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일지를 펼치면(2)

등록일202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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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일지를 펼치면(2)

장일경 ㅣ  수필가, 해기사

 

 

전 세계 항구가 있는 나라는 거의 가 보았지만 기회가 닿지 않으면 갈 수 없는 나라가 북한이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필자는 두 번이나 방문을 했으니 필자는 드문 케이스다.

인도적 차원에서 비료, 쌀 등을 북한에 갖다 주게 되었다. 퍼주시기 대북지원이니 어쩌니 탈도 많고 말도 많았던 지원이다. 본선은 울산에서 비료를 싣고 원산항에서 하역을 하게 되었다. 도무지 너무 흥분이 되어 한동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분단 이후 아무나, 누구나 갈 수 없는 가깝지만 먼 땅,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았던 북한에 직접 간다고 하니 설레기까지 했다.

선적을 끝내고 출항을 했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NLL을 넘자 기다렸다는 듯이 북한 측에서 우리를 호출한다. 벌써 억양이 다르다. “여기는 북조선 인민 해군이다. 정체를 밝혀라!” 생전 처음 들어보는 고압적인 말투가 당황스럽다. 대북 지원 비료를 실은 상선으로 원산항으로 가는 중이라고 하자 “알았다” 한다. 원산항 입구에 접근하니 파이로트배가 나오는데, 참 한심한 수준이다. 도선사라고 하는데 낡아 빠질 대로 빠진 국방색 코트에 수염도 제멋대로, 이웃집 아저씨같이 소박한 아저씨는 나더러 “선장 선생”이라고 부른다. 1항사라고 하자 “아! 부선장선생?” 한다. 생판 처음 듣는 부선장 소리에 조타수가 웃는다. 휴대폰, 망원경, 카메라를 비롯한 통신장비를 전부 출항 시까지 유치한다고 한다. 이전에 어떤 선박에서 일항사가 사진 촬영을 하다 발각되어 상당히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갈마반도가 가득 시야에 들어온다. 아, 바로 그 유명한 명사십리다. 해당화는커녕 백사장에 쥐새끼 한 마리 없이 고요하다. 한국 같았으면 호텔하며 온갖 유흥건물이 들어서고 바닷가를 거니는 연인들로 시끌벅적할 텐데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섬 사이로 돌아들어갈 때 뭔가 이상했다. 섬 언저리에 전부 교통호가 파져 있고 굴 같이 생긴 것들이 보였다. 전쟁준비를 끝냈다더니 말로만 듣던 것이 피부에 와닿는다.

부두에 배를 붙였다. 부두가 꽤나 넓었다. 창고 지붕마다 붉은 대형글씨로 온갖 전쟁구호와 김정일에 대한 충성서약 구호가 온통 도배되었다. 하역시설은 아주 옛날식 구형 트레인이 설치되어 있고 외국 상선 같이 보이는 배는 아예 보이지 않는다. 멀리 시가지 쪽으로 아파트 건물군이 보이는데 우리나라 초창기 아파트 정도의 촌스러움을 보이는 아파트다. 하역인부들이 하역 시작 전에 부두에 집결 점호행사 같은 걸 한다. 약 1개 중대 병력 정도의 인부들이 일렬로 본선에 들어가면서 “반갑습네다.”하는데 굉장히 쑥스러워했다.

그날 오후 회사에서 새로 지급한 근무복에 모자를 쓰고 그들이 제공하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원산 시내를 달린다. 8차선 도로에 차들을 볼 수가 없다. 띄엄띄엄 차들이 지나가긴 하는데 고급 승용차는 아예 보이지 않는다. 거리의 상점 풍경이 굉장히 낯설다. 우리처럼 네온사인이나 외국어가 도배되고 건물에 겹겹이 매달린 그런 간판이 없다. 60년대 필자가 살던 소도시의 간판이 생각났다. 양철판에 붓으로 어설프게 쓴 그런 촌스러운 간판들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상점 안에 상품이 보이지 않는다. 거리 풍경이 황량하게 느껴질 정도다. 가다 보니 오른쪽 부두에 옛 만경봉호와 신 만경봉호가 접안해 있다. 유명한 배다. 60년대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을 꾀어 나카타에서 북한으로 이주시키던 그 유명한 배다. 아직 퇴역하지 않고 낡은 세월을 안고 접안해 있다. 실제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다.

어느새 송도려원으로 들어섰다. 우리로 치자면 호텔이다. 십몇층 높이로 일층 로비의 높이가 굉장히 높다. 정면에 김일성이 망원경을 들고 선 초상화가 압도한다. 프론트 데스크가 있고 한켠에 커피숍에 해당하는 예스러운 전통찻집이 있는데 쌍화차 정도 수준의 차를 파는 듯했다. 한쪽은 상점이다. 각종 잡화를 파는 소규모 편의점이다. 아직 음식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하여 이곳저곳 기웃거리고 다녔다.

그러는 와중에 내 눈을 사로잡은 진풍경이 있었으니 로비 한쪽 벽면에 걸린 동양화, 서양화 작품이다. 북한에 와서 이곳 그림을 볼 수 있다니 너무나 뜻밖이다. 유화그림은 사실 너무 빈약하다. 전부 사실풍이며, 1960년대의 화풍에서 정지된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한국전쟁 중에 월남한 화가 수가 월북한 화가 수보다 훨씬 많았다. 거기다 외부와 단절된 체제 속에서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시대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 아니면 선전화 제작에 동원 됐으니 순수창작 활동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시대 속에서 살았던 셈이다. 당의 명령에 따라 외국 관광객 판매용으로 상업적으로 그림을 그려야만 했으니 아예 작가 혼을 기대할 수 없을 터.

그 판매대를 지키고 있는 육십대 초로의 사내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선원들이 그저 한번 훑어보고 지나가는데 필자 혼자 쭈그리고 앉아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으니 자기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같은 한국화이면서도 남한과 북한의 화법이 다른데 선을 먼저 그리고 채색을 하는 남쪽의 선묘법과 달리 면을 먼저 그리고 선을 그리는 북한의 몰골법의 차이다. 그런 차이가 분단이 안겨준 예술의 비동질성을 말하는 게 아닌가 하는 필자의 생각에 그도 동감한다고 했다. 외항선 선원이며 오늘 오게 된 연유를 말하니 반갑다면서 자기소개를 한다. 원산 소재의 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다 지금은 이 외국인 상대의 기념품 판매원으로 전락한 자기 신세를 한탄했다. 필자도 취미로 그림을 그린다고 하자 굉장히 반가워한다. 일본 오사카 등지에서 자주 전시회를 연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 작품 중에서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으면 선물로 줄 테니 고르라고 했는데, 사양했다. 작가의 작품을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구입해야지 처음 만난 사이에 거저 받아가는 것은 작가에 대한 결례라며 한사코 사양했다.

나중에 동료에게 달러를 빌려 구입한 작품이 홍매화다. 표구를 하여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볼 때마다 항상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가로로 펼친 화선지 중앙을 고목 매화 등걸이 힘차게 가로 질렀고 잔가지 가득 홍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보는 이의 눈을 환하게 틔운다. 그 등걸 위에 참새 한 쌍이 사이좋게 앉아 있다. 그런데 참새들의 표정이 참 재미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보는 듯해 찡해져 온다. 오른쪽의 약간 큰 참새가 근엄한 표정으로 뭔가 조곤조곤 이야기를 하는 것 같고 옆의 작은 참새가 눈을 아래로 깔고 약간 못마땅한 표정으로 듣고 있는 듯하다. 살아생전 부모님은 티격태격 자주 다투셨다. 아버지의 불뚝 성격에 늘 어머니는 순종과 인종으로 평생을 해로하셨다. 어머니께서 먼저 세상을 버리신 뒤 외로워하시는 아버지를 지켜보기는 건 마음 아팠다. 어느 해 어버이날 아버지는 어머니가 그리워 공원묘지에 몰래 다녀오셨던 모양이다. 버스에서 내려 노인네 걸음으로 한 시간 이상 걸어야 되는 먼 봄날의 시골 국도를 걸으며 옛날의 금잔디 동산 생각에 젖었을는지 모른다. 어머니 곁에 마련해 놓은 당신의 자리를 바라보며 낙화유수(落花流水), 편편화심(片片花心)의 허무한 인생에 봄날 하루가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는지 모를 일이다.

다시 돌아가자. 만찬장으로 입장했다. 하얀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에 남북한 참석자가 홀짝으로 이웃하여 착석했다. 남북 적십자대표들의 인사가 왔다갔다한다. 금시라도 통일이 될 것 같은 분위기다. 인사가 끝날 때마다 열렬한 북한식 박수가 터진다. 상차림을 보니 잡채, 떡, 조갯살 등이 나오고 술은 용성맥주에 포도주, 소주보다 도수가 높은 화주가 각각 개인 앞에 놓여있다. 처음에 다들 긴장하여 선뜻 잔을 비우지 못하고 눈치만 슬슬 살피고 있자 북한 측에서 자꾸만 강권을 한다. 가만 보니 진정 손님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원님 덕에 나발 분다고 저네들 잔치 하는 날이다. 한창 진행 중에 갑자기 정전이 된다. 무려 그날 밤 서너 번 정전이 된 걸로 기억한다. 전기 사정이 이렇게 좋지 않다보니 초저녁부터 아예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암흑세상인 모양이다. 그렇게 만찬을 끝내고 귀선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 많던 비료 포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완전 인해전술이다.

며칠 후 양국 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한번 가기도 어렵다는데 필자는 두 번씩이나 북한 의 항구에 입항했다. 그 유명한 남포항 갑문을 통과하고 대동강 하류를 따라 올라가다 부두에 배를 붙였다. 이번에는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렇게 놀랍지 않았다. 이번에는 선장의 간청으로 남포시내 구경을 하게 되었다. 이게 웬 횡재냐며 남포항만청장을 따라 나섰는데, 게이트 밖을 나가지 못하고 부두 안 선원 구락부라고 현판이 걸린 곳으로 데려간다. 당에서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단다.

그렇다고 따질 수도 없는 일, 두리번거리며 테이블에 앉으니 벽에 붙은 텔레비전화면에서는 모두 군에 관련된 방송만 이어진다. 실망한 표정을 보이자 녹화된 음악영상을 보여주는데 유명한 보천보 경음악단의 연주가 삼류극장의 쇼를 보는 듯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음식이라고 나와도 메밀국수에 조개를 삶아 별로 청결하지 않는 그릇에 담아 나온다. 한심한 수준이다. 술은 김일성 수령 동지께서 즐겨 마셨다는 백두산 들쭉술이라는 독주가 촌스러운 병에 담겨 나온다. 항만청장과 술을 좋아하는 본선 기관장이 대작을 벌였는데, 두 병을 까고 마신 뒤 계산을 하는데 이럴 수가 있나! 이백몇십불 정도가 나왔단다. 서울의 일류호텔레스토랑보다도 비싸다. 먹고 난 뒤에 비싸다고 따지는 우리가 촌놈인지, 그까짓 것 잘사는 남조선 동포가 북에 와서 좀 바가지 쓰면 어쩌냐는 말투가 완전 상투 잡힌 꼴이다.

하역을 끝내고 남포항을 출항 남으로 내려오는 길이 칠흑같이 어둡다. 그러다 백령도 근처에 오니 인천 쪽 하늘이 대낮처럼 훤하니 밝다. 북과 남의 밤하늘부터가 천지 차이다.

 

□ 자료출처 : <월간 海바라기> 2015년 2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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