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근대 이전까지의 한민족 해상활동

등록일202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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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근대 이전까지의 한민족 해상활동

 

역사이래로 지금까지 한반도에서는 선박을 짓는 일, 선박을 운용하는 일, 그리고 항해하는 일이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많은 섬과 풍부한 해안선을 가진 땅이기에 거기에는 바다를 들고 나는 이치를 아는 개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역사의 굴곡에 따라 흥하고 쇠했다. 그들은 때로는 사회적으로 귀한 자리에 오르기도 했지만 대개는 푸대접을 받은 계층에 속한다. 그들은 동아시아의 광대한 바다에서 왕성한 해상활동의 주인공이었거나, 나라의 운명을 건 전쟁에서 영웅적 역할을 한 빛나는 무명용사인 적도 있지만, 대개는 역사의 무대에서 주변인으로 머물러 있었다. 고대를 지나고 중세를 지나고 근대에 들어 서구사회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과 함께 서구열강은 대항해, 대발견, 대확장에 몰두하며 가장 발달한 문명의 더듬이로 지구의 구석구석마다 찾아다닐 때,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변화의 조짐은 바다로부터 밀려와서는 고대로부터 바다의 업을 전승해 온 이 땅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던 바다사람들을 향하여 손짓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대양으로 열린 창, 부산항에 박봉삼이라는 물장수가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부산항에 입항하는 선박에 급수선을 띄워 물을 공급하는 일을 했다. 그의 출생이 어떠하고 언제 세상을 떠나갔는지 알려진 것은 없지만 그는 한국 근현대 해운개척사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보통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다. 그는 비록 본격적인 해운, 또는 해양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해양인이었다.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후 한국해운이 막 도약을 시작하던 60년대 초까지 부산항을 오가는 해운인들과 함께 동고동락을 같이 했다. 그는 부산항에서 해운인들로 이루어진 조합을 결성하여 해운인과 선원들의 권익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광복 후 당시 유일한 해운기업인 조선우선(나중에 대한해운공사, 대한선주, 한진해운으로 운영주체와 이름이 바뀌어갔다)이 외양해운을 할 선박이 없어 일본으로부터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관할하던 선박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전쟁 중 모두 멸실되었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통에 매우 난감하게 되었는데 이 일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박봉삼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과거 부산항에서 입항선에 물을 공급한 급수일지를 찾아내어 거기서 전쟁 중에 멸실되지 않고 남은 선박의 목록을 작성하여 한일간 해운회담에 참석하는 한국 측 대표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선박에 물을 갖다 대는 평범한 급수업자였지만 한국 해운건설의 초기에 알려지지 않은 공로자였다.

 

구한말에 해운인 최봉준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모항으로 하여 조∙러∙일로 둘러싸인 삼각해역을 무대로 왕성하게 해운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러시아의 부호 야린스키의 양아들로서 양부의 엄격한 교육과 많은 재산을 상속한 그는 해운업을 하면서 때로는 직접 갑판에 올라 선박을 지휘하면서 적극적으로 항해활동을 하였고, 조선 러시아 일본의 해항뿐만 아니라 멀리 중국 남안까지 그 교역활동의 범위를 넓혀갔다. 독립운동가이기도 한 그는 조국이 국권을 잃자 독립지사들과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펴 나갔다. 그는 일반 민중에게 항일운동과 독립사상 고취를 전개해나가기 위하여 신문발간 및 보급 등 문화운동을 전개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나라를 잃은 후손에게 남긴 유언은 한반도와 한민족의 해양사상 고취를 위한 명언이었지만 이를 제대로 아는 이는 별로 없다. 그는 실로 위대한 해양활동가이며 해양사상가로 살았다. 조국이 길을 잃고 헤매던 시대에 그는 마치 육지에서 떨어진 작은 섬에서 길을 비추는 등대처럼 홀로 바다를 비추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뿐이었다. 그가 어떻게 해운인이 되었으며 동아시아 항로를 항해하는 화물선의 갑판 위에서 항해를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었고 누구의 영향을 받아 그처럼 뛰어난 해양사상을 갖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구한말에 조선 조정은 밀려오는 외세의 물결과 함께 문명개화, 근대화의 필요성을 깨닫고 나름대로 노력하면서 돌파구를 찾고 있었는데, 해운에 있어서도 상당한 고심을 하고 있었다.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국가가 직접 해운을 경영하기도 하고 민간에서도 선박을 도입하여 ‘근대해운’을 시도했다. 구한말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조선인 선장으로 국비로 도쿄고등상선학교를 유학한 신순성을 들지만 사실은 그 전에 김성진이라는 선장이 있었다. 그는 구한말 민간 해운 기업 대한협동우선의 선박 현익호의 선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본격화 되고 있던 시점에 러일 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이 승리하자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일본군이 파견될 때 도선사로 동원되기도 했고, 나중에는 부산에서 금강상회라는 무역상을 운영하면서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그 시절 사회활동의 상당 부분을 당시의 시대상황으로서는 미개척 분야이고 매우 앞서가는 직업 분야인 해운계에서 활동했다. 그렇지만 그가 어떻게 상선의 선장이 되었는가는 아무도 모른다. 추정컨대, 그는 조정의 해운 담당 부서에서 도입한 상선에 보통선원으로 승선생활을 시작하여 그 배의 외국인 항해사관들로부터 항해기술을 전수받아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찾아보기 드문 외양상선의 선장이 되었을 것이다.

 

세계의 해양활동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되었다. 해안선이 풍부하고 많은 섬을 가진 한반도도 마찬가지이다. 이곳에서 인간은 아주 일찍부터 해양활동에 종사해 왔다. 최근에 경남 창녕에서 발굴된 폐선 유적은 8천 년 전의 것으로 현전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그 연대기 측정의 정확성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한반도는 일찍부터 해양활동의 터전이었음은 틀림없다. 구체적인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오래 전 고조선시대에 대동강 나루에 곽리자고라는 뱃사공이 있었다. 사료에는 그의 신분을 ‘진졸’이라고 했는데, 이는 평시에는 해상운송인, 전시에는 수군으로 활동하는 자를 의미한다. 그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 한국문학의 시작이라고 치는 공무도하가의 주인공이다. 나중에 중국 왕궁의 궁중악으로 편입된 공무도하가는 일종의 장송곡이기도 한데, 이것을 아리랑의 기원이라고 보는 국문학자도 있다. 우리 선조의 해상활동이 문학작품에 투영된 것으로서는 심청전이 있다. 심청전에 나오는 인당수는 백령도와 장산곶 사이의 바다로서 무역상에게 팔려온 심청은 이곳에서 몸을 던진다. 효녀인 심청에 대비하여 항해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야기 구조 상 악역을 맡았다. 심청전이 권선징악의 교훈을 일깨우는 작품이라면 별주부전은 해학으로 가득 찬 우화이다. 거기에는 바닷가에서 아침 해에 배를 띄우고 저녁 해에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속의 바닷사람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그려나간 상상의 세계가 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완성되어 갔을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해양활동을 살펴보건대 그 으뜸은 역시 고대에 번성했던 ‘동아시아 해양활동’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고려중엽까지 한민족의 상선대는 한반도와 일본, 중국 동안과 남안과 동남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의 바다를 항해하며 교역했다. 그들은 한반도를 모항으로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적지 않은 세력들이 산동반도와 주산군도 등의 중국 동안에 근거를 두고 활동했다. 특히 백제인들은 한반도와 중국 동안의 해항뿐만 아니라 일본열도와 그 남쪽으로 베트남, 필리핀, 더 멀리는 스리랑카, 인도까지 교역을 했다. 이것의 증거는 오늘날 현지에 문언으로 남아 전해지는 백제 지방분권지대로 해석되는 담로계 지명이 바로 그것이다. 세계의 해양사로 치자면 서양의 대항해 시대의 해양활동에 비견할 만큼 그 활동은 광대했고 왕성했다. 물론 이 두 항해의 수행자들은 모두 해상운송인 즉, 선원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사회적으로 무명이었고 귀족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었으며 그저 바닷가에서 바다와 함께 희로애락을 같이 하며 바다를 들고 나는 이치를 아는 매우 평범한 개인들이었다. 그들은 교역을 했고, 전쟁을 치르기도 했으며, 그들 중에 상당수는 바다에서 수장되어 갔다.

 

한반도의 사람들이, 또는 한민족을 민족적 정체성으로 하는 동아시아 해역의 개인들에게서 해양활동이 쇠잔하게 된 것은 대략 고려 중엽 이후의 일이다. 그것은 해양국가라 할 수 있는 고려의 집권세력의 성향과 권력이동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중국대륙의 해금海禁 정책의 영향이 크다. 명나라에 접어들면서 대륙은 바다의 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바다의 수많은 해민海民들의 생계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바다에서 바다의 사람들이 길을 잃게 된 것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당시 한일 해역을 항해하는 상선들의 기착지이며 정치적 피난처였던 대마도와 큐슈 연안 도서 일대로 옮겨갔을 것이다. 바다를 길로 삼아 교역을 하는 무리들이 길을 잃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사학자 김성호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 중에 상당수가 왜구가 되었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한반도는, 그 연안에서 바다를 들고 나는 이치를 아는 사람들은 먼 바다로 나아가는 일을 멈췄다. 언제부턴가 그들은 얕은 바다에서, 또는 강에서 뱃일을 일삼았다. 그들은 여전히 배를 짓고 배를 부리면서 바다에 나아갔지만 오직 뭍에 가까이 붙어서였다. 주로 섬과 섬 사이 섬과 해안 사이의 수로에 배가 다녔다. 수로에는 폭이 넓은 것도 있지만 울둘목과 같이 유속이 급한 협수로도 적지 않았다. 배들은 곡식을 실어 날랐다. 이른바 세금으로 바치는 조곡이란 것이었다. 한반도 남도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곡식은 금강 영산강 낙동강의 강운으로 이동되어 하구에서는 풍향 시기에 맞춰 선단이 출발했다. 이와 같은 조운 선단은 오직 ‘연안항해’였다. 조선시대에 조운 철이면 조곡을 적재한 선단이 남해안, 서해안의 바닷길에 줄을 이었다. 조운은 당시 한반도에서 수행된 해상운송 즉. 해운의 일종으로서 처음에는 조정에서 관할했지만 나중에는 민간의 사선이 맡아서 수행했다. 해운과 육운은 그 특성상 여러 가지 차이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예나 지금이나 해운은 야간에도 수행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여 배는 멈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파도 위에서 배가 정지한다는 것은 침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조운 철이면 한반도의 서, 남해안의 바닷가와 도서 지방에서는 밤이 되면 바닷길의 기점마다 불을 밝혔다. 지금의 등대 역할을 한 셈이다. 관련 지역에 현전하는 불근도, 불도, 탄도, 연도, 인화도, 화도 등의 명칭들은 당시에 바로 이와 같은 조운 활동이 왕성했음을 말해준다.

 

풍부한 해안선과 많은 섬이 있어서 배를 지으며 바다를 들고 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참 좋은 일 아닌가. 그들은 평시에는 어로를 하거나 해상운송인이었고, 전시에는 수군이었다. 조선 선조 때에 나라에 큰 변이 일어났다. 한반도의 바다로 열린 창, 부산항으로 상륙한 일본군은 순식간에 북진하였고 임금의 어가는 비 내리는 야밤에 백성에게 돌을 맞으며 길을 떠났다. 서글픈 일이었다. 이 시대의 무기력했던 정치 상황과 들끓는 민초들의 분노는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다.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전국이 일본 무인들에게 장악되었다. 다만, 여전히 살아남은 것은 바다였다. 바다는 바다의 길이 따로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바다가 있었다. 거기에는 고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배를 짓는 일, 배를 부리는 기술, 바다를 들고 나는 지혜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순신이라는 위대한 전략가가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다. 다시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고 조정은 복구되었다. 다시 육상은 육상의 일에 젖고 바다는 바다의 일에 몰두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그러했다. 두 차례의 외침과 큰 변란이 있었지만 집권세력에게 바다에 대한 새로운 성찰은 없었다.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가끔씩 확인할 수 없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곤 했다. 가끔씩 대륙으로 사신을 갔다 온 관리들이 신기한 물품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와 같은 것들은 일본 쪽으로부터 들어오기도 했다. 이상한 나라에 대한 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오갔다. 그렇지만 그뿐이었다.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빨래를 하며 길쌈을 하고 산에 땔나무를 해왔으며, 비가 오고 눈이 오며 봄이 오고 가을이 갔다. 동방예의지국, 농자천하지대본, 선비의 나라,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웬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 심호섭, 해양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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