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여명

등록일202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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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여명

-일제강점기 식민통치하 한반도 해운 해기 활동

 

일제강점기에 2등항해사로 격하되어 승선생활을 시작한 신순성은 10년이 지나서야 1등항해사로 진급할 수 있었다. 그 후 1930년에 신순성은 당시 한반도의 유일한 해운기업인 조선우선에서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선장이 된다. 부산항이 개항되고 문명개화, 외세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지 어언 50여 년 만에 해양국가의 상징이랄 수 있는 화물선의 선장이 된 것이다. 물론 그 해양국가는 조선이 아니었다.

 

구한말에 조선조정이 일본으로부터 1,056총톤, 주기관 2,438마력의 광제호를 구입했다는 것은 문명개화 식산흥업을 도모하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광제호는 당시 외국인 브라운(Brown)이 총책을 맡았던 해관의 관세 수입으로 신조 발주하여 일본 가와사키 조선의 고베 조선소에서 건조, 도입되었다. 그렇지만 그 운항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일본에 의해 유지되었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배를 운항하는 선원 구성을 보면 핵심 요원인 해기사와 3부 직장(갑판부 ∙ 기관부 ∙ 사주부 보통선원들의 부서장)은 주로 일본인이었고, 3부 직장을 제외한 보통선원은 조선인이었다. 그러므로 해기사에 조선인이 한 명 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을 것이다. 그들 일본인 해기사는 주로 현역 해군 장교들로서, 당시 일본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선박이 정치 외교적으로 입지가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말해준다. 배는 일본 조선소에서 인수되고 인천항에 도착하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들 현역 해군 장교 해기사에 의해 운항되고 있었다. 1905년 12월에 인천항에서 광제호의 취항식이 있던 날, 조정의 한 관리가 배의 현측에 나 있는 스커틀(선실의 밀폐식 창문)을 보고 “배에 웬 구멍을 이리도 많이 뚫어 놓았느냐?”라고 대성일갈했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만큼 조선 조정은 해기와 해운에 무지했다. 그 후 광제호는 조선의 전 해안에 대한 세관감시선으로 쓰이기도 했고(이미 이 당시에는 세관행정의 주권이 일본에게 넘어간 뒤였다), 등대순시선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1910년 한일병합 후에는 선박무선국의 중계국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조선총독부 소속 선원양성소가 설립되자 실습선으로 이용되었는데, 1945년 일본이 패전하자 해외의 자국민들을 환국 수송하는 데에 이용하기도 했다. 조선 조정의 비용으로 귀하게 구입한 배를 일본은 한반도 식민 치하 내내 이용해 먹다가 패전하여 철수하는 마지막까지도 오직 그들을 위하여 운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일제 치하 조선 적 선박 반환 요구와 교섭이 있었지만, 광제호는 반환되지 않았다.

 

신순성 이후 일본으로의 해기 유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병자수호조규라는 불평등계약에 대한 보상 차원의 1회성 파견유학이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원천적으로 조선인이 해운계 교육기관에 진학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인이 바다에 진출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일합병이 되고 조선총독부가 통치하면서도 한 동안 계속되었는데 1920년에 유항렬이 개인 자격으로 신순성이 졸업한 도쿄고등상선학교를 입학하고 졸업 후 돌아와서는 한반도의 두 번째 선장이 되면서 그러한 차별 정책은 다소 수정되었다. 거기에는 일본의 식민지 경략과 대륙 침략의 야욕이 숨어 있었다. 이후 1930년대에도 민간 차원의 해기 유학이 수 년 간격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일은 중세의 의식에 사로잡혔던 민들이 문명개화에 눈이 뜨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들 중에는 나중에 해방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해운국장을 지낸 황부길, 광복되자마자 국내 최초로 해운계교육기관의 설립을 주도한 이시형, 대한민국 첫 해운기업 조선우선과 첫 국책회사인 대한해운공사의 실무를 주도한 윤상송, 광복 이후 혼란 정국에서 해운기업, 해운계 교육기관, 해군 등 한국 해양계의 여러 분야에서 해상 실무를 지휘한 이재송, 등은 이 때 개인의 자격으로 유학을 다녀온 인물들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도전적으로 당시로서는 일본 최고의 해운계교육기관인 도쿄고등상선학교와 고베고등상선학교에 수학하면서 피점령 민의 설움을 참으면서 언젠가 회복할 독립 조국의 바다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 조선인이 해기교육을 받을 기회는 한일합병이 되어서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이루어졌다. 1919년 인천에서 설립된 ‘조선총독부 체신성 고등해원양성소’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인천 시절에는 ‘인천고등해원양성소’라 불리었고, 나중에 진해로 이전했을 때는 ‘진해고등해원양성소’라 불렀다. 물론 이 교육기관은 조선인에게 해기교육을 제공하기 위하여 설립한 학교는 아니었다. 소학교 고등과(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되는 소학교 졸업자들이 이수한 2년제 교육과정) 이상 학력 소유자가 입학할 수 있는 이 학교는 순전히 일본의 정치 사회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지어졌다. 세계 1차 대전 이후 해운은 호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해상운송을 담당할 많은 해기사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일본은 자국에 설립된 해기사 교육기관만으로는 수요에 감당할 수 없어 식민지 조선에 동일한 교육기관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학교는 우리가 일제가 통치한 식민지 조선에서의 학교 교육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엄혹한 이미지와 매우 일치하는 그런 학교였다. 이것은 선박 사관 교육과 맞물려서 당시의 교육기관으로서는 수학과정이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매우 힘이 들어 입학자 수에 비하여 졸업자 수가 많이 낮은 교육기관으로 남아 있었다.

 

일본이 조선인 해기사를 필요로 한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1920년대 들어 한반도 북쪽으로 만주 지방, 중국 대륙, 그리고 아시아 전반으로 침략이 본격화되자 해상수송을 담당할 해기사가 턱없이 부족해진 것이다. 아시아를 향한 일본의 야욕은 끝이 없었다. 중국 대륙은 물론이고 남쪽으로 베트남, 태국, 버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더 나아가서는 폴리네시아의 뉴기니까지 점령했다. 그들의 정치 지리적 확장을 살펴보면 대항해시대 초기에 지구의 반대편까지 확장해 나간 포르투갈과 닮은 데가 있다. 다른 면이 있다면 한 쪽은 범선으로 수송을 담당했고 다른 한 쪽은 기계화된 금속 증기선으로였다.

일본의 한반도 식민 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는 한일합병을 하고 나서, 나중에 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해운업체가 될 ‘조선우선’이라는 기업이 설립되도록 막후작업을 했다. 이것은 당시 일본의 해운업을 주도하던 니혼유센(日本郵船)을 모델로 삼은 해운기업으로서 처음에는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 해운업자들의 출자로 운영되다가 나중에는 일본 본국의 니혼유센과 같은 대주주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조선우선의 설립과 함께 거의 꺼져가던 조선인의 해운업은 그 남은 불씨마저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처음에 한반도의 연안항로로 시작한 조선우선은 차츰차츰 한반도 주변의 근해 구역으로 활동범위를 넓혀 나갔다. 일본은 한반도와 연근해 구역은 조선우선에게 맡기고 나머지 원양구역은 본국의 대형 해운선사인 니혼유센과 오사카쇼센(大板商船)이 주로 담당하는 해운정책을 펼쳤다. 일본이 동아시아 해상권은 물론 세계 항로까지 해운 ․ 해양력을 장악하는 데에 조선은 둘도 없는 속국 파트너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해양 경략에 있어서 식민지 조선의 인재는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조선인이 해기를 습득하는 일을 매우 싫어했다. 보통선원으로 조선인을 고용했지만 그들이 기술을 습득하고 공부를 하여 해기사가 될 수 있는 조건인 해기면허증을 취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이 경우 하위 면허인 을종 해기면허가 아닌 상위 면허인 갑종 해기면허를 의미한다). 당시 조선우선에 근무하던 선장, 기관장이 대략 50여 명씩 있었지만 나중에 선장이 된 신순성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인이었다. 해기에 대한 이와 같은 조선인 배제는 1919년 인천에 총독부 소속 ‘고등해원양성소’가 설립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해운행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해운 행정기관의 육상직원에 조선인 직원을 거의 두지 않았다. 그 결과 일본이 패전하고 물러난 뒤 아직 국호조차 정하지 못하고 있던 신생조국의 해운행정은 무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실정이었다.

 

1919년에 설립된 해기 교육기관 ‘조선총독부 체신성 고등해원양성소’는 인천에서 신입생을 받아들여 해기교육을 시작했다. 당시 해기사 양성기관이 인천에 설립되었던 것은 인천 쪽이 해운물동량이 많고 경성이 가까운 것도 그 이유라 짐작된다. 학교는 교육활동이 매우 엄혹했기 때문에 신입생의 상당수가 자퇴를 했다. 그것은 망망한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을 책임지는 ‘사관 교육’에다 전시에 해군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군사훈련까지 받아야 하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과정 때문이었다. 일제는 이와 같은 선박 사관교육과 해군 예비사관으로서의 군사교육 체계를 근대화의 초기부터 구축했다. 그 결과 해운계 교육기관을 졸업하고 승선 취업한 해기사들은 평화 시에는 국가의 중요한 정책 사업인 해운을 수행하고, 전시에는 동시 징발된 일반 상선에 수송 요원으로 징용되어 피격의 위험 속에서도 맡은 책무를 충실히 수행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전쟁은 이웃나라를 불행에 빠뜨린 침략전쟁이었고, 일제가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한 1930년대 후반에는 해군 예비원령의 법적용에 따라 징용된 조선 청년들도 참전하여 어쩔 수 없이 희생을 당하였다.

 

진해고등해원양성소는 초기에는 소수의 신입생을 모집했는데 대다수 일본인이었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세계적인 해운호황 추세와 일본의 아시아 전역으로의 확장, 침략에 따른 물자 수송의 필요에 의해 부족한 해기 인력의 보충을 위하여 조선인 입학생을 늘여나갔다. 학교의 교육과정은 현재 세계적으로 채택되고 있는 각 국의 해기교육기관의 그것과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지금도 다루고 있는 항해사를 위한 항해술, 선박운용술, 화물적화, 해사법규와 기관사를 위한 주기관, 열기관, 보조기계, 등은 학문적으로 선박운항 메커니즘의 근간을 이룬다. 그들은 주 전공 교과 외에도 천문학, 구면수학, 물리, 화학, 그리고 영어와 인문학 사회학을 공부했고 일제통치에서 강행된 황국신민 의식화 교육도 교실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관급으로 제공되는 의복과 식사를 하며 기숙사에서 단체생활을 했다. 그들의 학교생활은 매우 빡빡했다. 아침 일찍 나팔수가 기상나팔을 불면 침구를 정리하고 연병장에 집합하여 인원점검을 받았다. 그리고는 아침 체력단련이 시작되었고, 몸에 흐르는 땀을 씻어내자마자 하루 일과를 위하여 학관으로 떠났다. 그렇게 시작한 수업은 오후 5시에 마쳤고, 방과 후에는 다시 체력단련을 위하여 정해진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했고, 저녁식사 후에는 약간의 휴식을 취한 뒤 순검이 있기까지 정숙하게 자습 분위기를 유지해야 했다. 그들이 매일 저녁마다 진행한 환경미화 작업에는 갑판청소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어떤 고통을 수반하는 노동행위였다. 예를 들면 나무로 된 마룻바닥을 닦아내는 데 있어서 물걸레로 닦고 나서도 물기가 남아 있으면 절대로 안 되는 일이었다. 이런 작업은 특히 추운 겨울날에는 고역스러운 것이었다. 물론 이 모든 일에는 불량한 결과에 대해서는 과실점이 주어졌고, 과실점의 정도에 따라 기합과 훈련이 뒤따랐다.

 

그들에게도 물론 황국신민화 교육은 실시되었다. 해군예비원령(전시에 선박과 함께 군에 동시 징발되는 승선복무제도)에 따른 군사교육이 병행되었기 때문에 황국신민 의식화교육은 더욱 철저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식화교육에 선박사관이 되기 위한 ‘해기 의식화교육’이 추가되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다음은 이 학교의 교가로서 중요 행사마다 불리어졌을 것이라고 가정할 때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불렀을까 궁금해진다.

 

1절 짠바람 풍기는 진해의

언덕 위에 솟아 있은 양성소

우리가 조선의 개발을

 

어깨에 들쳐메고 자라나면서

젊음도 혈기로 끌어 오르는

바다 용사의 늠름함이여

 

2절 열풍 타오르는 한 여름에도

찬바람 얼어붙은 겨울날에도

점퍼 모습의 젊은이들은

 

거룩한 사명을 한 몸에 지니고

학업에 부지런히 서둘다 보면

4년의 좌학도 꿈 사이에

 

3절 나침반 바늘이 향하는 곳

고래가 물기둥 뿜는 북해에서

노도와 싸우는 아침도 겪고

 

야자 열매 익는 남양에서

어스럼 달빛을 낚는 밤도 맞이하네

장렬 무비한 연습선

 

4절 세월은 흘러 흘러 7개년 성상

금의환양 장함이여

주어진 책임을 다한다고

 

봉정만리에 상앗대 집고

제군은 마음먹고 나라를 위해

진실한 사명을 다해야 한다네

 

* 위의 교가는 2001년에 발행된 김재승의 ‘진해고등해원양성소교사’에서 인용한 글이다. 책의 원문에는 한국어와 일본어로 각각 수록되어 있는데, 학교가 운영되던 당시는 일제강점기였으니 일본어로 불리어졌을 것이다.

 

 

교가는 그 주제 전개가 교가만이 지니는 이념, 의분강개, 나라에 대한 충성, 사명감, 개인의 각오 등을 담는 오늘날 한국의 해운계 교육기관에서 불리어지는 교가와 비교해 볼 때 큰 차이가 없다. 사실상 이 가사 자체만으로도 해운입국을 표방하는 국내 해기 교육기관의 교가로 삼아도 괜찮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 가사를 일본어로 부른다면 문제는 좀 심각해진다(당시에는 일본의 식민 속국이어서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했다). 여기에 나오는 ‘조선’은 과연 누구의 조선인가? ‘나라’는 또 누구의 나라인가? 더군다나 일본인 조선인이 같은 학교를 모교로 삼으면서 불렀으니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바라는 내선일체가 아닌가? 참 답답한 현실이었다.

 

조선의 식민수탈과 대륙 침략을 위한 민간 해운기업으로 생겨난 조선우선은 처음부터 총독부의 재정지원을 받고 있었다. 당시 조선우선이 운영한 항로는 총독부의 명령항로와 회사가 운영하는 자영항로가 있었는데 대부분이 명령항로였다. 중국대륙의 상당 부분과 동남아시아 해역권이 일본에게 점령되고 조선우선은 총독부의 전적인 지원과 보조금과 함께 회사의 경영은 크게 발전해 나갔다. 조선우선이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그들이 말하는 태평양전쟁-미국과의 전쟁으로 인해서였다. 1930년대 말부터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자 조선우선 소속 해기사들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인 해기사들도 점령국 일본의 전쟁을 위하여 참전해야 했다. 일본제국주의가 벌여 놓은 전쟁에는 이와 같은 해운기업의 정책적 운영이 있었고, 그 최전방에는 해상운송을 수행하는 선박과 해기인력이 있었다.

 

일본제국주의의 팽창이 본격화 되던 1920년대 이후, 아시아의 바다는 일본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고 있었다. 이미 오대양 육대주의 세계 항로에 상선대를 운영하고 있던 일본은 한반도는 물론, 중국 동안과 남안,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로 그 활동영역을 넓혀 나갔다. 당시 그들의 해운력은 물론이고 조선기술도 세계최강이었다. 그때 벌써 1만 톤급 이상의 대형화물선을 건조했고 움직이는 기지인 항공모함도 만들어 냈다. 그들의 해양팽창은 이와 같은 막강한 해양력에 바탕을 둔 것이다.

 

태평양전쟁을 치르기 위하여 일본은 아시아의 식민 각지에서 수탈한 원자재들을 선박으로 실어 날랐다. 쌀과 같은 곡물들이 산지에서 출하되어 선박에 적재되었고, 석탄과 같은 에너지 생산 원자재가 바다로 운송되었고, 철광석 마그네사이트 알루미늄 고무와 같은 것들은 일본 본토로 옮겨져 전쟁무기로 만들어져서는 다시 전장으로 해송되었다. 이 모든 것들의 수송의 최전방에 해기인력이 배치되었다. 일본이 미국과 벌인 태평양전쟁은 한편으로는 군수물자의 싸움이었다. 전장에 식량과 포탄이 보급되고, 전쟁무기와 군수품을 만들 공장에 원자재가 제대로 보급되어야만 버텨낼 수 있는 그런 싸움이었다. 전쟁 중에 아시아의 바다에서는 수많은 군수품을 실은 일본 상선들이 물속에 가라앉았다. 침몰된 상선의 수에 비례하여 육상의 해기인력 양성 교육기관에서는 신입생의 모집 정원도 늘어났고, 그것도 모자라 조기졸업을 시켜야만 했다.

 

근대의 바다에서 수송을 담당한 상선은 처음에는 군함을 겸용하는 항해선이었다. 그들은 적재능력과 감항능력이 뛰어난 캬라벨선에 막강한 대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유럽열강이 대확장을 꾀하던 대항해시대에 아시아와 신대륙의 해항 입구에서 대포의 위력을 과시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낯선 이방인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으려는 장차 식민 속국이 될 땅의 원주민들에게 유럽의 발달된 전쟁무기는 공포 그 자체였다. 신대륙 안데스 산맥의 인구가 수백만 명이었던 잉카제국이 200이 채 안 되는 총포로 무장된 유럽 병사에 의해서 멸망당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당시 상황을 잘 설명해 준다. 교역을 담당하는 상선이 군함의 기능을 더욱 발달시켜 나간 데에는 그들의 해양팽창으로 인한 세력다툼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항해시대 후반에 접어들어 그들의 교역선들은 지구상에서 만나지 않는 바다가 없을 정도로 충돌을 했고 그와 더불어 해전을 감행했다. 전 지구적으로 항로가 밝혀지고 위험을 감수하며 문을 두드려야 할 미지의 항구도 별로 남지 않은 수출과 수입이라는 무역활동이 예측가능한 시점이 되자 상선과 군함은 분업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서구의 해양팽창에 일본이 숟가락을 얹었다. 근대화를 위한 일본의 시점포착은 절묘했다. 미국 페리함대에 의해 개항 당할 때만 해도 그들은 쇄국과 개국을 놓고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당시 일본지도층은 ‘문명개화’를 놓고 결론을 못 내리고 있었으며 실권을 쥔 막부는 지방 번주들과의 갈등에 시달리면서 나라 정치는 안정되지 못했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4개국 연합함대에 의해 그들의 해안기지가 형편없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 손을 든 일본은 1854년 개항을 했다. 물론 불평등조약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미국으로 영국으로 사절단을 파견하고……, 마침내 메이지유신이라는 현대 일본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사회적 혁신을 단행했다. 입헌군주제 내각제로 새로 출발한 일본은 근대화 문명화를 향하여 교육혁신을 이루고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고 공장을 지어 공산품을 생산하여 식산흥업 부국강병의 길로 나아갔다.

 

그렇지만 일본이 이렇게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일본의 성공이 해양국가로 지향한 데에 있다고 본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한 자질 형성은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4, 15세기에 이미 일본은 소규모이지만 일본 열도 남쪽으로 동남아시아와 교역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상선에는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사무라이가 승선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이들 해양세력은 어디에서 연원하는가, 라는 의문점이 남는다. 사학자 김성호의 주장에 따르면, 고려 말기 그때까지 흥업하던 중국 동안과 한반도에서 활동하던 한민족 해상세력의 ‘조선造船, 해기의 계승’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 사실 고대에 동아시아 국가 간 해상이동에서 일본은 그것을 수행할 선대도 항해인력도 갖추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일본 최고 지식층에 속하는 승려 엔닌의 ‘엔닌일기’에 서술되어 있는 내용에서 충분히 입증된다. 약 10년간 동안 당시 선진국인 당나라로의 여행에서 그가 이용했던 선박은 모두 한민족 해상세력으로 표방되던 장보고 선대였다. 이들 한민족 해상세력은 나중에 새 왕조로 들어선 고려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였는데 고려 말에 대륙의 새 주인이 된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으로 대륙에서나 한반도에서나 활동을 거부당했고, 그러고 나서 이들 해상세력과 그들이 지닌 조선, 해기 기술은 자연스럽게 일본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 동의한다면 중세에 동남아시아에서 진행된 일본의 해상활동이 쉽게 납득이 된다. 조선이 성리학의 이념에 눌러앉아 민民을 ‘농자천하지대본’으로 의식화해 나갈 때 일본은 동남아시아의 바다에서 후일 근대 자본주의 국가의 에너지가 될 해상활동과 무역을 수행하고 있었다.

 

근대 이전에 비록 제한적이었지만 일본은 서양의 문물과 만나고 있었다. 그들은 네덜란드로 하여금 나가사키 앞바다의 데지마 섬에 상관을 두고 교역을 허용했다. 과학문명화와 관련된 적지 않은 물품들이 나가사키로 흘러들어왔고 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네덜란드로 대표되는 유럽의 의학서적이 일본의 양식 있는 의사의 손에 전해졌다. 그 서적은 외과수술을 위한 인체해부도였다. 인체 내부의 근육과 장기조직을 묘사한 그림은 정밀했다. 아직 알파벳 글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림만 보아서도 인체의 구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어떤 충격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그 때까지 중국 대륙에서 제작된 책을 기반으로 이해하고 있던 인체구성의 개념이 오류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까지 그들을 지배하던 중화세계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자연히 네덜란드 알파벳으로 기록된 문장의 번역이 필요하게 되었다. 새로운 문자에 대한 상상을 초월하는 관심과 열정과 노력이 뒤따랐다. 상관에 입항하는 네덜란드 상인에게 묻기도 하고, 단어 하나를 번역하는 데에 며칠씩 걸리는 일도 숱했다. 결국 이들은 네덜란드가 전해주는 근대 유럽의 실용학문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또 당시 이들은 네덜란드와 유럽의 발전이 상당 부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열대권의 풍부한 산물과의 만남에서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훗날 일본이 식민제국주의 국가의 길을 가는 데에 근원적 상상을 제공했다.

 

일본의 동남아시아 열대 해역권에 대한 지정학적 야망의 과정은 대략 이러하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였지만 근대 이전부터 이미 동남아시아의 바다를 항해하며 교역에 참여했던 일본은 유럽의 대항해시대가 진행되면서 그들의 상선들과 만나고 있었다. 원자재와 풍부한 동식물이 있는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지에서 패권을 다투던 네덜란드와 영국의 전투에 일본 사무라이들이 네덜란드의 용병으로 참여하는 일들도 있었다. 여기에는 16세기 말 임진왜란 중에 끌려가 노예가 되어 사무라이에 합세한 조선인들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열대의 해역권에서 교역과 전쟁의 형식으로 지정학적 영역을 확장해 가던 서구열국의 해상활동을 일본 상선의 사무라이들은 지켜보았을 것이다. 이들 중 특히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된 것은 네덜란드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동남아시아 일원의 식민지와 교역주도권을 가지면서 수많은 원자재와 동식물을 본국으로 가져갔는데 이것이 네덜란드는 물론 유럽이 근대화되고 자본주의 사회가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형적인 식민제국주의, 해양강국이었던 네덜란드가 손을 잡은 아시아 국가는 일본이었다. 17세기 중엽, 나가사키 앞바다 데지마 섬에 네덜란드 상관이 설치되고 일본은 부분적이긴 하지만 제도적으로 서양 문물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정기적으로 데지마 섬에 입항하여 쏟아놓는 네덜란드의 물품에 일본인 관리들과 상인들이 열광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전해 준 과학기술 문명의 결과물들은 오랫동안 중화中華에 머물던 그들의 세계관에 변화가 필요함을 깨닫게 만들었다. 당시 일본의 깨어 있는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유럽의 실용적 학문을 연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훗날 일본이 근대화로 가기 위하여 메이지 유신이라는 사회 전반의 혁신을 단행할 때 정치가들과 사상가들의 정신적 토양이 되었다. 그들은 여기에 더하여 근대에 서구가 저지른 식민제국주의 국가의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실천에 옮겼는데 그 확장 침략의 제1순위는 한반도였다. 이 모든 일에 그들 식민 제국주의자들의 열대 바다, 열대 해역권에 대한 환상이 함께 했음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겠다.

 

네덜란드 상관이 있던 데지마 섬에는 정기적으로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멀리 대양을 건너 수많은 시간을 항해하여 이곳에 도착했다. 머리 색깔도 다르고 얼굴색도 하얀 그들은 대체 누구인가? 왜 저렇게 위험한 바다를 항해를 하여 이곳까지 온 것일까? 이런 진귀한 물품들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그들의 풍요로움은 어디서 왔는가? 열대 해역에 식민지를 두고 그 풍부한 산물을 본국으로 가져간다고 하지 않았나. 이렇게, 데지마 섬의 상관에서 교역을 하며 일인들은 그들 네덜란드 상인에 대하여 수많은 상상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교역한 물품을 가득 싣고 데지마 섬을 출항하여 다시 대양 항해를 떠나는 네덜란드 상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을 것이다.

 

이처럼 일본의 근대화 문명개화 식산흥업 부국강병 식민제국주의의 과정에는 서구 문명과의 만남과 더불어 열대 해역권에 대한 지정학적 학습과 문화적 만남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중요한 수행도구는 수송을 담당할 선박과 해기인력이었다. 나라의 문을 열고 사회 전반의 혁신을 단행한 일본은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빠르게 성장해 갔다. 본격적인 과학기술 교육을 시작하고 산업화에 성공한 일본의 조선과 해운산업은 당시로서는 세계적인 수준으로 급부상했다. 일본 조선소가 건조한 대형 화물선들이 세계항로에 취항하면서 세계의 바다에는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서구 유럽의 해양국들뿐만 아니라 일본 상선대가 강력한 경쟁상대로 떠올랐다. 대륙으로의 대확장에 성공한 일본은 일본 본국의 해운에게는 세계항로에, 한반도의 해운에게는 연근해 항로로 역할분담하며 급성장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영역확장을 계속하던 1930년대에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항로의 중계운하인 수에즈 운하에서 일본 국기를 게양한 상선을 본다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당시 운하를 통과하던 상선의 선원들은 배에 오른 이집트 상인(운하통과 시 이들의 승선은 불법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선실 복도에 주로 카펫과 특산물을 내놓고 상행위를 했다)들에게서 먼저 통과한 일본 화물선의 승무원들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곤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상호간의 정보를 공유하면서 나름대로 해양문화 선원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1941년에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데에는 그들의 막강한 해양력에 의지한 바가 컸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태평양전쟁으로 치달으면서 일본의 상선과 해기인력은 군수물자 수송에 동시 징발되었다. 니혼유센, 오사카쇼센, 조선우선 소속의 수많은 상선들이 일본본토와 한반도에서 남중국해와 필리핀군도 인도네시아 해역을 오가며 곡물과 고무, 철광석, 석탄, 마그네사이트와 같은 원자재와 일본 본토로부터는 공산품과 전쟁무기를 실어 날랐다. 자연히 이러한 수송선들은 적인 미 해군의 피격 대상이 되고 있었다.

 

역사 공부치고는 매우 처절한 학습이고 혹독한 결과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 자국민에게나 식민지인 조선인에게나 실험해서는 안 되는 정치외교적 실험이 되고 있었다. 세상에 문명개화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겠다면서 아시아 전체 민들을 전쟁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다니! 거기에 쓸려간 조선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남방군도를 출발한 일본 수송선들이 가라앉는 빈도는 점점 더 증가하고 있었다.

 

당시 군수물자와 인명을 실은 일본 수송선은 미 잠수함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그들은 잠수함의 어뢰공격에 대응하기 위하여 구축함이 호위하는 선단을 이루면서 이리 저리 갈지자로 궤적을 그리면서 항진했다. 그러다가 한 척이라도 피격되어 침몰되는 것을 목격하면 선단은 분산되고 제각각 길을 갔다. 혹시라도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여 기적적으로 다른 배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은 이들은 부상의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일생을 살아야 했다. 일본 천황의 우상화와 인민들의 황국신민화의 정치신념과 사회적 기류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내선일체를 강요받으며 징병된 조선 해기사들은 일본의 전쟁을 위한 ‘개죽음’을 피하기 위하여 의사진단서를 첨부한 질병 하선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진단 기간이 지나면 다시 승선을 해야 했다. 승선한 배에서는 일본인 선원과 조선인 선원의 미묘한 또는 노골적인 갈등이 상존했다. 대개 승선 해기사는 일본인(상선 1척에 10명의 승선 해기사로 보면 평균적으로 1명 정도, 많게는 2명의 조선인 해기사가 있었다), 보통선원은 조선인이었는데 이러한 갈등은 사관과 보통선원이라는 해기인력 특성상 내재하는 갈등과 맞물려 늘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승선 중 가장 큰 불안은 역시 적 잠수함의 어뢰 공격에 의한 전손 침몰이었다. 배가 갑작스럽게 침수되어 가라앉을 가능성은 언제라도 있었기에 그들은 죽음의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다.

전쟁 말기에 들자 일제는 군수물자 부족으로 공출을 강요하고 무기를 제작하기 위하여 쇠란 쇠는 다 끌어 모았는데 가정집의 놋쇠 밥그릇과 숟가락 젓가락도 모두 빼앗아 갔다. 바다에서는 쓸 만한 상선들 중 상당수가 가라앉았고, 나중에는 배가 부족해 폐선에 가까운 노후선을 남방 항로에 띄웠다. 그와 같은 배는 애초부터 수송항해가 무리였다. 그 배들 중에 기관고장을 일으킨 배의 승무원들은 침몰 직전에 탈출하여 남방의 이름 없는 무인도에 상륙했지만 식량을 구할 수 없어 겨우 쥐 같은 것을 잡아 연명했다는 증언도 있다.

 

바다에서 참으로 긴박하고도 지리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망망대해 무원고립한 바다라는 광대한 자연공간에서 경험되고 있었다. 맑은 열대 바다에서 낮에는 뜨거운 태양에 밤에는 반짝이는 별을 보면서 누구에게나 성찰하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마도 침략자에게는 진지한 자기반성을, 그리고 피점령인에게는 자기정체성의 물음을 바다는 던지고 있었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대양에서는 그렇게 제각각 자신을 돌이켜보는 시간이 흘러갔다.

 

바다가 품는 ‘물의 심상’은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작용하는 보편적 심리현상, 그 하늘 아래 같은 공기로 숨을 쉬며 살아가는 존재들이 갖는 대자연과의 심리적 공명이 있게 마련이다. 무원고립, 그러면서도 변화무쌍한 바다공간에서 그들은 인간의 유한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들은 신기루처럼 지는 일몰을 바라보면서 피안의 세계를 동경했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열대 잿빛 바다를 지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드나드는 희랍 신화의 뱃사공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육지를 떠난 지 오래이고 여전히 바다인 삶의 공간에서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오늘도 요정 시레네우스는 노래를 부르며 바다사람을 어딘가로 불러내는 것이다. 차라리 그런 착각과 혼돈이 지금의 불안 고통을 잊게 하는 것이리라.

 

한편으로 바다는 모든 생명들의 모태이었다. 거기서 인간은 태어났고 불순하기 짝이 없는 흙에서 자라난 것이다. 저기 해면에서 물을 뿜는 거대한 생명체를 보아라. 얼마나 순수하고 장엄한가. 그들이 태어나고 자라나게 한 바다는 그들을 위하여 수많은 생명체를 희생시켰다. 그러면서도 바다에서는 어떤 불평도 불만도 없이 늘 평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다이다. 바다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저들은 대관절 누구인가? 누구이기에 우리를 이렇게 지휘하는가? 누가 우리를 이곳으로 오게 하는가? 이것은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그들은 왜 전쟁을 하는가? 왜 우리는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가? 왜 저들은 대륙으로 침략해 들어갔으며 동남아시아로 확장하면서 식민지를 넓혀 나갔는가? 미국과의 전쟁이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수많은 의문들이 스쳐갔음이 확실하다. 일본으로 해기유학을 한 조선인 해기사들은 더더욱 그랬다. 지금 한국의 학제로 치면 고졸 이상 학력이 입학할 수 있는 도쿄고등상선학교와 고베고등상선학교는 일본인들도 매우 우수한 인재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해기 교육기관이었는데 나중에 해방 정국과 6.25전쟁을 전후한 기간 동안 한국 해운을 위하여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황부길, 이시형, 윤상송, 이재송 등이 여기를 수학했다. 그들은 사회 전반에 걸쳐 근대화를 이루며 산업사회가 되어 가던 일본사회를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 식민제국주의의 정치철학과 국가이념이 해양활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학교에서의 수학과정 중에서, 그리고 해운기업에서 승선실습하며 우수한 저네들의 해기 과학기술(당시 해기 과학기술은 가장 최첨단 기술 중의 하나였다)을 경험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조선인으로서의 자존, 자부심을 결코 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훗날 신생 조국에서의 해기, 해운 활동을 정리하고 기록한 그들의 어록에서 잘 확인된다. 그들은 모두 한국의 해운건설의 아버지였다.

 

‘해기’에게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일본은 망할지라도 조선에게는 해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일본 해기 유학파들과 조선의 해기 교육기관 출신자들 중 태평양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일본이 패망해가는 바다를 떠돌며 언젠가 찾아올 신생조국의 독립을 꿈꾸고 있었다. 일제 말기, 시대의 징후는 가장 먼저 바다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 심호섭, 해양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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