 힘이 빠지며 주저앉았다. 쉬는 시간에 비를 피하며 처마 밑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던 학생들에게 이시형은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이제 그만두자, 안 되는 일이다, 라고.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당시의 학생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느끼기에도 학교는 이런 형편이고 앞날이 없으며 오직 이시형의 ‘외고집’으로 버티고 있던 터였다. 그 때 함께 비를 피하며 스승의 말을 듣고 있던 학생들 몇 명이 이렇게 말했다. 안 되어요, 선생님! 선생님이 그만 두시면 안 됩니다. 선생님이 그만 두시면 해운입국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이 말을 옆에 있던 손태현이 듣고 있었지만 그는 말없이 허공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손태현은 1948년 졸업 후, 교수요원으로 남아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시형은 당시에 왜 그처럼 국립해양대학의 존속을 고집하며 고통과 고난을 견디고 있었던가, 라는 의문점이 든다. 사실 이시형은 학장직을 내려놓고 다른 직업을 찾아갈 수도 있었다. 해운계 교육기관으로는 최고의 명문을 나왔고 해기사로서 최고의 기능을 소유하였으며 아직 젊은 이시형은 마음만 먹으면 외양 화물선의 기관장으로 얼마든지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학교는 영영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이 이시형과 주변 사람들의 판단이었다. 당시 해양대학 학장직은 월급이 박했고, 더더구나 학교의 현재의 형편은 물론 앞날도 매우 어두웠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훗날 그의 생전에 해양대학이 정상 궤도에 올랐을 때, 해운계 인사 초청 좌담회 같은 모임에서 그가 남긴 말이 있다. 누군가 어떻게 그 어려운 시간들을 견뎌 낼 수 있었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대답하길 제가 무슨 능력이 있나요, 다들 주변에서 도와주어서 할 수 있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의 말은 스스로의 공에 대해서 교만하지 않으려는 그의 성품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학교를 설립하고 지금까지 2년여의 군산 시절을 제외하고는 늘 폐교 위기 속에서 견뎌 온 한국해양대학,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이시형이 있었다. 그는 교육자이지만 스스로도 고백하였 듯이 교육자적 자질이 부족하여 고상한 교육자가 되기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참으로 교육자였다. 시대는 전혀 교육자가 아닌 자를 교육자의 길을 가라고 사명을 맡겼다. 그게 해운계의 이시형이었다. 전쟁 중에 교직원은 떠나가고, 학생들은 흩어지고 모이길 반복하면서 교실은커녕 사무실도 제대로 없고, 그런 상태에서 남은 몇몇의 교수진을 이끌고 학생들을 지휘해간 이시형. 어쩌면 학생들에게 스승은 함께 운명을 같이 하는 막역한 동지였다. 실제로 그들은 뜨거운 동지애로 폐교의 위기를 견뎌 나갔다.

 

전쟁 당시 국립해양대학 공동체의 뜨거운 동지애는 이시형이 설파한 ‘해운입국’ 정신에 기반한다. 이시형의 해운입국 정신, 손태현 식으로 말하면 ‘우리의 각오는 바다의 매골’, 그 해양사상의 형성과정은 다음과 같다. 항일독립사상이 투철했던 이시형은 일본에서 해기유학을 하면서 일본이 해양국가가 되어 간 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일본이 해양국가를 지향하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이다. 문명개화에 눈을 뜨고 사회 전반에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일본은 근대 국가, 식민제국주의 국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해양활동이 필수임을 깨닫게 되고 이를 위하여 해군과 해운 즉, 해양력의 강화에 집중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그러한 해양 인력들에 대한 해양사상 교육, 해양의식 고취 활동도 필수적으로 따랐다. 졸업 후 이시형은 조선총독부가 감독하는 조선우선의 선박에 기관사로 승선하여 연근해 항로를 오갔고, 태평양전쟁이 치열해지면서는 남방항로에도 다니면서 해양국가 일본의 민낯을 속속들이 경험했다. 그는 바다를 통해 대륙 간 엄청난 물류 이동이 진행되는 것을 경험했고 잠수함 공격을 받아 물속으로 가라앉는 수송선을 지켜보면서 해양국가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는 무수한 날 동안 바다에서 파도에 시달리면서, 비바람에 젖으면서, 안개 속을 헤매면서, 저 깊은 곳 기관실에서 기계를 다루면서, 낮의 태양과 밤의 천체들을 바라보면서 다가올 신생조국이 맞게 될 해운입국의 꿈을 꾸었다. 그에게 해운입국의 이념은 전 생애를 관통하는 철학이며 신조였다.

 

전쟁이 아직 끝날 조짐이 없고 학교의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기만 하던 이 시기에 국립해양대학의 2번째 ‘해양의식화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학생들은 입학식이나 졸업식, 그리고 정례적인 전체 모임에서 ‘닻 열 짓기’를 했다. 그것은 제복을 입은 학생 40여 명이 열을 지어 닻 형상을 만들었는데, 이 행사의 취지는 묘박지의 해저에 꽉 박힌 닻처럼 학교도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고 이 어려운 시기를 잘 견뎌내자는 의미를 표현하는 데에 있었다.

 

한국 해기교육을 위한 국립해양대학의 기나긴 항해가 해운계에 알려지고 있었다. 한국 해운건설의 개척자들과 해운 행정 기업 실무자들이 학교의 앞날에 대하여 논의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걱정하는 말들이 있었지만 뾰족한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ICA(미국국제협력기구)의 실무자가 전쟁피해국 한국의 국립해양대학이 교사가 없어 매우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직접 전달한 이는 이 학교의 2기 졸업생 장길상이었고, 교사 건립을 위한 재정 지원을 얻는 데는 당시의 해운국장 황부길의 역할이 컸다.

 

황부길이 해운국장직을 사임하고 국립해양대학의 학장직을 맡으면서 해양대학과 UNKRA(유엔한국재건단) 간에 해양대학 교사를 건립한다는 양해각서를 채택했다. 정부 관련 부처에서도 해양대학 건립 안이 급물살을 타면서 정부재정 11억5천만 환, UNKRA 자금 35만 달러로 학교를 신축하기로 최종 결정안이 나왔다.

 

학교의 위치는 이미 그 즘에는 부산이 항구로서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산으로 하는 데에 이견이 없었다. 그렇지만 부지가 문제였는데 여러 가지로 모색한 결과 영도의 동삼동 중리, 지금의 남고등학교 자리로 결정되었다. 공사가 시작되기 전, 진입로를 닦아야 했는데 이를 위하여 거제리 천막교사에서 학생들이 반별로 날마다 교대로 트럭으로 이동하여 공사에 동원되었다. 학생들은 트럭에 실려 가면서 시내가 떠나가도록 ‘웅지를 못 이루면 귀향 안 하리’로 시작하는 해대요가 8절을 불러 대었고 사람들은 그러한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시대에서나 있을 수 있는 풍경이었다.

 

교사 건물이 올라가자 해운 ∙ 해기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가슴이 설렜다. 날마다 키가 자라는 건물을 보며 누군가 말했다. 학장님, 저 산 이름이 뭔지 아세요? 고갈산이라 부르기도 하고 봉래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제부터는 봉래산이라 불러야 해요. 봉래란 말은 참 좋은 말이래요. 그 뜻은 파라다이스랍니다. 우리는 지금 파라다이스에 와 있는 겁니다. 때는 영도 봉래산에 나무가 별로 없어서 고갈산이라 부르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해운계에 나돌기 시작했다. 정부와 경무대에서는 교사가 완성되면 해군사관학교와 학교를 통합한다는 내용이었다. 소문의 진원지는 국방부 쪽이었다. 국방부의 주장은 이러했다. 지금 남해안 서해안에서 각종 해양사고가 터지고 있다. 선박을 운항하는 해기사의 자질에 문제가 있다. 또, 빈곤한 국가 재정에서 어렵게 마련한 외화로 외국에서 고가의 화물선을(이재송의 인수팀이 인수한 거의 폐선에 가까운 노후선 ‘천지호’로 추정된다) 인수하게 했는데 오다가 기관고장을 일으키고 책임자인 선장은 무단하선하고, 이런 것들은 모두 해기사를 교육하는 해양대학의 교육 체계의 잘못이다. 그에 비하면 해군이 인수한 함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해군사관학교의 교육체계는 뛰어나다. 만약에 두 학교를 합친다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물론 해양대학은 이에 대하여 찬성하지 않았다. 그 후 들리는 말로, 경무대에서는 여섯 번 일곱 번 대통령의 유시가 있었다고 한다(대통령의 유시가 법적으로 얼마나 효력이 있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이 사안에 대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얼마나 불만을 가졌는지, 또 멀리 부산의 해양대학 학교 당국으로서는 얼마나 잘 인지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대통령이 해양대학을 결코 ‘예쁘게’ 보고 있지는 않다는 느낌은 있었던 것 같다. 해양대학 교사가 준공되기 전 1955년 3월에 부산을 순시하러 내려왔던 이승만 대통령은 UNKRA 단장 콜터를 대동하고 영도 동삼동의 해양대학 신축공사장을 찾았다. 여기에서 이 대통령은 학장 황부길(당시는 학장직을 황부길이 맡았다. 이시형은 학교 발전을 위하여 할 수만 있다면 적임자에게 학장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학교가 어려운 시기에는 스스로 고난의 길을 피하지 않았다.)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한국 해운계를 위하여 해양대학이 제대로 역할 수행을 하고 못하고 있다는 점, 해군사관학교의 교육 시스템이 훌륭하다는 점, 해군사관학교에도 최신의 시설이 필요하다는 점, 그래서 양 학교를 합치면 가장 이상적인데 왜 비협조적이냐고 황부길에게 따졌다. 황부길은 묵묵부답,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콜터 단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는 UNKRA 원조 자금에는 북한과 친교를 맺은 국가의 것도 있다, 그런데 이 자금을 군사적 목적에 사용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이승만은 황부길에게 그렇다면 학교를 잘 지어 학생들 교육을 잘 하라고 짧게 말을 끝맺고 자리를 떴다.

 

그 일이 있고 꼭 3개월 후에 황부길은 학장직을 사임했다. 스스로 사표를 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후임에는 이시형이 다시 학장직을 맡았다. 둘의 사이는 전에도 이랬다. 물론 정부 관련 부처의 승인이 나야 하지만, 이시형 외에는 달리 이 어려운 해양대학을 맡을 인사가 없는 현실이었다. 두 사람은 나이는 5살, 도쿄고등상선학교의 1년 차 선후배였다. 둘은 일본에서 해기유학할 때부터 지금까지 동고동락을 같이 한 한국 해운을 위해서는 뜨거운 동지였다.

 

1955년 11월, 국립해양대학이 동삼동에 준공되던 날 학교는 간판을 ‘한국해양대학’으로 새로 달았다. 그날 준공식에는 대통령과 정부 인사들과 해군 장성들과 해운계 인사들이 내빈으로 참석하여 해운 한국을 이끌고 나갈 해양대학의 앞날을 축하했다. 준공식을 마치고 이시형은 운동장에 서서 봉래산 자락에 자리 잡은 하얀 교사를 바라보았다. 만감이 교차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앞날에 대한 생각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과연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 항해과 50명, 기관과 50명, 이렇게 배출될 텐데. 그렇게 되면 1년에 100명씩, 2년이면 200명, 5년 후에는 500명, 10년이 지나면 모두 1,000명인데. 그렇게 되면 상선이 최소한 100척 이상이 있어야 할 텐데. 과연 가능할까? 지금 한국 경제의 규모로는 어려울 텐데. 배를 용선하면 가능할까? 아니면 외국 선주 선박에 승선한다면……? 이런 현실 문제가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은 꿈만 같기도 했다. 그를 괴롭히던 모든 시련들이 지나간 것이다. 그는 그 날 준공식 뒤풀이를 하면서 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소. 난 그 날 내 나이 35살 때였지. 화물선 ‘고토마루’에서 1등기관사로 있을 적 수송선단에서 내 앞에 가던 배가 잠수함 공격을 받고 침몰하는 것을 봤다오. 배가 모항으로 돌아오자 병이 있다 둘러대고 곧바로 하선했지. 그러고 나서 이런 생각을 했다오. 내 이제부터의 삶은 덤으로 사는 것이다. 이렇게 말이오. 이제 이렇게 학교가 완성되었으니 이제 내가 세상을 하직해도 여한이 없다오. 물론 이시형은 지인과 함께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그랬다. 여기까지였다. 이시형의 행복은 여기까지였다. 시대는 이시형을 여기까지만 필요로 했다. 이시형은 그것을 몰랐다. 마치 마젤란이 그렇게 찾았던 향료군도와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필리핀의 작은 섬에서 마음을 놓은 것처럼 그랬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6년 늦가을에 당시 해운계에서는 전설로 일컬어지던(일반 사회에서는 좋지 않은 평이었지만) 신성모가 불쑥 찾아왔다. 그리고 이시형이 있는 학장실로 향했다.

 

마젤란과 이시형이 당한 일격은 유사한 점도 있지만 명백한 차이는 그 상대가 마젤란의 경우는 아주 작은 섬의 추장이었고, 이시형은 감히 넘을 수 없는 큰 산과 같은 존재인 신성모였다. 일찍이 해양국가인 영국에서 자국인도 갖기 어려운 엑스트러마스터 자격을 취득했고, 귀국해서는 현 이승만 정권에서 내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국무총리 서리를 지낸 여전히 대통령의 최측근인 당시 나이는 60대 중반인 신성모였다. 그는 이시형을 보자마자 이제부터 학장은 자기라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그것이 이시형의 학장직과 교수직의 마지막이었다.

 

신성모는 매우 치밀하고 강력한 추진력의 소유자였다. 누가 보아도 해양대학에 미운 털이 박힌 이승만이 그 미운 털을 빼기 위하여 신성모를 내려 보냈다고 짐작할 터였다. 이시형이 해양대학에서 쫓겨나는 데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더욱 문제는 그의 거처였다. 거주하고 있던 학교 관사에서 나오면 가족들을 이끌고 어디 갈 데가 없었다. 퇴직금도 없었고, 월급이 박봉이기도 했지만 원체 이재에 어두워 저축해 둔 것도 없어, 때는 겨울 초입이지만 셋방도 구하기가 어려웠다. 스승의 이런 딱한 사정을 알고 제자인 박현규를 중심으로 한 해양대학 동창회에서 모금하여 살 집을 마련해 드렸다는 이야기는 해운계에서는 오랫동안 들려지는 미담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한 동안 무직으로 새 집에서 칩거하다가 대한해운공사의 선박에서, 60년대에는 해외취업선에서, 때로는 급여를 받지 않는 해기사협회장직을 맡으며 한국 해운 해기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했고, 말년에는 몇 년간을 한국해양대학으로 돌아가 명예교수를 지냈다. 1985년 4월, 세상과 이별할 때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 심호섭, 해양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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