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바다부터 잃다

등록일202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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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바다부터 잃다

-해양의 지정학적 원리와 조선의 망국

 

그들은 대양을 건너왔다. 그들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으면서 섬과 산봉우리 같은 육지의 항해물표의 방위를 관측하며 항해하는 안전한 ‘연안항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나침반과 하늘의 천체를 관측하여 선위船位를 구하고 하늘이 흐려 별을 볼 수 없을 때는 대략적인 추측위치에 의존하며 항진하는 대양항법으로 그들로 보면 세상의 끝인 이곳까지 왔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한 쪽은 선린善隣이 지고한 덕인 군자의 땅이고, 다른 쪽은 언제라도 전쟁을 불사하며 확장만이 미덕인 식민 제국주의 국가이니 말이다. 여기에 숟가락을 얹은 나라는 일본이었다. 그들은 우리보다 일찍 메이지 유신이라는 개혁에 성공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 근대화를 시도하고 과학문명 기술을 받아들여 소위 말하는 식산흥업, 부국강병의 길로 나섰다.

 

그러므로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바다에 아주 태연스럽게 굴뚝에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떠 있는 금속 증기선의 실체를 해안가 주민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물론 관아의 관리들과 중앙의 조정에서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온 세상의 바다를 휘저어 다니면서 세상의 땅을 두드려 대는 저 배의 정체를 바깥 바다로는 나간 적이 없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 저 배는 세상을 온통 휘저으며 다니는 이양선이었다. 바다에 떠 있는 저 배들이 지금에사 저렇게 연기를 내뿜으며 흰 포말로 해면을 가멸차게 달리는 증기기관선이지만 그 전에는 범선 즉, 돛단배였다. 대항해시대에 그들은 단순히 노를 젓고 바람에 돛을 달아 나아가면서 세계의 항로를 구석구석까지 찾아나갔다. 선박을 부리는 기술인 해기海技가 과학기술 문명을 갖지 못하고 아직 자연 상태인 범선의 수준에 머물면서 세계의 모든 항로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

 

해안가 주민들의 놀라움은 멀리 멀리 퍼져 나갔고 뒤숭숭한 소문들이 나돌기도 했다. 바다로부터 외세는 밀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몰고 온 선박은 한반도의 전통적인 한선과는 많이 달랐다. 나무를 주재료로 하여 배를 짓고, 돛대에 돛을 달고 풍향 풍력에 맞춰 용총줄이며 아딧줄을 줄이고 늘이며 흥겹게 뱃노래도 불러가면서 나아가는 방식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들의 배는 바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들의 배는 필요에 따라 쉽게 방향을 돌릴 수도 있었다. 그것은 속도도 빨랐고 선체도 컸다. 언제라도 항해할 수 있고 빨리 도착하면서도 많은 양의 짐을 실어 나를 수 있었다. 출입항하는 도선기술, 부두를 들고 나는 이안 접안 작업, 대양의 풍랑을 극복하는 감항능력, 선체의 강도, 보침력의 확보, 추진력의 생산, 기상의 예측, 선위의 계산, 방향의 정확성, 이 모든 문제들을 공학으로 해결해 내었다. 사람의 감각기관과 감성에 의존하는 종래의 해기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물론 더 이상 뱃노래의 응얼거림도 필요하지 않았다. 종래의 우리 연안의 바다를 들고나는 이치와 지혜 같은 것은 없어도 좋았다.

 

언제부턴가 조선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쏟아내 놓은 문명의 산물들을 놓고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면직물, 신발, 성냥, 손전등, 가방, 시계, 노트, 펜, 우산, 양산, 여러 가지 생활용품들, 약품들, 다양한 지식 서적들, 이러한 것들 외에도 거리에 켜진 전깃불과 한성과 부산 원산 간에 전선을 부설하여 통신혁명을 이룬 전신사업, 전차가 개통되어 이룬 교통혁명은 아직 중세에 머물고 있던 조선인들을 경이로움과 함께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선박으로 운반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860년대와 1880년대 사이에 조선의 정세는 이미 긴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병자수호조규를 지나면서 어느새 조선의 바닷가에는 외국의 선박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개항장이 생겼고, 그것은 곧 조선의 법이 작용하지 않는 ‘조계지’가 되었다. 이곳을 통하여 이미 근대화를 이룬 서구와 일본의 공산품들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우리의 바다에 설치된 등대는 외세의 화물선들이 잘 들어올 수 있도록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러한 선박에 실어온 공산품들과 우리 산물은 가격 면에서나 질적으로도 경쟁이 될 수 없었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이겠지만 해운에서도 문제는 심각했다. 전국의 개항항의 해상운송이 일본인의 손에 들어갔고, 그들은 불법적으로 비개항항까지 범위를 넓혀 해운활동을 하면서 이 땅의 근대 해운 발흥의 씨를 싹부터 말리고 있었다.

 

19세기 초중엽에 조선 바다에 검은 연기를 뿜는 이양선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1860년대 이후로 조선 사회 최대의 화두는 문명개화, 식산흥업, 부국강병이었다. 조선이 일본에게 국권을 내 준 과정을 살펴보면 그것은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문명개화, 또는 문명화로 번역되는 ‘civilization’, 그것은 단순히 어느 누가 시작하자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새로운 문물의 수입, 거기에는 사회지도층의 철학과 함께 민중일반의 의식개혁이 따라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비슷한 시기 일본의 근대화를 위한 개혁인 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데는 이러한 사회전반의 고민, 고뇌, 사유와 철학 과정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그 시대 일본의 정치이념과 외교철학 과정의 결론은 전 국민이 식산흥업, 부국강병에 매진하자는 거였고, 그것의 실천사항 중의 하나는 한반도 침략이었다. 그러므로 양국에 있어서 문명개화는 국가운명을 건 분기점이었다. 문명개화의 뜻을 담은 과학기술의 산물을 실은 이양선들의 수가 점점 더 많이 늘어났지만 조선은 아직 주춤거리고 머뭇거렸다. 부산항이 개항되고 원산과 인천이 개항되었으며, 일본에 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미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덴마크와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그들의 선박이 한반도 수역을 드나들었다. 그들은 한반도의 대외항로뿐만 아니라 부산, 인천, 군산, 목포, 원산 등 연안항로까지 활동범위로 진출했다.

 

물밀 듯 밀려오는 외세와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감지한 조선은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국방 외교 통상업무와 나랏일을 담당하는 ‘통리기무아문’이라는 새로운 정부기구를 두었다. 통리기무아문은 나라의 주요 현안을 담당하며 특히 대외 업무에 중점을 두고 업무를 진행했다. 그것은 다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개칭되고 청나라가 추천한 묄렌도르프라는 독일인을 외교고문으로 두었다. 당시, 외교와 통상에 서투른 조선으로서는 적절한 조치였던 것 같다. 이 기구는 당시 정부의 여러 가지 현안을 심의하고 정책을 수행해나갔는데 그 중에서도 해운에 관련된 사업을 펼쳐나간 것은 문명개화와 식산흥업에 골몰하던 당시의 조정의 기류를 감안할 때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한국 근대 해운의 시작으로 보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관영해운은 바로 이때의 일이다. 1883년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영국계 해운기업인 이화양행과 기선운항에 관한 계약을 체결하고 일본의 나가사키와 중국의 상하이 간에 배선, 운항되던 선박을 조선의 부산과 인천을 경유하여 운항하도록 했다. 말하자면 조선 수역 근처를 운항하던 외국 해운기업의 취항 항로에 조선을 경유하도록 하는 항로 연장 방식이었다. 약 1년간을 운항했는데 결손을 본 이화양행은 운항을 중단했다. 그리고 결손금을 요청했는데 조선 조정은 이를 해결하는 데에 애를 먹었다. 다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독일계 기업인 세창양행과 계약하여 300톤급의 선박을 6개월간 용선하여 전라도 지역의 조곡(조세로 납부하는 곡식. 조선시대에는 남부지방의 조곡을 수운으로 운송했다)을 인천까지 운송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역시 기존 재래 조운(조곡 운송) 종사자들의 심한 반발로 조선 조정은 일방적으로 해약하기에 이르렀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관영해운의 실패 후에도 다시 한 번 관영해운이 시도되었다. 각 도의 조곡운송을 전담하는 기구인 전운국이 해운담당 부서로 전면에 나서게 되었는데 전운국은 선박을 구입하여 직접 운항하였다. 전운국이 구입한 선박은 모두 5척이었는데 선박도입 정보와 절차, 방식에 서툴러서 경제적 손해가 적지 않았다. 예를 들면 구입한 선박 중 해룡호는 연료 효율이 많이 떨어져 당장에 처분해야 하는 선박이 되고 말았다. 조선 조정의 재정 사정으로 대개 외국차관으로 도입된 선박들은 경영 상태가 좋지 않아 소유 관계가 문제가 된 채로 운항되기도 했다. 전운국은 해운경영과 선박관리의 비효율성 문제 외에 자국 선원과 해기기술의 부재도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높은 임금으로 외국인 보통선원과 해기사를 고용했기 때문에 운항비 부담이 커졌고, 그런 중에서도 조선인들이 해기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었다.

 

전운국은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선박 도입에 따른 차관상환 문제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였다. 이 때 청나라가 조선 조정에 영향력을 갖기 위하여 저리의 차관을 제시했고 조정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와 동시에 청나라는 자국의 관官이 감독하고 민民이 운영하는 해운기업인 ‘초상국’의 방식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이에 조선은 최초로 민간이 운영하는 해운기업 ‘이운사’를 발족시켰다.

 

이운사는 전운국의 선박 외에도 1천 톤급의 당시 조선으로서는 가장 대형선을 도입할 만큼 활동이 의욕적이었다. 이운사는 일본으로부터 소형선 4척을 도입하여 국내 연안의 일반적인 운송 외에도 남해안과 서해안을 도는 조곡운송에 종사하였는데 그 운항성과는 대체적으로 괜찮았다. 그렇지만 그 경영관리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는데 일선 실무에까지 관리가 배치될 만큼 지나치게 관의 간섭이 많았고, 경영진의 요직에는 조정의 실력자들 또는 연줄을 가진 인사들이 차지하여 효율적인 기업 경영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운사나 전운국이 안고 있는 해운 운항 상의 난점은 무엇보다도 경영기법과 당시로서는 첨단기술에 속하는 해기기술이었다. 해외로부터의 차관 과정, 용선 실무, 재무 회계에 어두운 조선의 관리와 실무자들은 불이익을 당한다든지 사기에 휘말려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선원의 경우 전문직인 해기사는 거의 일본 해기사로 채워졌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육상직원들의 업무 말고도 승선한 해기사들도 취급하는 재정 사무 관리가 많았는데 승선직원이 일본인들이니 업무협조 연계가 쉽지 않았다. 결국 이운사의 선박들과 사업 일체가 이미 조선의 개항 항과 불법적으로 비개항 항까지 활동범위를 넓혀 한반도 연안 운송의 독점운송을 도모하고 있던 일본의 해운기업인 니혼유센日本郵船에게 위탁하는 계약이 체결되면서 조선말의 관영해운은 막을 내리게 된다.

 

개항이 되고 수많은 이양선이 연안을 출입하며 무역활동을 벌이자 자연히 민民에서도 해운업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경영에 흑자를 내어 성공한 기업은 드물었다. 대부분이 전자의 관영해운과 같이 차관으로 선박을 도입했기 때문에 자금 압박이 심했고, 외국인-대개 일본인-선원의 높은 급료로 인해 운항비 부담이 컸고, 해운경영 선박관리 미숙으로 적자경영에 시달려 결국은 헐값으로 선박을 매각해야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해운업체인 대흥상회가 운항한 대흥호의 취항과 매각은 이러한 상황을 잘 알려주는 사례인데, 적자 경영과 함께 자금압박에 시달린 대흥호의 선주는 선박의 공매 사실을 각 국 영사관을 통해 공고하였고, 인천 해관(오늘날의 세관)에서 공매되었다. 공매가 진행되면서 누군가의 획책으로 구입 선가의 10분지 1에 불과한 금액으로 낙찰되어 대흥상회는 결국 파산되고 말았다.

 

외세의 요구로 문을 연 조선 말에 문명개화에 대한 관심은 관이나 민이나 간에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커져 갔다. 조선 조정은 처음에는 쇄국의 자물쇠를 여전히 놓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개화파든 수구파든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문명개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갖게 되었으며 그 방법론의 차이에 따라 다른 정치노선을 걸어갔다. 민도 처음에는 전통적인 유교 문화의 가치와 충돌하는 새로운 문명과의 만남에 놀라움과 혼돈에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차츰차츰 문명개화의 새로운 인간상과 세계 질서에 눈이 떠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일본, 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의 외교관들이 조선 조정을 들락거렸으며 개항이 되고 그들의 조계지가 형성되었으며 그들의 필요에 따라 그들의 군대가 조선 땅에 주둔하는 일이 생겨났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혁명 청일전쟁 갑오경장 러일전쟁, 이러한 굵직굵직한 정치사가 있었는데, 국내외적으로 일어난 이 모든 변란과 전쟁에 조선 민생들의 희생이 뒤따랐고 사회적으로는 근대 문명화,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화 되면서 전체적으로 규모는 커졌지만 국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져 갔다.

 

근대화의 초기에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해운 분야에서도 어떻게든 해 보려는 노력이 있었다. 당시 민에서는 연안 운송에 있어서 종래의 한선으로는 조선에 진출한 일본 해운업체의 기선을 따라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되자 기선을 도입하는 획기적인 시도가 있었다. 인천과 마포 간에 여객과 화물을 실어 나른 삼산회사와 부산항의 우체기선회사와 협동기선회사, 인천항에 설립된 의신회사, 그리고 비교적 규모가 큰 해운선사로는 대한협동우선이 예전에 정부가 소유하던 5척의 노후선을 불하받아 국내 연안항로와 중국과 일본 등의 외국 항로에까지 배선하여 운항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미 조선 경제사회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해운마저 손에 넣은 일본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그들은 가장 최신식 선박을 가졌고, 해운경영과 선박관리의 노하우를 가졌으며, 선박을 운항하는 우수한 해기인력이 있었다. 게다가 병자수호조규라는 불평등한 조약이 체결된 이후에 조선에서 운항하는 그들의 해운기업에는 재정적 지원까지 해 주었으니 그들과의 경쟁이란 애당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조선인들의 해운업체는 문을 닫았다. 그들은 스스로 폐업하거나 선박의 운항권을 일본 해운업체에게 넘겼다. 낡은 기선 몇 척만으로 근대화를 이룬 일본 해운기업과 경쟁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민족자본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고, 해운경영 선박관리의 경험도 없었으니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조선인 승무 인력, 그 중에서도 고급 해기인력인 해기사의 양성과 현직 취업 활동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선원인력 고용의 특성을 고려할 때, 문호를 개방하고 조선 수역에 취항을 시작한 그들의 선박이든 조선의 관영해운과 민영해운이든 간에 그러한 개항장에서는 조선인을 특별한 해기기술 없이도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최하급 선원으로 고용했을 터이고 그들 중에서 해기를 익혀 보통선원에서 항해사 기관사 같은 해기사로 승진하여 나중에는 선장 기관장 직을 담당한 사람도 있었을 텐데 그것에 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구한말에 우경선, 김성진 등이 선장으로 활동했다지만 그 성장 경로와 활동 내용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구한말 해기의 계승과 인력 양성을 말할 때 최초의 군함 양무호에서 실시된 선원양성이 거론되는데 이 또한 기록에는 남아 있지만 그 실체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해기’가 전승되지 못한 점은 확실히 아쉬운 일이다. 배를 부리는 기술, 그 중에서도 연안을 드나드는 뱃일은 종래의 기술로도 가능하지만 먼 바다를 오가는 일은 오직 문명화된 새로운 배를 부리는 기술인 해기로만 가능한 일인데, 또 그것은 비록 아직 초보단계이지만 한국 해운이 하려면 할 수 있는 시도였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모든 일이 새로운 문명, 과학기술 문화에 대하여 민이 어떻게 잘 수용하는가, 라는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 해운업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해기라는 특별한 기술을 가진 인력이 필요한데 그 활동 공간이 바다라는 점은 더욱 불리하게 작용했다. 바다를 항해하는 뱃일은 조선 오백년을 두고두고 가장 천대 시 한 직업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대대로 내려온 이와 같은 열악한 해양의식이 적극적인 선원양성과 해기교육에 불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그나마 1895년에 조선 조정이 국비 유학생 한만원, 박종서, 신순성을 당시의 선진 해양교육기관인 도쿄고등상선학교(현재 국내 학제로 고졸 이상 학력자가 입학할 수 있었음. 3년 좌학, 3년 실습의 고등교육과정)에 파견한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이었다. 당시 관독민영의 해운기업 이운사를 매우 불리한 계약조건으로 니혼유센에 넘기면서 요구 조건 중의 하나로 조선인 해기유학 파견을 내세웠다. 조선 조정은 이렇게라도 해서 선원 양성의 불모지에서 이루기 어려운 해기와 해운의 꿈을 시도해 보려고 노력했다.

 

1901년 12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던 셋 중 한만원과 박종서가 돌아왔다. 한만원은 귀국 후 일시 해운활동에 종사했을 뿐 그 뒤 소식은 알 길이 없다. 박종서는 귀국하여 무엇을 하였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보다 6개월 후에 돌아온 신순성은 조선의 해운기업인 대한협동우선에서 승선근무 활동을 했고, 회사가 정부로부터 수탁운항하던 현익호와 창룡호의 부함장이 되었고 정부가 해원양성소로 활용했다고 전해지는 양무호의 부함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물론 그가 승무한 모든 선박에서 그는 유일한 조선인 해기사였다. 일본 유학 시절, 수많은 어려움과 쇠잔해 가는 약소국의 설움을 견디며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신순성은 마침내 공식적으로 한국인 최초 갑종 해기면허 선장이 되었고, 이 모든 일들이 그에게는 청춘의 꿈이었다. 그는 해양으로 진출하려는 조선 젊은이들에게 빛나는 상징이 되어 가고 있었다.

 

1910년 한일병합 당시 신순성은 항로표지선인 광제호의 2등항해사로 지위가 격하되어 승선하고 있었다. 항로표지란 입출항선과 연안을 항해하는 선박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설치된 등대와 부표浮標 등을 의미한다. 해안선이 복잡하고 크고 작은 섬이 많은 남해안 서해안에는 많은 화물선이 많이 다니고 있었는데 물론 그러한 화물선은 대부분 일본 해운기업의 선박이었다. 항로표지선은 이들 항로표지의 상태를 순찰하고 외따로 떨어진 섬의 등대수에게 부식과 식수의 공급, 그들의 안전 건강 생활을 확인하는 일도 했다. 말하자면 항로표지선 광제호는 해운빈국 대한제국에게 해양행정으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해양활동인 셈이었다.

 

한일병합 국치의 날, 광제호의 선미에서는 태극기가 내려지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하나 남은 해양의 상징은 이렇게 그 깃발을 내려야만 했다. 조선인 해기사 신순성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순간이었다. 신순성은 태극기를 고이 접어 선실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승선근무 동안 내내 소중하게 간직했다. 신순성은 언젠가는 회복할 바다의 꿈, 대양을 건너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 심호섭, 해양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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