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그들은 어떻게 대양을 건너왔는가?

등록일202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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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그들은 어떻게 대양을 건너왔는가?

                                                                               -대확장의 끝, 그리고 한반도

 

그들은 어떻게 그 먼 바다를 건너왔는가? 그들은 어떻게 망망한 바다에 떠서 그 긴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단 말인가? 또 그들은 왜 우리 바다에 들어와서 저렇게 연기를 내뿜으며 떠 있단 말인가?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당시 갑자기 나타난 이양선은 아직 여전히 조용한 아침의 나라 사람들의 눈에는 충분이 그렇게 비쳐졌을 것이다.

 

사실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근현대 이전의 세계에 대양을 건넌다는 일은 매우 위험한 모험이었다.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한 옛날에 인간이 바다를 다닐 수 있는 방법은 주로 연안항법(연안에 가까이 붙어서 섬, 산봉우리, 등대 등의 항해물표를 관측하며 항해하는 방법)에 의해서였다. 이러한 연안항법과 함께 사람들은 옛날부터 이역 멀리까지 나아가서 교역을 수행해 나갔다. 물론 예외는 있다. 고대 동아시아에 한민족이 수행한 해상활동에서 한반도와 중국의 산동반도를 잇는 직항로 같은 경우는 거리가 비교적 가까워서 북으로 발해만 연안을 두르는 연안항법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가능했으리라 판단된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연안항법만이 안전했다.

 

근대에 들어 대항해시대에 서구유럽은 대양을 넘어 아시아로 건너왔다. 사실 대륙 간 인간의 이동이 바다를 건너 이루어진 것은 그 이전 고대 때부터 있어 온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 역시 드넓은 대양을 건넌 것이 아님은 지구의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둥근 공 모양의 지구를 살펴보면 대륙과 대륙 사이에 놓인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 이와 같은 바다는 저위도 지방에서는 거리가 끝없이 넓지만 고위도에서는 그 땅이 극지방을 향하여 모아진다.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이었을지라도 이러한 해양지리적 공간에서는 대륙 간 인간의 이동이 가능했으리라는 것은 지리학과 항해학적 식견이 부족한 일반인이라 할지라도 쉽게 유추해 낼 수가 있으리라. 고대에 북태평양 고위도에 놓인 아시아 북부와 북아메리카의 북쪽 지방 사이의 이동이라든지, 북유럽 스칸디나비아반도와 북아메리카의 캐나다 북동부 지방 사이에 진행되었으리라 생각되는 해상이동은 이러한 추측에 대한 예가 된다. 특히 북유럽의 노르웨이에서 배를 띄워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를 거쳐 북아메리카의 북부로 건너간 해양활동이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당시 노르웨이 해항 지역에서 널리 읽혔던 문학작품은 훗날 위대한 항해자 중의 한 사람인 콜럼버스가 아무도 간 적이 없는 바다로의 ‘대항해’를 결심할 때 서쪽 바다 건너 대륙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서쪽 바다 건너 대륙이 있다는 것, 그 대륙은 바로 그들이 사는 유럽의 왼쪽에 위치한 대륙이라는 것, 이 대륙은 그들이 그토록 찾아가려는 인도와 중국이 있는 아시아 대륙이라는 것, 이 얼마나 말도 되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위대한 착각인가! 그것은 허구이면서도 공상이었지만 한편으로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지구의 참 모양에 대한 당대 지식인들의 열망이었으며 그것의 확인과 함께 대두될 새로운 사회에 대한 한없는 기대였다. 당시 콜럼버스의 주장처럼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아메리카와 태평양이 없다고 전제했을 때,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항해하여 인도에 가 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콜럼버스 개인이 받게 될 보상과 그를 지원한 선대의 국가가 얻게 될 혜택 외에도 ‘발견’이 안겨다 줄 인문 사회 경제적 변화는 충분히 예고되고 있었다.

 

콜럼버스의 대항해가 있기 전에 대서양의 남쪽을 향한 포르투갈의 줄기찬 항해가 있었다. 사실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사람이었다. 그의 출생지가 이태리의 제노바라고 알려져 있지만, 선원으로서의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인이었다. 그는 25세에 항해 중 포르투갈 해역에서 해양사고로 배가 파손되자 해엄을 쳐 인근 리스본 연안으로 가 닿았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 후 그는 대항해를 실행하기 위하여 스페인으로 넘어가기까지 줄곧 포르투갈의 바다에서 육상에서 삶을 영위했고, 결혼을 하며 자식을 갖게 되었다. 대항해에 대한 포르투갈의 야망은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아직 중세이던 15세기 초부터 그들은 남방으로 아프리카 서안의 해역으로 전혀 가 본 적이 없는 바다로 배를 띄웠다. 아프리카 서쪽으로의 항해는 포르투갈에게 큰 부를 안겨 준 것은 아니지만, 바다를 건너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과 그들과의 교역에서 포르투갈은 일찍부터 국가적 비전을 찾은 것 같다. 이것은 해양에 대한 도전의식, 해양입국 이념을 키워나가게 했고 그렇게 무장된 선원들 즉, 해기인력은 항해를 하며 장사를 하며 필요시에는 전투를 하면서 아프리카 서안을 따라 끝없이 항진했는데, 교역의 결과 얻은 이윤은 물론 그에 따라 새로운 바닷길에 대한 정보와 조선술, 항해술의 발달을 가져왔지만 한편으로 배가 파손 침몰되고 승무인력이 사망하는 등 많은 희생이 있었다. 그리고 선대는 드디어 땅이 끝나고 꿈에도 그리던 동쪽으로 열린 바다를 만난다. 당시 포르투갈의 왕은 이 아프리카 최남단의 곶을 ‘희망봉’으로 명명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 의문점이 남게 된다. 왜 그들은 그토록 인도로 가는 바닷길을 찾았던가? 이것에 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이 된다. 먼저, 고대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중간 경유지 중의 하나인 오스만터키 제국이 발흥하여 교역상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고대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동양의 물품은 유럽의 소비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것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후추, 정향, 육두구 등의 향료이다. 사실 유럽사회는 오래 전부터 동양의 물품에 대하여 근원적인 욕구가 있었다. 비단, 도자기, 차 음료를 마신다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어려운 사치생활에 속했다. 유럽은 이외에도 여러 가지 동양의 산물을 선호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동서간의 교역로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일기 시작했다. 육로가 어렵다면 바다로 가는 길을 찾아보자. 만약에 성공한다면 그것은 캐러밴의 짐바리에 의존하는 물류 방식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단번에 막대한 양의 짐을 가져오는 일이 가능해진다. 선박에 의한 운송, 이른바 해상실크로드에 대한 상상이다. 이외에도 유럽의 동양에 대한 갈망과 상상은 당시 그들의 종교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기독교의 모태가 유태교이고, 기독교도의 근원적 태생이며 생을 마치고 돌아갈 낙원도 에덴동산인데, 그것의 지리적 위치는 중동지역 어딘가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이유를 든다면, 포르투갈 스페인 같은 작은 나라가 일찍부터 인도로 가는 바닷길을 개척한 데에는 당시 유럽 정세는 약육강식의 시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해상무역을 해야 한다는 국가 정책이 있었고, 그리고 종교적으로 선교에 대한 강한 열망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고 그 이후의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스웨덴 등이 진행해 간 ‘대항해시대’의 대항해의 이유는 이렇게 설명된다 하더라도 거기에 참여한 해기인력인 선원들의 참여와 희생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도 해명이 어렵다. 대항해시대에 수많은 선원이 죽어갔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주도하던 16세기만 하더라도 인도항로에서는 교역을 떠나는 4척 중 1척만 돌아와도 투자자들은 성공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무리 중세 유럽사회가 전쟁이 잦고, 영양공급 부족과 질병의 만연으로 평균수명이 마흔을 못 넘길 만큼 나빴다지만 그와 같은 악조건의 항해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은 미스터리이다. 물론 그 후로 기술의 발달과 함께 대륙을 건너는 대양항해는 인력희생이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영양부족, 신선한 식수 부족, 부실한 의료조건, 안전사고, 파손, 조난, 침몰 등의 문제는 상존했다.

 

유럽에 의해 명명된 대항해시대란 이름에는 이 위대한 도전으로 인하여 세계 문명 문화의 발전과 아시아 제국에 대한 침략과 수탈이라는 모순된 자기 역사에 대한 긍정, 또는 미화 의식이 숨어 있다. 그들의 대항해가 진행되어간 수많은 중계지 해항권에서 사람들은 거의 강제적으로 불평등하게 교역을 해야 했고 현지의 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하는 사탕수수와 면화 대농장이 운영되었으며 비참한 노예무역이 있었다. 그와 함께 발달된 과학문명이 유입되면서 식생활 개선과 의복생활 주거시설의 개선, 식량의 대량생산, 교통통신 문화의 혁신, 우수한 위생 의료기술, 인쇄술과 언론의 발달로 사람들은 삶의 질의 향상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으며 문명인의 자격에 합당한 인권의식과 민주시민 의식에 눈을 뜰 수 있게 되었다. 확실히 대항해시대의 대항해는 인간의 의지가 자연의 악조건을 극복한 사례란 측면에서 볼 때 그 자체로서 위대한 과업수행이었지만, 그 결과에 대한 가치 평가는 얼마든지 이처럼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대항해시대란 이름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대발견 시대’ 또는 ‘대확장 시대’라 부르는 등, 논란이 있지만 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바다에서는 당시의 기술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열악한 조건에서 항해가 진행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수장되어 갔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대항해’라는 수식어는 합당하다 하겠다.

 

그렇다. 확실히 수많은 항해요원들과 선척이 바다에 가라앉았다. 중세말 대항해의 시작이라고 평해지는 포르투갈의 대양으로의 진출은 일단은 남쪽의 아프리카로 향한 남대서양의 바다였다. 물론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니다. 포르투갈은 그 전에 이미 북해의 해항권으로 해상교역을 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 해상무역의 주도권은 강력한 해양 도시국가였던 베니스와 제노바에서 포르투갈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 시대에 리스본은 유럽 중심 도시 중의 하나가 되었고, 해변의 거리에는 선용품 가게와 해도제작소가 흥업했다. 침몰되는 배에서 헤엄쳐 나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콜럼버스가 리스본에서 선원으로서의 삶을 새로 시작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다 이런 시대적 배경이 깔려 있다. 북해로 해상무역에 열중하던 포르투갈은 언제부턴가 남방의 바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아프리카 땅의 무어인과 전쟁을 치르던 포르투갈은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온 전리품 중에는 그들의 관심을 끌었던 물품이 꽤 있었던 것 같다. 포르투갈은 리스본 앞바다의 카나리아 군도 남방으로 교역선을 띄우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전 지구적인 대항해를 꿈꿨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들의 선대가 처음으로 적도를 통과하고 아프리카 남단에 닿아서 거기서 인도양을 건너 인도에 도착하고, 다시 동쪽으로 인도네시아로, 거기서 다시 필리핀으로 북상하여 중국 동안과 일본 열도에 가 닿기까지 수많은 선척을 띄웠고 곳곳마다 상업거점지대를 형성하고 상관을 세웠다. 대체 그들은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희생을 감수하면서 바다로 나아갔을까? 해양과 함께 국가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것이 의문스러운 이유는 당시 이 작은 나라의 인구가 1백만 정도밖에 안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당시 그들은 얼마 안 되는 인구의 30%가 바다로 또는 바다 너머 그들의 상업거점지대에 나가 있었다고 한다.

 

포르투갈의 대항해를 꿈꾸고 실행에 옮긴 것은 엔리케였다. 그는 포르투갈 교역선의 선장과 항해요원으로 하여금 남쪽으로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미지의 땅으로 가게 했다. 그는 한 번도 항해에 종사한 적이 없다. 그렇지만 훗날 역사가들은 그를 항해왕이라 부른다. 왕자로서 유력한 왕위계승자이지만 왕위에는 관심이 없는 그는 오직 해양을 꿈꾸면서 포르투갈의 대항해를 주도해 나갔다. 말로만 듣던 전설 속의 바다, 두렵기만 하던 마의 바다들이 속속 통과되었다. 보하도르 곶, 블랑코 곶을 돌파하고 오늘날 노예해안이라 일컫는 기니 만에 가 닿았다. 그 동안 배는 해안가 마을에 들러 교역을 했고 가죽이 값비싼 물개도 상당수 사냥했다. 먼 바다에 나가면 폭포에 떨어진다든지 외눈박이 거인이 배를 삼킨다는 등 전설들이 미신임을 알게 되었다. 적도 지방에 가면 백인이 흑인으로 변한다는 말도 낭설임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차츰차츰 용기를 얻게 되었다. 항해가 위험하고 희생자가 속출했지만 사람들은 바다로 나아갔다. 견고하지 못한 선체구조, 아직 주먹구구식의 항해술, 빈곤한 식생활과 거주조건, 광대무변한 자연환경의 악조건 속에서도 교역을 위한 항해는 계속되었다. 엔리케와 대항해의 선장들은 조국의 해양을 꿈꿨지만, 일반선원과 민간인 투자자 대개는 교역의 결과에 따르는 이윤을 꿈꿨다. 항해에 성공하고 돌아오면 가난뱅이는 부자의 기회를 갖고 몰락된 귀족은 다시 신분회복의 조건을 가질 수 있었다.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배는 새로운 땅 새로운 바다의 지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해도가 수정되고 새로 그려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바닷길이 열렸고-, 남쪽으로 가면 갈수록 이 새로운 땅 아프리카는 남쪽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중에서도 해안마을에 닿아 교역을 하고 포르투갈 땅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우며 항해와 교역 중간 기지를 설치하기도 했다. 여전히 선대는 파견되었고, 돌아왔고, 다시 파견되고……. 본국으로부터 거리가 많이 길어지자 항해 중간 기지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당시는 아직 대양항법이 발달되지 않아 항해자들은 주로 연안항법으로만, 그래서 해안에서 멀어져 땅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에 떨어야 하는 그런 시대였다. 그들은 자꾸만 남쪽으로 남쪽으로 항진했고 아프리카 남쪽의 땅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의 삶의 근원인 고국으로부터 멀어지는 일, 그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인도로 가는 바닷길을 찾고 있었다. 인도에 가서 향료를 싣고 오기만 하면 고가로 거래되는 유럽 시장의 향신료를 장악하기만 하면 포르투갈은 부국, 부국강병을 이룰 터였다. 드디어 땅이 끝나고 동쪽으로 바다가 펼쳐졌다. 아직 지구의 제대로 된 모습도 알려지지 않은 거의 무지에 가까운 당시의 지리적 식견, 열악한 항해술을 생각한다면 포르투갈 선대의 희망봉 발견은 기적 중에서도 기적이었다.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동안의 거대한 섬 마다스카르에 도착한 바스코 다 가마의 선대는 여기서 수많은 상선들이 와서 교역을 하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동쪽으로 대양을 건너면 그들이 꿈에도 그리던 인도가 있고, 여기에 그곳에서 온 상선들이 있으며 당연히 그곳으로 가는 항로에 정통한 수로안내인도 있다는 것이다. 그 후 선대는 인도의 캘리컷에 가 닿았으며, 향료를 적재한 배는 다시 서쪽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 희망봉을 지나 아프리카 서안을 연안항해하여 리스본에 도착했다. 포르투갈 궁정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당시 유럽 전체가 인도라는 동방을 향한 열망과 함께 바닷길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었는데 그 과업을 포르투갈이 해 냈기 때문이다. 인도로 가는 뱃길이 열린 후에 진행된 포르투갈의 해양확장은 참으로 경이적이다. 그들은 남쪽으로 아프리카 서안의 항해 교역 기지들에서 시작하여 희망봉, 마다스카르, 아프리카 동안, 아라비아 반도, 인도 남부,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그리고 대만을 거쳐 중국 동안으로 북상하였고, 드디어는 당시 서구 유럽에는 그 실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극동 아시아로 향하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일에 당시의 최첨단 전쟁무기인 대포를 앞세웠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중세에 유럽이 동양보다 앞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쟁무기였다.

 

대항해를 하며 동쪽으로 끝없는 항해를 계속하던 포르투갈 선대가 만난 새로운 땅은 말로만 듣던 전설 같은 땅 ‘지팡구’, 오늘날의 일본이었다. 포르투갈 표류 상선이 해양지리적으로 일본열도가 남쪽으로 가로놓여 조선에 흘러들어오지 않은 것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먼 바다를 건너온 이 푸른 눈의 상인들을 접견한 당시의 일본의 통치자인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서양열강이 바다를 건너 대확장을 꾀하고 있고 아시아 해역권의 적지 않은 부분이 그들의 영향권에 들어가고 있는 세계정세를 읽고 평소의 야망인 대륙 침략에 뜻을 굳힌다. 그들은 조총을 건네주었고, 일본은 그것으로 전투력을 배가시켰다.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의 실권을 잡은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그는 히데요시 때부터 구상되어온 동남아시아에서의 일본의 무역 정책인 ‘주인선 무역’을 실시했다. 그것은 일본 막부의 붉은 직인을 찍은 허가서 즉, 일종의 해운증명서인 주인장을 지닌 상선만이 일본을 출입하며 무역할 수 있는 제도였다. 이에야스 막부는 동남아시아에서 현지인들과는 물론 이곳에 진출한 포르투갈 네덜란드 상인들과도 교역을 하며 자본을 축적해갔다. 이 때 일본본토에서도 제한적이나마 교역을 진행했는데 나가사키 데지마 섬에 설치된 네덜란드 상관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당시 유럽이 자본주의적 에너지와 함께 발달된 기술문명으로 생산해 낸 적지 않은 과학 기술 물품들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갔다. 기압계, 온도계, 레이덴 병, 비중계, 암상 카메라, 환등기, 선글라스, 메가폰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당시의 일본인들의 눈에는 진귀하게 보였을 물품들이 일본사회에 소개되었고 자연히 그들의 문화생활에도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동남아시아 아열대권역에서 일본의 해양활동은 비교적 일찍부터 진행되었다. 14세기에 이미 일본의 상선은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여기에서 교역을 했고, 16세기 이후에는 비교적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당시 그곳에 진출한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 해양열국의 무장한 상선들의 전투에 용병으로 참여한 일본 사무라이들의 활동이 있었음이 전해지고 있다. 근대 이전부터 동남아시아 해항권에서 교역에 참여한 일본의 해운활동과 거기서 축적된 자본은 훗날 일본의 근대국가 형성에 있어서 경제적 에너지가 되었다.

 

중세 말 또는 근대 초에 있었던 일본의 해양활동이 근대국가 형성에 자본주의적 에너지가 되었다면 일본 근대국가의 사상적 기초는 주로 네덜란드로 대표되는 서구와의 교역에 따른 문화교류에서 나왔다. 나가사키 앞바다에 있는 데지마 섬에 입항하던 네덜란드 상선은 당시 한창 자본주의적 에너지로 달궈지고 있던 유럽사회가 생산해 낸 지금 수준에 비하면 매우 초보적이긴 하지만 당시로 보아서는 신기하고 진귀한 물품들을 쏟아냈다. 이러한 수입품들이 일본 사회의 소비 시장에 소개되었음은 물론이다. 서로 다른 문화권끼리의 교역은 문화이동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일본에 소개되는 서구의 물품 중에는 서적도 있었다. 그와 같은 여러 가지 서적 중에는 의학서적들도 있었는데 외과 수술을 위한 인체해부도 그림책이 당시 시대의 흐름에 깨어 있는 일본 외과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자기들이 믿고 있던 중국에서 전래된 인체해부도에 오류가 많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네덜란드가 전해주는 서구의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의학서적 외에도 그들이 전해주는 각종 과학문명 기술에 대한 서적을 받아들이면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전부 네덜란드어로 쓰여 있으니 번역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지만.

 

서구유럽이 자본주의를 발달시켜나간 과정에는 동남아시아 열대 지역의 풍부한 산물의 유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이런 나라의 무장을 한 상선들은 인도네시아, 버마, 태국, 필리핀 등지에서 교역을 하면서 또는 현지의 식민 지배를 위하여 서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상생을 도모하는 등 복잡하게 뒤섞이고 있었다. 한 때 네덜란드의 해상세력이 우위를 점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수도 암스테르담에는 열대 동남아에서 건너온 수많은 산물들이 소개되었다. 하룻밤 자고 나면 또 새로운 물품이 나올 정도로 너무나 많은 물품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자 물질 또는 물질 현상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 변화가 있기 시작했다. 유럽이 갖는 세계관과 인식론은 흔들렸다. 당대의 철학가 데카르트가 남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철학명제는 이와 같은 사회적 기류와 관련이 있다. 훗날 유럽에 박물학이란 학문이 생기고, 박물관이 설립되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과 일치한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의 결과물이 일본에 전해졌다는 데에 우리들의 아픔이 있다. 네덜란드로 대표되는 유럽의 학문을 연구하는 ‘난학’은 당시 네덜란드 상인이 전해 준 각종 서적을 번역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이들 ‘난학’ 연구자들은 생의 전부를 바치다시피 오직 번역작업에 매달렸다. 생전 처음 보는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문장을 번역하는 일은 난제 중의 난제였다. 중화권이 사용하는 한자 용례의 규범을 벗어나 새로운 한자어를 만들어야 하는 일도 그들 난제 중의 하나였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문화, 예술, 교양, 이런 말들은 다 그 때 생겨난 단어들이다. 난학자들의 연구 활동은 차츰차츰 번역 수준에서 벗어나 서구의 과학문명과 물질문명이 갖는 사상, 또는 이념과 궤도를 같이 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몰랐다. 이것은 훗날 일본이 메이지 유신이라는 개혁에 성공하고 식민제국주의의 근대국가로 나아갈 때 정치이념과 외교철학의 근원적 에너지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우리에게는 실학이라는 서구가 추구하는 실용적 가치관과 일치하는 학문이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도 못한 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위대한 저작물이 그들 저자 개인의 것으로만인 채 남겨지고 말았으니 서글픈 일이었다. 이웃한 두 나라에서 비슷한 세대에 진행된 학문, 또는 학문운동이었지만 그 결과는 천양지차로 격변하는 약육강식의 국제관계에서 한 쪽은 점령국, 다른 한 쪽은 그들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근대에 증기 금속선의 함선을 갖춘 서구가 일본에게 처음으로 문호를 개방하라고 압박한 것은 1853년에 미국의 페리함대가 에도만 입구에 왔을 때의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1876년에 부산항, 원산항이 일본에 의해서 강제 개항되었고, 그 후 본격적으로 외국 선박들이 우리의 바다를 드나들었다. 양쪽 다 외세의 거센 물결은 바다를 통해서였다. 그렇지만 반응은 달랐다. 한 쪽은 쇄국, 다른 한 쪽은 개국이었다. 운명의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던 결코 한눈 팔 수 없는 혼돈스럽고 위험한 국제정세가 예고되고 있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은 너무나 오랫동안 잠을 자고 있었다.

 

□ 심호섭, 해양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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