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박일기(漂迫日記)

등록일20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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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박일기(漂迫日記)

심호섭

 

바다란 무엇인가?

누구도 없이 홀로 서서 외로운 나는 또 무엇인가?

조각들이 허공에 흩어지고 있었다.

몇몇 조각은 바람에 씻기고 있었고

물살은 투명한 옷자락으로 그것들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따금씩 익명의 시간이 조각들을 모아

빈 주머니에 넣고서는

돌아서서 수평선을 노려보고 있었다.

누군가 말했다. 저건 사람이

아니야. 사람 소리가 저럴 수는 없어.

우주의 빅뱅 하는 굉음이지.

그럼. 그렇지. 그렇고 말고.

아아, 저 거리가 어딘가.

 

나는 갑판 위를 걸어갔다. 나는 내 키만큼 어깨를 견주고 있는 평평한 하치카바를 바라보면서 개마고원이라든지 우랄구릉 같은 것을 생각한다. 나는 선실로 가는 층계를 오르며 그곳에서 선수루까지의 거리가 154미터란 사실과 그것을 장악할 수 있는 그의 성대(聲帶)를 경탄한다. 층계를 오르자 그가 서 있다. 나는 그의 찡그린 얼굴을 외면한 채 주방으로 들어선다. 쌀을 퍼낸다. 나는 쌀을 씻으며 나를 이 곳으로 보낸 그들을 기억한다. 그렇게 놀아서야 무슨 수가 생기겠소? 서러운 처가살이에, 더더구나 당뇨병 환자가 아니오? 육상에 있다 해서 더 나아질 건 없잖소.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게 좋겠소. 오래 전 팽개친 바로 그 곳. 물살의 향기와 물새의 울음이 서늘한 뜨락으로 말이오.

소리가 내려서고 있는가? 또, 그는, 소리는 날 찾는가 이렇게 신새벽에? -아닌가?

몸을 일으켜 세우고 어둠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어 본다. 그러자 비로소 소리는 철판을 기어 내려와 창가에 머물고 있다. 아아, 소리. 또는 감미로운 봄비의 눈물. 나는 아직 채 떨쳐내지 못한 잠을 눈꼬리에 단 채 창가로 다가선다. 동그란 창에 희번 어리는 얼굴이 수면을 부빈다. 비가 오는가? 그러나 창 밖에는 재색 벌판의 바다일 뿐 아무 것도 없다.

표박 나흘째. 새벽마다 찾아오는 이 불청객은 무엇일까?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눈을 감는다. 나는 어릴적 오르던 계곡에 흘러가던 실개천을 생각한다. 그 곁에서 청솔에 바람이 스쳤고, 소치는 아이는 버들피리를 불었는데… 탁자 위에 올려진 흰 약봉지는 낯설기만 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무작정 표박이라니. 잘 됐지 뭐. 못 이기는 척 놀아주는 거야. 그게 아닐세 이 사람아. 일따라 사람따라 가는 건데 정리해고라도 벌이겠다고 내밀면 이 마당에 어딜 간단 말야. 제기랄. 무슨 걱정야.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 자, 자, 3부 직장들 이리들 오시오. 초사는 이쪽에 앉게. 아무래도 영업부의 부킹 트러블 같소. 나도 뱃생활은 오래 했지만 이번 일은 처음이오. 언제까질는지는 나도 모르오. 일단 날을 사흘 단위로 자릅시다. 작업 계획도 거기에 맞추고. 기관부는 기관장과 상의해요. 헛헛 이거 참. 밤에는 뭘 하지. 뭘 하긴 뭘 하겠소. 그동안 묻어뒀던 훌라판이나 돌리는 거지. 낚시나 좀 하지 않겠소? 낚시? 낚시라… 거 좋지. 여기 잘 물걸. 잘 무는 정도가 아니랍디다. 던졌다 하면 이따만한 흑돔이 짬없이 올라온대요. 와 보쇼 갑판장. 너무 과장 아니오? 정말이라니깐! 이것 참 안 믿으시네. 오늘밤에 자지 말고 선미루에 나와 보쇼. 술병이나 들고 오면 양껏 올려 드리리다.

반달이 누드로 걸린 저녁 하늘이 내려온다. 나는 주방을 나와 개마고원같은 우랄구릉같은 하치카바를 어깨로 걷으며 걷는다. 저쪽 선현 아래에서 해면은 잔물결 이랑을 만들어 수평선까지 달려간다. 나는 갈매기 울음이 쓸쓸한 선수루에 서서 선뜻선뜻 나타나는 별들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하늘은 가깝고 바다는 가없다. 나는 어둠의 소리없는 소리에 쫓겨 갑판을 달려간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선미루에 오른다. 나는 이미 벌어진 낚시의 향연에 참여한다. 팔뚝만한 돔이 하늘휑가레치며 다퉈 올라온다. 나는 주자의 현란한 칼놀림과 퍼뜩 장만되어 오르는 회육의 빛깔 고움을 바라본다. 조타수인가, 잔을 건네는 그에게 식욕을 맡긴다. 나는 잔을 들이킨다. 초장을 두른 고기 점이 입안에 뿌듯하다. 알콜과 고단백질은 합심하여 내 연약한 식도를 거쳐 장(腸)마다 영양을 공급하고 고단한 신장을 위로할 것이다.

문득, 밤은 어둡고, 밤은 검고, 밤은 맑고, 밤은 외롭고, 밤은 풍요롭고, 밤은 또 사라진다. 야행열차처럼 질러오는 여명을 젖은 몸으로 견딘다. 붉게 물든 사위가 부끄러움을 주체하지 못해 몸을 비틀기 시작한다. 세계는 차츰차츰 저 먼 우주로부터 깊은 소리없는 소리로 내 가슴을 흠뻑 적신다. 익명의 시간에 익명의 내가 이제는 더 이상 고독할 바다란 없다. 나는 어떤 소슬한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나는 철판 위에서 수부 몇 명이 게춤을 내린 채 뿌려대는 오줌살을 바라본다. 그것의 물줄기는 막 쏟아지기 시작하는 햇살에 고기 비늘로 부서진다. 그것은 젖, 젖빛, 무슨 생명의 은총, 또는 근원같은-.

아아, 나는 오줌을 누리라. 새벽 바다에 술과 단백질로 내 연약한 오장을 다스리며 오줌을 누리라. 그래서 그 물줄기는 내 가난한 침실의 창문에서 아침의 밝은 조각들과 함께 알알이 부서져 무지개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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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출처 : 해기 2000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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