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전쟁과 해운

등록일202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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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전쟁과 해운

     -6.25전쟁과 해운 해기의 역할

 

대한해운공사 소속 웅진호에 승선 근무 중이던 1등항해사 박현규는 6.25 전쟁이 발발한 다음 날일 26일 새벽 해군본부로부터 작전명령을 받았다. 당시 박현규의 웅진호와 같은 회사 소속 문산호는 동해안의 묵호항에 정박해 있었는데 해군의 지시에 의하여 묵호경비부의 전 장병과 군수물자를 적재하고 포항으로 철수하는 작전에 동원되었다.

 

묵호항을 출발한 배는 포항 앞 바다에 이르렀다가 다시 북상하여 삼척, 북평 근처 해역에서 해상경비 활동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밤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선박을 발견했다. 그들은 즉각 그 선박을 향하여 소총을 발사했는데 그 선박에서도 즉각 포격을 가해 와 문산호는 피항하여 삼척 연안의 모래밭에 배를 얹히게 하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자 드러난 이 거대한 괴선박은 함상에 미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미 함정의 도움을 받아 사태를 수습한 문산호는 우리 측 함정들과 함께 연안을 따라 후퇴하는 육군과 경찰 병력을 곳곳에서 승선시켜 포항에서 이들을 하선시키고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6.25전쟁은 대한해운공사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일본으로부터 힘들게 반환받아 수리를 하여 운항하고 있던 선박들과 교통부가 운영하던 관영선박을 합쳐 모두 33척으로 민과 관이 ‘해운입국’의 일념으로 일치단결하여 여러 어려운 과정을 거쳐 일궈낸 새로운 해운경영조직인 ‘대한해운공사’를 발족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전쟁이 발발하여 우리들의 해운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전쟁 발발 확인 즉시 해군본부는 수송을 위하여 대한해운공사의 선박 중 미국으로부터 대여 받은 선박 20척을 동원 징발했다.

 

서해 쪽에서는 인천항에 정박 중이던 단양호가 위기를 맞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단양호는 해군에 동원되어 인천항에서 물자를 적재하고 수송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배에는 한국해양대학 실습생들이 승선해 있었고 선장은 태평양 전쟁 중 대양에서 여러 번 사선을 넘은 적이 있던 이재송이었다.

 

공산군이 서울을 넘어 인천 시내를 장악하고 이쪽 인천항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첩보가 전해지자 갑문(인천항은 지금도 그렇지만, 조수차가 너무 커 갑문을 개폐하여 배가 출입했다)을 담당한 항만직원이 손을 놓고 도망을 가고 말았다. 조수가 만조가 되어 배를 움직여 떠나야 하지만 갑문이 닫혀 있어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태, 다시 공산군이 부두로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달되었다. 다급해진 이재송은 그렇지만 침착하게 실습생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특공대로 나선 몇 명의 학생들이 공산군들의 시선을 피해 갑문개폐실로 잠입하여 개폐기를 힘들게 수동으로 작동했다. 드디어 갑문이 열리고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공대가 무사히 돌아왔음을 확인한 이재송은 크게 출항 신호를 울리게 했다. 잠시 후에 엔진이 걸리고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사태를 눈치 챈 공산군들이 일제히 사격을 하기 시작했지만 단양호는 아무런 이상 없이 출항하여 항진해 갔다. 만약에 당시 탈출에 실패하여 배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선체와 거기에 적재된 물자와 그리고 중요한 해기인력인 실습해기사들을 잃게 되어 한국 해운은 손해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인천항을 떠난 단양호는 해군작전 수행을 마치고 학교가 있는 군산항으로 돌아갔다.

 

군산에서는 한국해양대학의 학장 이시형이 학교의 향방을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진해의 교사를 미군정에 내주고 교사를 마련하지 못한 채 폐교 위기 상태에서 거의 기적적으로 마련한 군산 교사였는데,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여 이미 전국의 대부분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고 많은 사람들이 부산 지역으로 피난을 갔거나 떠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시형은 재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모두 떠난 지 20여일 만에 군산을 떠났다. 그 후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자 군산으로 돌아왔지만 교사는 사라지고 없었다. 폭격을 당한 것이다.

 

전쟁 중에 수많은 원조물자, 군수물자들이 해외로부터 들어왔다. 물론 이러한 물자들의 수송은 한국 선박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한국 선박 즉, 대한해운공사의 선박들은 해군작전에 참여하여 주로 연안수송을 맡았다. 전시에 한국 해운이 담당했던 수송 분야가 비록 연안 수송에 한정되었지만 이것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내륙의 도로들이 상당수 파괴되어 기능을 상실했던 상황을 생각한다면 우리 해운이 수행한 해상운송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겠는가. 삼면이 바다이고 해안인 반도국가에게 해운은 그야말로 생명줄임을 증명한 셈이다.

 

연안에서 연안으로 수많은 물자와 인력들이 수송되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국제시장’이란 영화에 보면 흥남항 부두에서 민간인들이 탈출하기 위하여 배에 오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전시에 해상운송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전쟁 발발 초기에 우리 해군 수송 선단은(동원된 민간 상선 포함) 서울을 탈출하여 목포에 도착한 대통령과 각료 일행을 임시수도인 부산에 이동시켰고 서울이 수복된 이후에는 정부의 요인과 정부 각 기관들을 피난지 부산에서 인천으로 수송했고, 그외에도 군병력과 군수물자, 민간인들의 이동이 해상수송으로 이루어졌다. 이처럼 6.25전쟁 중에 서해안, 남해안, 동해안에서는 인력과 물자 수송을 위하여 해상운송이 진행되었는데 대한해운공사가 보유한 대다수의 선박이 동원되어 작전에 참여했고, 그 현장의 수행자는 물론 해기인력들이었다. 특히 민간인들과 민수물자 수송을 위하여 해운국은 부산역 구내에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임무를 수행했는데 그 분주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6.25전쟁 시 물자와 인력의 해상수송을 담당한 상선들의 활약은 참으로 대단했다. 화물운송을 위하여 바다에서 항해 중인 대한해운공사의 선박들은 회사로부터 전쟁발발과 향후 선박 운항은 해군본부의 작전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무선전신 연락을 받고 작전해역에 투입되었다. 6.25전쟁에서 해군에 징발된 대한해운공사 선박들의 수송 활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해양대학생 120명이 실습 승선 중이던 단양호(선장 이재송)는 인천항에서 양하를 마치고 귀항 도중 군산 앞바다에서, 전쟁이 발발하여 선박과 인력이 군에 징발되어 향후 해군본부의 지시에 따른다는 무전연락을 받았다. 단양호는 해군 작전명령에 따라 급선회하여 웅진반도의 철수병들을 인천항까지 수송하였다. 그러고 나서 단양호는 부평에 있던 육군창고의 군수물자를 군산항까지 수송하였는데, 인천항에서 출항 시 공산군이 부두로 진입했지만 갑문 개폐 직원이 도주하고 없어 학생들이 직접 손으로 작동하여 탈출하는 위기를 겪었다.

2. 7월 20일, 광주를 점령한 공산군이 목포로 향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징발선 김천호와 울산호를 이용하여 정부미 8만 가마를 부산으로 수송하였다.

3. 7월 23일, 목포경비부는 징발선 단양호에 병력을 승선시켜 해상으로 철수시키고 정세를 관망했다.

4. 7월 24일, 적이 순천까지 진입해 오자 해군은 조치원호와 안동호 등 8척의 징발선을 여수로 파견하여 아군의 해상철수를 수행하고 정부물자와 군수물자를 선적했다.

5. 전쟁 중에 제주도에 육군 제1훈련소가 설치되었고 그밖의 많은 부대도 제주도에 집결되어, 징발선들은 훈련병을 비롯한 각종 보급물품을 제주도로 수송하였다.

6. 서해안에서 피난민 대열이 계속 이어졌다. 서해안에서는 주로 진남포와 인천항에서 피난민을 승선시켜 부산이나 거제도까지 수송했다.

7. 흥남항과 원산항등 국군이 진격했다가 후퇴하는 지역의 해항에서는 대한해운공사 소속 징발선들이 철수하는 국군을 승선시키고 남는 공간에 피난민들을 동승시켰다. 이와 같이 국군 철수 과정에서 징발된 수송선에는 국군을 승선시키고 남는 공간에 민간인을 승선시켜 피난을 도왔다. 그때 어느 선박이 어디서 어디까지 얼마나 수송하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는다.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에 나오는 가사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는 이와 같은 당시의 정황을 가장 잘 표현한 유행가이다.

 

이러한 징발선들은 북한군이 남침하여 급속하게 남한을 장악함에 따라 낙동강 전선 등 남해안의 몇몇 교두보만 남은 상황에서 군 병력과 무기, 식량, 옷감, 차량 등을 수송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 지상군의 총반격이 시작된 이후 해상전투는 주로 유엔군의 기동함대가 담당했고, 한국 해군의 주된 임무는 수송활동으로 전환되었는데 해군의 지휘 아래 이 수송활동의 상당 부분을 징발선들이 맡았다. 당시 전쟁물자 대부분이 유엔군에 의해 일본과 미국 등 외국에서 조달되어 운반되었고, 부산항이 보급기지 역할을 하여 거의 모든 군수물자가 이곳에서 각 전선으로 배분되었다. 6.25전쟁 중에 징발된 대한해운공사 소속의 선박은 모두 20척이었다. 이들 선박 중 14척은 군 수송에 6척은 민간수송에 종사했고, 공사 소속 선박 중 볼틱형 선박 6척은 멸손을 피하기 위하여 일단은 일본으로 옮겨졌다.

 

6.25전쟁은 남한으로 보아서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전쟁이었다. 그렇지만 바다의 해상운송인 즉, 해기전문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승선한 선박이 해군에 징발되자마자 작전해역에 투입이 되어 작전명령을 수행하는 데에 전혀 이상이 없었다. 전쟁 당시에 해운계에서는 이처럼 유능한 해기 인력이 백삼사십 명 정도 있었는데, 그들은 상당수가 일본이 벌인 태평양전쟁에 동원되어 수송활동을 하면서 사선을 넘나들었거나, 해방 후 해기사 양성교육기관인 한국해양대학에서 소정의 군사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6.25전쟁에서 북한의 해군이 열세였던 점은 한국 해운의 미래를 위하여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해군의 대부분의 수송선들이(상당수의 민간선박이 동원되었다) 미해군에 의해 바다 속에 가라앉았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해가 되는 일이다. 전시에 수송선의 해기인력은 그만큼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6.25전쟁 중에 해상운송 인력확보의 중요성을 깨달은 국방부는 상선 해기면허 자격자와 일정기간 승무경험자들에 대한 징병을 유예하는 조치를 취했다.

 

6.25전쟁에서 해군에 징발된 상선은 수송활동뿐만 아니라 상륙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대한해운공사 소속 상선의 상당수가 미국으로부터 대여 받은 2차 세계대전 시 전쟁표준선으로서 상륙작전에 투입된 LST형이었다. 상륙작전은 그 특성 상 어렵고 위험이 따르는 작전으로서 운항을 맡은 해기 인력도 희생을 각오해야 했으므로 실제로 전쟁 당시에 연합군의 상륙작전에서 해기인력도 위기를 겪어야 했다.

 

미 극동군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면서 적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교란작전을 전개하였는데 장사상륙작전과 석도상륙작전이 바로 그것이다. 장사동은 포항 북쪽에 위치한 작은 어촌이며 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육군특수공작대 772명을 승선시키고 1950년 9월 13일 오후에 현지 해역에 도착한 징발선인 문산호는 높은 파도와 안개가 심하게 껴 해안에 착안着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육지에서 약 30미터 떨어진 곳에서 로프를 이용해 상륙작전을 감행했는데, 적의 맹렬한 사격과 함께 문산호는 심한 파도에 떠밀려 좌초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문산호는 해군본부에 구조요청을 하였고, 미군의 해난구조선과 대한해운공사 소속 조치원호가 현장에 도착하여 구조작업을 벌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조치원호는 미군함대의 엄호사격과 함께 적의 맹렬한 사격을 받으면서 인명만을 구조하는 데 성공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났다. 이 문산호에는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실습 차 승선해 있었다.

 

석도상륙작전에 투입된 징발선은 홍천호였는데, 석도를 향하여 항진 중 적으로부터 맹렬한 해안포 공격을 받았다. 그 중 한 발이 홍천호에 명중하여 선측에 큰 파공이 나 선체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선교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아래의 기관실로 내려가 숨어 버렸는데, 이대로 두면 배는 석도를 향하여 그대로 돌진할 상황이었다. 그 때 1등항해사 박현규는 조타수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키를 잡게 하고 배를 후방으로 돌려 피항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홍천호는 적탄을 한 방 더 맞았다. 결국 홍천호는 심하게 파손되어 정상 운항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다. 이대로라면 홍천호는 계속 포격을 당해 침몰할 것이 명백해졌다. 천신만고 끝에 홍천호는 연평도로 내려와서 해안에 좌초시켰고, 연평도에서 우선 급한 곳을 수리하여 겨우 운항할 수 있는 상태에서 부산으로 항해하여 대한조선공사에 입거, 수리작업을 하였다.

 

6.25전쟁에서 대한해운공사의 선박들은 기뢰 제거 작업에도 투입되었다. 통영수산공립학교를 졸업하고 이 회사에서 선장으로 승선근무한 김윤석(1962년에서 2002년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해운기업 중 하나인 천경해운을 경영했음)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전쟁 중에 징발된 선박에 승선하면서 장전, 고정, 원산 부근의 해역에서 기뢰를 제거하는 작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한해운공사의 징발선 영등포호는 원산에서 기뢰에 접촉되어 침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징발선의 ‘해기’는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육지는 육지 나름대로 군병력과 군수물자 그리고 민간인들과 민간 수요 물자의 해상수송을 지휘 관리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바다에서는 항해와 적재 양하 작업으로 바빴다. 육해상에서 대한해운공사의 ‘해운’ 시스템은 전시에 맞춰 바쁘게 돌아갔고 그에 따라 바다의 해기는 그 능력이 양적으로 질적으로 점점 향상되어 갔다. 대한해운공사가 기존에 보유한 선박들은 여전히 운항상태가 잘 유지되었으며 유엔군으로부터 새로 도입된 선박에서는 새로운 항해기기와 엔진 사용법을 익힐 기회가 있었고, 이제 갓 졸업한 국립해양대학(구, 진해고등상선학교) 해기사들은 3등항해사 ∙ 3등기관사에서 2등항해사 ∙ 2등기관사로, 1등항해사 ∙ 1등기관사로 승진했다. 전시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일본으로 철수한 선박 6척이 되돌아와서 민수 분야의 운송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 후 추가로 대여 받은 전표선 6척과 함께 한국 수송 선대는 운송능력이 더욱 확장되었다. 이대로라면 종전 후 한국 해운은 더욱 보강된 선복량으로 힘차게 날개를 펴 나갈 것 같기도 했다.

 

전쟁 중 한국 해운의 걱정은 해기인력 양성 교육기관인 국립해양대학의 불안한 진로에 있었다. 전쟁 내내 학장 이시형과 몇 안 되는 교직원과 학교를 신뢰한 재학생들의 고통과 희생이 있었다. 진해의 교정을 해군병학교(지금의 해군사관학교)에 내어주고 인천으로 쫓겨 가 부초처럼 떠돌다가 어렵게 마련한 군산 교사가 전쟁 중에 폭격으로 소실되고 만 국립해양대학은 이후 다시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학장 이시형과 교직원들은 부산의 대한조선공사 도크 안벽에 계류 중인 목조 소해정 YMS에서, 해운대국민학교를 빌려서, 다시 군산으로 돌아가 폭격으로 거의 잔해만 남은 교정에서, 또 다시 부산으로 와 거제리의 교통고등학교에서 천막을 짓고 학사를 진행해 나갔다. 본래 해기사 양성 교육기관은 그 특성 상 거의 전액 관비로 운영되어야 하지만, 졸지에 전 국민이 겪는 환난이어서 재정의 어려움과 학사를 진행할 교사건물과 선박사관 근무 생활 교육이 진행될 생활관이 미비 되어 학장 이시형과 소수의 교직원들은 이합집산하는 학생들과 함께 하루하루 어렵게 학사를 이어갔고, 그렇게 국립해양대학은 앞날이 불투명하여 언제라도 학교 문을 닫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들 교직원과 학생들은 현재의 고난과 고통에 결코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려울 적마다 선생은 학생을 격려하고 학생은 선생을 따르며 역사가 주는 시련의 질곡, 굽이굽이를 넘어가고 있었다.

 

사실 당시 이 학교의 초기 졸업생들이 훗날 한국 해운을 일으켜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전란 속에서 교사는 폭격으로 전손되고 전황에 따라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실습할 기자재도 없었고, 몇 안 되는 교수진과 흩어졌다가 모이곤 하는 학생들-, 이와 같은 상황인데 이들이 뒤에 한국 해운을 건설하는 인재가 될 것이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학교가 폐교의 위기 속에 부침을 계속하던 때 사회일반은 물론, 정부 인사나 정치인들도 이 해기인력 양성 교육기관에 대해서 회의적이거나, 또는 무관심했다. 그들은 근현대 국가의 성립에 있어서 해운이 얼마나 중요한가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전시에 국가 재정이 이처럼 어려운 때에 해기사를 양성하는 4년제 대학을 운영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생각을 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들의 판단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한 국가가 무역을 하기 위하여 외항해운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선박과 화물, 자본, 해운경영 노하우 등을 갖춰야 하는데, 차후 한국 경제와 해운의 미래를 예측해 볼 때 4년제 해운계대학을 수료한 해기인재들이 활동할 만한 그 어떤 가능성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장의 수요에 맞춤하는 1년제 정도의 직업학교로 운영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들이 있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국립해양대학과 한국 해운의 가능성의 그 희미한 줄을 놓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황부길, 윤상송, 이재송, 김용주, 유항렬, 홍순덕, 방상표, 정해춘, 김원탁, 지석남, 성철득……, 이들 한국 해운 1세대들은 전란 중의 국립해양대학의 항진을 비상한 관심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6.25전쟁이 한국 해운의 발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것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 대한해운공사로 상징되는 한국해운이 그리 많지 않은 선대와 빈약한 선복량이지만 스스로의 해운경영으로 외항해운을 시작했다는 사실과, 반면에 전쟁으로 인해 그 발전의 연속성은 단절되었지만 급증한 원조물자와 민수물자의 수송을 위하여 외국으로부터 최신의 선척이 다수 도입되었고, 전쟁 중에 징발된 모든 선박이 수송활동을 전개하여 승선 근무한 해기인력 활동의 극대화에 따른 전체 해기사들의 해기능력 향상이 이루어졌다는 양면성이 있기 때문이다. 외국으로부터 원조 문제 있어서는 물론, 이것은 국가 경제사회 전체에 해당되었던 확실히 절대적인 혜택이었다. 거기에는 전쟁 국민에 대한 유엔의 인도주의와 함께 삼면이 바다를 낀 반도국가라는 지정학적 입장과 주변 관련국의 국방 외교적 판단도 작용했지만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물자들이 바다를 건너왔다는 사실이다. 이후 한국 사회는 바다와 해운에 대하여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 그 동안 해기 해운 사회가 외치던 ‘해운입국’이란 이념적 용어가 사회일반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6.25전쟁의 발발은 확실히 한국 해운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으로 끌고 갔다. 참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국토의 시설과 도로가 심대하게 파괴되어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지만, 오히려 바다에서는 선박들이 더욱 왕성하게 활동했다. 턱없이 부족한 민수물자 수송을 위하여 선박들이 일본을 오가면서 드디어 1950년 10월, ‘한일 간 잠정 해운협정’이 체결 발효되었고, 그 동안 제한적으로 통항하던 일본으로의 항해와 무역이 자유롭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후에도 그랬지만 한일간 화물운송은 상당 부분 일본 선박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런 문제는 우리 해운이 ‘자국화자국선’이라는 웨이버제도를 채택한 196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전쟁의 와중에 한국 해운이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취항을 시도했다는 것은 당시의 형편으로 볼 때 매우 특이한 일이다. 당시 극동해운은 태평양전쟁 때 부산항 앞바다에서 침몰한 배를 인양, 수리하여 고려호라 명명하고 운항요원을 승선시켜 멀리 대양으로 떠나보냈다. 고려호는 42명의 선원이 승무했는데 운항 관리급인 해기사들은 모두 해군 함정 장교들이었다. 이후 한국 해운과 해기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두터운 안개 속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심호섭, 해양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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