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바다는 늘 푸르고 넘실거려

등록일20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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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바다는 늘 푸르고 넘실거려

 

 

한평생 바다 위에 떠돌아다니던 내가 지난 10 년간 뭍에 묻혀 살아가고 있다. 중간에 한번 복음 선교선을 몰고 중서부 태평양을 6개월간 항해한 적은 있었지만 아직도 1 급 선장(갑종) 면허장이 살아 있어 언제나 바다로 나갈 태세가 돼 있다. 이 나이에 또 바다에 나갈 거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의 선장 면장은 평생 내 곁을 떠날 수가 없다. 아마 내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면장은 나와 함께 하여야 할 것이다. 90년대에 나는 그 어려운 도선사 시험에 합격하였지만 해군 구축함 함장 경력이 가산되지 않아 승선경력부족으로 탈락된 아픈 경험을 못내 지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2001년 복음 선교선 선장으로 취임하여 도선사를 필요로 하는 도쿄 항이나 고베 항에서 자력도선으로 도선료 경비를 절감한 경험이 있어 도선사로서 자격을 스스로 자인하면서 위로받기도 하였다. 이렇듯 나는 바다에서 Captain 으로서 관록을 영광스럽게 여기며 바다를 나의 고향처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나의 바다는 많다. 내가 나라(奈良)에서 태어나 6살 때에 오사카(大阪)의 전쟁분위기를 피해 고향으로 떠나면서 시모노세키에서 여수로 가는 부관 연락선으로 현해탄을 건널 때의 그 짙은 남색 바다의 물과 파도를 가르면서 달리는 배의 낭만적인 바다광경은 평생 내 머리에 입력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20세기 초 일본유학중인 최초의 신여성 윤심덕 가수가 왜 짙푸른 현해탄 바다에서 투신 자살했을까 가슴 아픈 사연을 연상해 본다.

8살에 나는 국민 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일제는 전시동원체제로 돌입하여 지금의 북한처럼 교과서마다 전쟁놀이 글과 그림이 많았다. 선생은 육군의 탱크와 해군의 군함을 그려보라고 교육시켰다. 나는 해군의 군함과 남색 바다가 좋아서 자꾸 그리곤 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짙은 남색이 내 마음에 각인이 되어버렸다.

소학교 담임선생이 1학년생을 이끌고 고장 가운데 솟아 있는 말미 봉으로 등산했을 때에 산정에서 멀리 보이는 서남해의 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섬들이 너무 아름다웠다. 전쟁 중에는 가뭄과 한해로 우리는 엄마를 따라 삼십리 길 바닷가에 가서 게와 장둥어를 한 소쿠리 잡아와 주식 대신 생계를 메꾸어 나간 기아의 시기가 있었다. 물론 썰물 때에 먹 거리를 잡다가 밀물이 되면서 빠른 바닷물이 온 바다를 가득 채우는 광경을 보니 바다가 신비하기도 하였다. 그날 잡은 게나 고기의 맛은 추억이기도 하였다. 그 이후 언제부터인지 그 바다 쪽으로 석양의 붉은 놀이 구름사이 가득 찰 때 나의 마음에는 한없는 낭만과 애정이 넘쳐흘렀다.

 

◆고향, 해남에서 海洋人의 꿈 키워

 

세계 전쟁이 한창인 어느 날 새벽 우리 집 부엌에 낯설은 손님이 남루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일본군 징용으로 동원됐다가 도망쳐 우리 집에 와서 남의 눈을 피해 부엌에서 어머니가 주신 꽁보리밥 한 그릇을 얼른 먹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는 완도나 진도 아니면 섬에서 사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어머니 93세 되는 1996년까지 51년 동안 평생 찾아오지 못한 걸로 봐 어느 섬으로 귀향하던 중 붙잡혀 죽었거나 바다 건너다가 기력이 빠져 사망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살아 있으면 어머니를 찾아 은혜로운 인사라도 나누었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6.25 전쟁 때 숙부가 우물에 손이 묶인 채 투하 살해 되셨다. 잔악무도한 공산도배의 소행이다. 당초 숙부는 완도에서 배로 피난할 계획이었는데 그만 산속에 숨어 피난하다가 9.28 수복 시 도주하는 빨치산에게 그 비참한 희생을 당한 것이다. 아! 왜 바다로 나가 피난하시지 않았을까. 바다에는 살 길이 열려 있었는데. 바다! 바다는 생명선이더란 말인가?

 

전쟁으로 온 고장이 폐허가 되었으나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느 봄날 전교생이 지금의 땅 끝 마을 어란으로 수학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이 어란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 남한에 미군이 진주할 때 수륙양용차를 타고 여기에 상륙하였다. 아직도 못 찾은 일본군의 지하진지가 있는 어란에서는 태평양이 바라보인다. 감수성이 강한 학생들은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시를 읊으며 무언가 나름대로 감상하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었다. 나도 그 때 비슷한 감상 속에 마음에 남길 바다 추억을 안고 돌아왔던 것이다.

해남반도에는 다도해에 접한 포구(浦口)나 창(滄)이 많다. 북창, 남창, 해창, 둔지포, 어성포, 울돌목, 백포. 성진, 별진... 이들은 우리나라 수운을 주도하는 국가 주요 요충이였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에 이렇게 많이 펼쳐진 항 포구와 지형지물을 최대로 활용하여 해전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비록 전선은 미비하였으나 왜군이 잘 모르는 지형지물과 해상수로여건을 전술에 적용하므로 백전백승의 쾌거를 달성하였던 것이다. 해남읍의 서림(西林)은 이순신장군이 수병들을 훈련시켰던 곳으로 수 백 년 된 팽나무 숲이 무성하여 우리 중고등학생들이 야외 수업장으로 많이 애용된 곳이다. 이리하여 해남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곳이다. 지금도 명량 울돌목에 자리한 충무공의 비석에서 나라의 운세를 나타내는 눈물이 흐를 때가 많다. 6.25때에도 그랬다. 여기저기 왜군과 싸우다 산화한 의병들의 무덤터가 많이 있다. 서산대사가 머문 대흥사도 유명하다. 대흥사의 두륜봉에 올라가면 가을날엔 제주도가 눈 안에 들어온다 해서 그 바다의 호연지기를 체험할 수가 있다.

고향, 해남은 여름철 태풍의 길목이라 장마홍수 침수로 매년 수해를 겪는 곳이기도 하다. 그 막대한 홍수는 땅위의 오물들을 쓸어서 바다로 흘러들었다. 담수가 흐르지 않으면 썩는다. 그러나 바다는 이러한 땅위의 쓰레기를 관대하게 받아들인다. 바닷물은 썩는 법이 없다. 도리어 지구의 오물을 정화하여 다시 뭍으로 보내줄 만큼 한 없이 너그럽고 풍만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래서 바다를 인해(仁海)라고 말할 때가있다.

나는 바다가 좋다. 1953년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전선에 나간 형들 대신 아버지를 도와 열심히 농사일을 했다. 내가 농촌에서 2년간 농군생활을 하면서 강한 도전을 받게 된 것은 농촌에서 먹고 일하는 기계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각성이 발동하여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판단으로 대학입학시험에 몰두하였다.

1955년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통지를 받았다. 그 해 육사를 복수지원하였는데 육군사관학교의 합격통지도 받았다. 이때에 나는 바다를 선택하여 진해로 향하였다. 실로 내가 내 평생 운명을 건 과감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해군함장-외항선 선장 은퇴… 바다는 내곁에

 

1956년 4월 꽃샘추위가 강했던 진해 옥포만의 늦겨울 나는 힘겨운 45일간의 훈련을 마치고 해군사관학교 제 14기로 입교하였다. 그리하여 4년간 해군장교로서 소양과 바다에 관한 공부를 마치고 1960년 4월 해군소위로 임관하였다. 바다에서 삶을 보내기 위해 항해과를 선택하여 본격적인 바다 사람이 될 인생설계를 세운 것이다.

소년 시절 그리던 바다에 투신하기 위하여 긴 세월 준비를 하여야 했다. 바다란 창조주가 지은 거대하고 무궁한 지구의 비경이기 때문에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과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장대한 힘이나 에너지의 원천일 수 있다는 상상을 해 볼 때에 우리는 그 질서와 현상을 인식하고 순응, 적응하는 능력을 배양하여야 했던 것이다.

졸업 후 고향에 휴가 중인데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는 정국 불안 가운데 4월 25일 함대사령부의 귀대호출을 받고 서해 어로보호작전 기함에 파견승조하게 되었다. 이 혼란한 육지세상을 떠나 바다로 나갈 수 있으니 마음이 좋았다.

진해항 부두를 출항하여 협수로를 빠져나와 가덕도 등대를 뒤로 남해안으로 항진할 때 4월의 해무가 수평선 위를 엷게 덮은 그 사이사이 남해의 섬들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바다에서는 이론을 실천하는 실제의 현장이다. 남해바다 위에 떠 있는 섬들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섬 위에 누가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호기심이 증폭되기도 하였다. 남해를 지나 해남반도를 오른쪽으로 보고 조류가 센 맹골 군도 사이로 빠져나가 서해바다로 들어설 때에 이 바다를 통해 오간 옛 조상들의 숨겨진 해양역사가 궁금하기도 하였다. 2일간의 항해 끝에 연평도에 도착하여 외항에 닻을 놓았다. 소위 조기잡이 어선들이 수 천 척 이곳에 집결하여 연평도 근해에 산란하려 북상하는 조기를 잡겠다는 어선들의 월북이나 납북을 방지하려는 서해어로보호작전 임무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이때가 1960년인데 남쪽으로 침투하는 간첩선 색출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니 북한 정권은 집요하게 대남 적화 전복목표를 국시로 하여 지난 60년간 계속해서 오늘까지 대한민국을 못살게 굴고 있는 지구상에 유일한 독종정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도심에서 공공연하게 반정부 투쟁을 벌이는 것을 보면 속히 북한 정권이 탈바꿈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렇게 초급장교로부터 1985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북한이 침투하는 간첩선 탐색과 색출작전에 참여하면서 실로 바다에 대한 낭만이나 해군으로서의 국토수호의 사명을 완수해야 하는 에너지를 간첩선 침투 방지에 낭비했다는 회고를 하게 된다. 실로 해군의 바다생활은 고단한 기간이었다.

1985년 심신을 바쳐 봉직한 사랑하는 해군을 떠나면서 나는 다시 더 큰 바다를 선택하게 되었다. 기왕 바다에 투신한 인생이니 대양생활을 해야만 바다를 이해하고 또 해양인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1986년 11월 대한해운(주) 선대의 아카시아호 1항사로 14개월간 근무하면서 시련과 수련의 고행을 마치고 군자란호의 선장의 명령을 받았을 때에 그 영광을 즐기면서 10여 척의 상선을 거쳐 안전항해에 전력을 다하여 무사히 승선직무를 마칠 수가 있었다.

오대양의 바다는 지구의 2/3를 차지하였으니 그 넓고 무궁한 바다를 어찌 내가 다 다닐 수 있으랴만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등 대양을 다니면서 육대주의 항구를 출입하였으니 비록 은퇴선장이라 하더라도 나의 마음의 바다는 언제나 넓고 푸르고 너울이 지나고 있다. 그래서 나의 바다는 나의 수필문학으로 영원히 마음 속에 넘실거리고 있을 것이다.

 

박인석, 수필가

 

□ 자료출처 : 海바라기 2008년 8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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