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

등록일20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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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평양

주학성

 

선상생활은 외롭고 고독하다.

선원들은 대양을 항해 하는 화물선 갑판에서 끊임없이 변화 하고 있는 대 자연을 바라보며 종종 깊은 명상에 잠기곤 한다. 선원들은 때로는 바다가 되기도 하고 하늘의 별이 되기도 하고 자기 자신의 친구가 되기도 하면서 자기 자신과 끊임 없는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내가 화물선 선원이 된 것은 오년 여 전 이었다. 마도로스의 낭만이나 낯선 먼 외국의 풍물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하루 빨리 가난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게 선원이 된 주된 동기였다. 내가 승선한 화물선은 일본과 미국을 왕래 하는 정기 화물선 이었다. 이 화물선의 주 항로는 남태평양 이었다.

이 화물선은 일년에 한두 번 정도 부산항에 입항 할 경우도 있었다. 부산항 입항이 결정 되면 선내는 온통 축제 분위기가 되곤 하였다.

남태평양은 대체로 온화한 날씨였다. 수면은 마치 거울 면처럼 파도 한점 없었으며 파아란 수정처럼 맑은 물빛을 하고 있었다. 며칠 전 내가 승선한 화물선의 다음 기항지가 부산항으로 결정 되었다. 요 며칠 동안 선원들은 가족과 친지들과 그리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온통 마음들이 들떠 있었다. 이제 내일이면 이 화물선은 부산항에 입항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일과를 마치고 침대에 몸을 눕혔지만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일이면 일년 동안의 고달팠던 선상 생활을 잠시 접고 그리웠던 가족 친지들을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개월의 꿈같은 년차 휴가가 시작 될 것이다.

나의 머리 속에는 일년 동안의 선상생활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태평양의 아름다운 모습, -바다, 하늘 , 남태평양의 저녁노을, 수면을 가로지르며 헤엄치고 놀던 돌고래들, 날으는 은빛 물고기들, 밤하늘의 보석처럼 아름답던 수많은 별 무리들, 그리고 은은하게 밤바다를 비추어 주던 달빛들이 나의 몸 구석구석에 꿈결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화물선의 선미 갑판에 낡은 목재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나는 선상 생활 중에 종종 이 의자에 앉아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대 자연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기곤 하였었다. 명상에 잠긴 나는 바다의 물고기들과 함께 헤엄치며 놀기도 하고 밤하늘 높이 날아올라 별들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었다. 나의 명상 속에서는 외롭고 고독한 선원생활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고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미래의 청사진들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갑판으로 나와 의자에 앉았다. 나의 눈은 감겨진 채로 였으며 나의 얼굴과 입고 있는 옷들은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을 뿐 그 실체가 잘 구별되지 않았다. 때로는 나는 보이지 않았고 갑판 위에 덩그렇게 놓여 있는 의자만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의자는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하였다. 나는 미동도 하지 않는 채 석고상처럼 의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일과가 끝나면 나는 주로 명상으로 시간을 보냈다. 외롭고 고독한 생활에서 명상은 내 생활의 커다란 활력소가 되어 주고 있었다. ‘현재’라는 단어는 나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미래의 내 마음은 그리움, 희망,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남태평양은 따스한 햇살이 온 누리를 포근히 감싸고 있었고 파문 하나 없는 수면은 마치 파란 비단 천을 펼쳐 놓은 듯 하였다. 화물선은 저 멀리 수평선을 향해 쉼 없이 전진하고 있었다. 바다가 선수에 부딪쳐 일으키는 하얀 포말들이 눈부셨다.

수정처럼 맑고 고운 포말들은 파문이 되어 남태평양 상에 잔잔한 여운을 남기면서 멀리 멀리 퍼져 나가고 있었다. 화물선 뒷 꽁무니에는 스크류의 힘찬 박동으로 그려지는 항적이 수평선 저 너머로까지 진한 그리움을 담고 잔잔히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선미 갑판을 ‘만남의 광장’이라 이름 붙였다. 명상의 세계에서 만남의 광장은 누구든지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해도 좋은 곳이었다. 명상의 세계에선 선미 갑판은 때때로 화려한 무도회장이 되기도 하였고 성찬이 차려진 연회장이 되기도 하였다.

나의 마음은 어느새 멀리 바다를 건너 고향 마을로 달려가고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따듯한 남쪽 마을의 부모님을 뵙고 있었다. 어머님은 정화수를 떠 놓으시고 거친 바다에서 생활하고 있는 자식의 평안을 빌고 계셨다. 삼십이 넘도록 홀아비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당신 자식의 짝을 한시 바삐 만날 수 있도록 손바닥이 닳도록 빌고 또 빌고 계셨다. 나는 고향마을 뒷동산에 올라 옛 추억을 더듬으며 마을 구석구석을 하나 남김 없이 가슴에 담고 있었다.

바람 한점 없는 수면 위를 화물선은 미끄러지듯이 나아가고 있었다. 화물선의 진동에 놀란 날치(날으는 어종)들이 배 주위에서 무리지어 물위로 솟구쳐 올라서 한참을 날다가 머리를 물에 처박듯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남태평양의 물빛은 일반적으로 비교적 연한 초록색을 띠고 있었지만 햇빛의 반사 각도에 따라서 혹은 구름 때문에 생긴 음영에 따라서 검 푸른색을 띠기도 하고 연한 하늘색을 띄기도 하였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또는 햇빛의 강도에 따라서 물 색깔도 달랐다. 그저 보면 변함없는 바다였지만 유심히 관찰하면 주위 환경은 시시 각각 변하고 있었다.

어제 밤엔 오랜만에 선장, 조타수 그리고 기관원인 나 셋이 이 만남의 광장에 모여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선장은 모친 병환에 대해서 무척 걱정을 하고 있었다. 조타수는 자기 아이 자랑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자기 아들은 새까만 눈썹, 부리부리하고 시원한 눈, 서양 사람을 닮은 오뚝한 콧날 그리고 새하얀 피부, 어디 하나 험 잡을 데 없는 용모라는 거였다. 자기도 닮지 않고 자기 부인도 닮지 않은 것이 어쩌면 자기조상들 중에 멋지고 잘 생긴 분이 계셔서 자기 아들이 그 조상을 닮은 듯 하다고 했다. 조타수는 사진으로만 자기 아들을 보았을 뿐이었다. 조타수가 자기 아들의 이야기를 할 때 조타수의 눈은 깊은 연못 같았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헐리웃의 유명한 어느 배우의 얼굴을 상상하면서 조타수의 이야기를 감명 깊게 들었다. 조타수의 방에는 자기 아들의 장난감이 서랍 하나 가득 이었다. 장난감 중 몇몇은 유치원생들에게나 어울릴 법 한 것도 제법 있었다.

바다에는 돌고래 무리들이 달리고 있는 화물선과 나란히 보조를 맞추면서 신나게 경주를 하고 있었다. 선수를 훨씬 앞질러 가서는 마치 구경꾼에게 보이기라도 하려는 듯 물 밖으로 솟구쳐 올라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돌고 하얀 뱃살을 드러내 보이면서 등을 수면으로 향한 채 물속으로 첨벙 빠져 들기도 하였다. 화물선이 마치 자기들의 친구라도 되는 양 화물선의 앞, 뒤, 옆 할 것 없이 헤엄치며 달리기도 하고 멀리 사라졌는가 하면 선박 바로 옆에서 무리지어 천천히 헤엄치는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아마도 이놈들은 화물선이 항구에 그의 접근 할 때 까지 선원들의 벗이 되어 줄 것이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뿐이다. 화물선은 쉼 없이 줄기차게 전진하고 있었지만 바다의 중심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남태평양의 북쪽 수평선상에는 시커먼 비구름이 잔뜩 바다를 짓누르고 있었고 빨간 번갯불이 나무줄기처럼 바다를 향해서 뻗어 내리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화물선에서 수평선까지의 거리는 대략 오, 육십 킬로미터 정도였다. 천둥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북쪽 수평선 저 너머로는 지독한 소나기가 퍼 붓고 있음에 틀림없을 것 이었다. 어쩌면 태풍이 휘몰아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반대편 남쪽 수평선 위로는 구름 한 점 없는 코발트 색 하늘이 끝 간데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외롭고 고독한 생활을 하다보면 모든 게 그리워지는 법이다. 선원들에게는 미래를 위하여 담보 잡힌 현재의 생활은 별 의미가 없었다. 기다리는 장밋빛 미래가 있다면 세월은 더욱더 쉽게 흘러가 주지 않는다. 나는 승선 하는 날부터 달력 위의 하루하루에 가위표를 해 가면서 세월을 지우고 있었다. 나에게는 흐르는 세월 그 자체가 행복 이었다. 지난날의 상처는 세월 따라 흘러가 버릴 것이고 희망과 행복은 느리긴 하지만 언젠가는 세월 따라 나의 곁으로 다가 올 것 이었다. 흐르는 물은 얼음이 되어 나무뿌리를 붙잡고 잠깐은 쉬어갈 수 있겠지만 영원히 멈춰 서 있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겨울이 길면 봄은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었다.

해가 서쪽 수평선 너머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눈부시게 빛나고 있던 하늘이 점차 엷은 빛을 띤 은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노을이 물들면서 서쪽 하늘에는 구름과 하늘과 햇빛이 어우러지면서 어느새 커다란 호수 풍경이 나타났다. 호숫가에는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호수 가장자리에는 몇 마리의 백조가 한가로이 헤엄을 치며 노닐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기러기들이 점점이 호수 위로 날아 왔고 그 중 몇 마리는 막 호수에 내려앉으려 하고 있었다.

남태평양의 노을은 신비로운 그림들을 연속해서 그려 내고 있었다. 빙하를 인 하얗게 빛나는 산봉우리, 엷은 황금색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도 있었다. 절벽 사이의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물은 때로는 폭포수가 되어 우렁찬 소리를 내면서 흐르는가 하면 웅덩이를 만들어 맴을 돌면서 조용히 쉬기도 하고 실개천이 되어 졸졸졸 소리를 내며 바쁘게 흐르기도 하였다. 개울가 푸른 초원에는 사슴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하늘색은 점차 짙은 황금색 위에 붉은 색을 덧칠하기 시작 했다. 붉게 물든 노을은 신비로운 물감들을 가지고 형언 할 수 없는 아름다운 그림들을 연신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 세상의 그림들이 아니었고 이 세상의 물감들이 아니었다. 노을 진 서쪽 하늘에서는 황홀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있는 나의 상기된 얼굴도 노을에 물들어 황금빛 동상처럼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해가 서쪽 수평선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다. 남태평양 상은 온통 황금빛으로 넘실대고 있었다. 화물선 꽁무니가 만들어 내는 포말 섞인 항적은 마치 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 반짝거리면서 수평선 저 너머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수면 위는 서서히 어두움으로 덮여 가고 있었다. 나의 얼굴과 몸 전체에도 짙은 황금빛 물결이 넘실거렸다.

나는 삼십이 넘었는데도 아직 미혼이었다. 특별한 처녀를 찾기 위해서 결혼을 미루어 온 게 아니 었다. 이 세상엔 나를 위한 특별한 여자는 없을 것이었다. 그저 마음씨 착한 여자이기만 하면 족할 것 이었다. 나는 지난 번 년차 휴가 두 달 동안을 오로지 맞선 보는 데만 매달렸었다. 여섯 번째 맞선 본 처녀로부터도 거절을 당하고 보니 나는 결혼에 자신도 없어지고 맞선 보는 것마저도 두렵게 느껴졌다.

결혼이란 부부가 함께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한 침대에서 눈을 떠야 할 것이었다. 선원 생활에서는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주말 부부, 아니면 적어도 월말 부부 정도는 되어야지 일년에 한번 만나는 견우직녀 부부래서야 어느 처녀인들 좋아 할 리가 없었다. 마음씨 고운 처녀가 아니더라도 시집 와 줄 처녀만 있다면 나로서는 감지덕지 할 처지였다.

맞선 보는 것을 포기하고 있던 중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거절당할 줄 뻔히 알면서 나는 일곱 번째 맞선을 보았다. 일곱 번째 맞선은 결혼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부모님께 효도한다는 마음에서였다. 일곱 번째 맞선 본 처녀는 정말 선녀 같았다. 고운 피부, 맑고 시원한 눈동자, 적당히 오똑한 콧날에 잘 간추려진 입모습은 나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간직 해왔던 바로 나의 이상형의 처녀였다. 선을 본 후 나는 딱지맞을 것이 두려워 서둘러 승선하고 말았다. 결과야 뻔할 테지만 그 처녀의 모습만은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싶었다.

해가 서쪽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지 꽤 오래 되었다. 남태평양 상의 수면은 별빛에 반사된 황금물결이 선수에서 일어나는 파문을 타고 사방으로 번져나고 있었다.

일곱 번째 맞선 본 처녀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나는 그 처녀로부터 거절의 연락이 올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거절의 연락만 오지 않는다면 나는 그 처녀를 내 마음속의 연인으로서 언제까지나 고이 간직하고 싶었다.

나는 며칠 전 달 밝은 밤에 고향 마을 뒷동산에서 그 처녀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 날씬한 몸매와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는 그 처녀는 풀밭에 누워 나의 무릎을 베고는 꿈을 꾸듯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녀는 나에게 꿈꾸는 듯한 고운 목소리로 하늘의 수많은 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자 별자리의 전설을 들어 본 적이 있으세요 ?)

북두칠성(큰곰 별자리)과 북극성(작은곰 별자리)은 모자지간이지요.

(큰곰 별자리는 작은곰 별자리의 엄마랍니다.)

처녀의 목소리는 조용하면서도 아늑하여 마치 꿈속에서 선녀의 목소리를 듣는 듯 하였다.

(옛날 카리스토라는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어요. 카리스토 공주는 결코 남자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한 동료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신들의 제왕인 제우스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지요. 카리스토 공주는 사랑의 결실로 아르카스라는 사내아이를 낳게 되었어요. 이 사실을 알게 된 제우스의 부인 헤라가 분노를 이기지 못한 나머지 카리스토 공주를 흰 곰으로 만들어 버렸대요. 카리스토 공주가 곰으로 변하여 산 속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동안 공주의 아들 아르카스는 무럭무럭 자라서 훌륭한 사냥꾼이 되었지요. 어느 날 엄마 곰이 숲 속에서 자기의 아들인 사냥꾼 아르카스를 만났지요. 엄마 곰은 자기 아들을 보자 반가운 나머지 자기가 곰이라는 것도 잊은 채 아들을 품에 안으려고 와락 달려갔지요. 사연을 까맣게 모르는 엄마 곰의 아들 아르카스는 곰이 자기를 해치기 위해 달려드는 줄 알고 자기 엄마를 향해서 그만 활시위를 당기고 말았어요. 놀란 제우스가 재 빨리 손을 쓰지 않았다면 엄마 곰은 아들의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을 거예요. 제우스는 카리스토 공주를 구해서 하늘에 올려 큰곰 별자리가 되게 하고 공주의 아들 아르카스도 하늘의 별로 만들어 매일 밤 엄마별을 마주하고 북극 하늘을 맴도는 작은곰 별자리가 되게 하였답니다. 두 별자리는 매일 밤 마주보며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을 거예요.)

처녀는 엄마없이 홀아버지 밑에서 외롭게 자랐다고 했다. 카리스토 공주(큰곰 별자리)가 남자를 결코 사랑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어요. 나는 내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면 여한 없는 사랑을 하고 싶어요. 사랑하는 남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지금과 같이 언제까지나 꿈을 꾸듯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처녀와 내가 만난 그날 밤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유난히도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숲에서 온갖 풀벌레 소리가 감미롭게 들려오고 있었다. 나의 무릎 위에 누워있는 처녀는 마치 꿈속을 헤매고 있는 듯 하였다.

맞선 본 이후로 처녀는 나의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그 처녀는 나의 일부분이 되어 함께 숨 쉬고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남태평양의 밤은 온갖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밤하늘의 별들은 더욱더 영롱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처녀의 별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처녀의 목소리는 마치 풀잎에 구르는 이슬방울처럼 맑고 정다웠다.

(동 남쪽 수평선 위로 나즈막하게 떠서 하얗게 빛나는 청초한 별이 보이지요? 퍽이나 아름다운 이 별은 처녀 별자리에 속한 스피카란 별이랍니다. 수평선 근처에서 수줍은 듯 떨고 있는 스피카의 아름다운 모습이 마치 처녀 같지 않아요? 처녀별은 신들이 모두 인간을 버리고 떠나가 버린 후에도 홀로 인간 세상에 남아 사람들에게 사이좋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쳤지요. 하늘에 올라 별자리가 된 후에도 끊임없이 인간을 위하여 노력하는 마음씨 착한별이지요. 처녀별자리 위로 거문고별자리가 보이지요. 거문고별자리의 주성인 베가성은 견우직녀의 직녀성이지요.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에 나오는 날개옷을 입고 두 아이를 안고 있는 선녀이기도 하답니다. 거문고의 아름다운 선율을 들으며 선녀가 하늘로 날아 오르는 모습이 보이는 듯 하지 않으세요?)

남태평양의 밤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눈에서 형광물질을 발산하며 요란하게 헤엄치며 놀던 물고기들의 움직임도 현저히 줄어 들고 있었다. 밤하늘을 가로질러 흐르는 은하수도 흐름을 멈춘 듯 하고 반짝이던 별들도 졸고 있는 듯 보였다. 남태평양의 하루도 나의 희망을 싣고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멀리서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갈매기 울음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급기야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으로 바뀌었다. 나의 방문이 부서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

(강군 뭘 하고 있나. 빨리 일어나. 입항 준비 해야지.)

(부산 앞바다의 오륙도가 보이기 시작 했어.)

(고향을 앞에 두고 늦잠은 웬 늦잠이야.)

동료 기관원의 고함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잠깐 동안 멍한 상태였던 나는 한참을 지나서야 상황 판단을 할 수가 있었다. 부산에 입항하는 날이었다.

부산에 입항하면 꿈같은 나의 년차 휴가가 시작될 것이었다. 내가 아침식사를 막 끝낼 때쯤 선내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입항준비를 알리는 별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올 스탠바-이 (전 선원 입항준비) 지시가 연속해서 흘러나왔다. 곧 이어 기관실로부터는 기관의 우렁찬 박동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선박은 반복해서 전진 후진을 계속하고 있었고 그 때 마다 진동과 소음이 뒤따랐다. 선수에서 닻이 물속으로 내려가는 경쾌한 금속음이 들린 후에도 한참을 지나서야 선박은 조용해졌다.

입항이 완료되고 모든 상황이 종료되자 선원들은 상륙준비를 하고 한 사람 두 사람 식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내가 식당에 도착했을 때 선장님을 위시하여 대부분의 선원들이 식당에 모여 있었다.

(긴 항해에 모두들 수고 많았습니다. 무사히 항해를 마치게 된데 대하여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정종수 선장은 말을 마친 후 선원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강정화군, 이번 휴가에 결혼을 한다지? 상대 처녀가 퍽이나 미녀시라던데. 멋진 처녀를 만나 결혼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강군 결혼식에는 열일을 제쳐 두고서라도 참석해야지.)

라며 나에게 축하인사말을 건네주었다.

(선장님, 저희 집에도 오셔야 합니다. 엊그제만 같은데 벌써 아들놈이 태어난 지 일년이 되었어요. 조촐하게나마 돌잔치를 마련할까 합니다.)

조타수가 만면에 행복한 웃음을 가득 띠우고 말했다.

(허허, 금번 내 휴가 계획은 모두 포기해야겠구먼. 나도 어머님의 건강이 좋아지셨으니 금번 휴가는 나에게도 여러 가지로 의미가 큽니다. 일년 동안 바다는 우리의 벗이었고 우리의 사랑이었습니다. 산 같은 파도에도 동요하지 않았고 휩쓰는 태풍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뱃사람이었고 바다사나이였습니다. 태평양은 우리의 고향이었습니다. 뱃전에 부딪치는 파도소리는 달콤한 사랑의 세레나데였지요.)

선장은 조용히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말을 끝마쳤다. 모든 선원들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 자료출처 : 해기 2004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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