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해항해 <제3회>

등록일2021-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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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리아호는 마치 열대지방 밀림의 늪 속에 빠졌을 때 어찌할 수가 없어 계속 빠져들어가는 식으로 기동력이 상실되어 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때 빙해 항해의 기본 철칙은 계속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엔진 파워를 최대로 올려 계속 앞으로 항진하는 방법뿐이다.

 

순간 나는 태풍 속의 파도가 그리웠다. 바닷물조차 볼 수 없이 두꺼운 아이스 팩으로 뒤덮인 지역을 항해하기보다는 차라리 태풍 속에서 파도에 시달리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1시경에는 선수와 선교에 강력한 서치 라이트를 비추었는데, 선박 주위에 라이트를 장치한 다른 선박을 만나게 되었다. 약 30마일 전방에서 등대로 오인할 정도로 서치라이트는 강했으며 선박 주위의 라이트는 선박 주위가 얼어붙지 않도록 장치된 듯 추측되었다. 본선을 통과할 때에 쌍안경으로 바라보니 선수 부분이 뾰쪽한 편이었으며 '아이스 클래스(ice class)' 선박 같아 보였다. 아이스 클래스 선박은 선박 구조를 빙해 지역 항해에 편리하게 만들어졌으며 추진기가 보호되고 프레임 간격이 조밀하고 선수 부분은 얼음을 깨기 편하게 구조되었으며 선체 주위가 스팀 또는 라이트 시스템으로 설치되어 등급에 따라 A, B, C, D급으로 분류된다.

 

처음 이 배를 조우할 때에는 동료가 있다는 반가움이 있었으나 유유힌 본선을 지나 항해할 때는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24시경, 본선의 속력을 확인해 보니 4시간 동안 겨우 4노트로 항진한 것이었다. 다행히 냉각수 계통은 응급조치로 APT 밸러스트를 사용할 수 있게 조치되어 안심이 되었다. 선체의 손상은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아젤리아 호가 계속 움직여주어 얼음 속에 갇히지 않고 스크루 손상이 없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어둠은 계속되고 날짜는 23일로 바뀌었다. 새벽 1시경 잠깐 동안 침실에 내려와 있는 사이에 선교로부터 배가 나가지 않는다는 전화가 왔다. 즉시 선교에 올라갔다. 엔진은 'full ahead'인데도 속력표시기는 0의 숫자를 가리키고 본선은 아이스의 저항에 의해 정지된 상태였다.

 

처음 당하는 경험이다. 본선이 주위의 얼음과 같이 얼어 붙을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였다. 다급했다. 쇄빙선의 지원을 받으려고 VHF(고주파 무선전화)로 'ECAREG'를 호출했다. 응답이 없었다. 죽었구나! 무슨 조치라도 취해야겠다는 절박한 상황에서 책에서 얼음 속에 같여 있을 때에 빠져나오는 방법을 읽은 것이 떠올라 승무원을 선미에 배치하고 즉시 '올 스탠 바이(all stand by)'하고 기관은 선미의 얼음을 제거할 목적으로 'full ahead'를 유지하면서 연료유를 A벙커로 바꾸도록 지시하고, 그동안에 전방의 얼음상태가 약한 부분이 있나 확인하였다.

 

11시 방향 부근의 얼음 상태가 다소 약한 것같이 보여 기관 후진으로 선미 부근의 얼음 조각들이 제거되는 것을 보며 약 100미터 후진했다. 그런 후에 기관 전속전진으로 본선 좌현 11시 방향으로 얼음을 깨기 위해 전진하니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오면서 본선은 다시 정지되는 것이었다.

 

전진 타력이 약했던 것으로 판단되어 다시 미속 후진으로 약 200미터까지 조심스럽게 후진하여 다시 전속전진으로 좌현 11시 방향의 아이스 상태가 약한 부분으로 돌진하니 속력지시기의 숫자가 12.5노트에서 1노트까지 급강하하면서 얼음이 깨졌다. 얼음이 깨지면서 속력지시기의 숫자도 올라가며 아제리아호는 다시 전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의 기분은 정말 전쟁터에서 나온 기분이었다.

 

당시의 위치는 안티스코티 남남서방 약 60마일 부근이었다. 상황이 종료된 시간은 새벽 2시 30분경이었다. 아이스 팩을 깨면서 얼음을 헤치며 엔진은 전 파워를 내고 있으나 본선의 속력은 3, 4노트의 거북이었다.

 

새벽 3시경이 되어 어느 선박에서 'ECAREG'를 호출하는 VHF소리가 들려왔다. 주위에 배가 있다는 반가움과 상대선이 어떤 어려운 사정이 있다는 예감이 들어 본선이 응답하여 통화하다 보니 한국 선원이 승선한 선박이었다. 상대선도 본선과 같이 얼음에 갇힌 상황이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본선도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고 있는 중이어서 본선에서 실시한 방법만 전해주고 항진했다.

 

06시 경에 안티스코티 남단 근처에 도착하였다. 아이스 상태는 양호해지기 시작하고 풍력도 다소 약해지면서 본선의 속력도 7, 8노트로 증가하였다. 다소 마음의 여유가 생겨 침실로 내려갔다. 화장실의 변기와 목욕탕의 물은 온통 얼어붙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8시경에는 아이스 상태가 더욱 양호해지고 속력도 9, 10노트를 유지할 수 있어 '오픈 시 아이스(open sea ice)' 상태가 되면 스크루의 상태를 점검하라는 지시를 하고 침실로 들어갔다.

 

오후 2시경에 기상하여 기관장으로부터 엔진 상태가 평소와 같다는 보고를 받고 스크루의 손상이 없다는 안도감이 그동안의 피로를 잊게 하였다.

 

24일 오후, 부두에 접안시키고 선체를 확인했다. 흘수 부근의 양현 외판의 페인트는 전부 벗겨지고 선수 부근은 철판의 흰 살이 보일 정도였다. 선체의 손상은 프레임의 간격이 좁을수록 적고 넓을 수록 'dent'(오목하게 들어감)된 것이 심했으며 선수 부근에 가까울수록 또한 덴트가 깊었다. 벌 바우스 부근에는 얼음에 찍혀 약 300mm, 깊이 5mm의 'surface crack'(표면균열)된 부분도 있었다. 다행히 스크루와 러더의 손상은 없었다.

 

■ 글, 조성우(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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