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항

등록일20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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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항

 

70일 간의 긴 한 항차를 마무리하고 드디어 모항인 부산항에 정박했다. 피난민이 고향을 그리워하듯, 그저 우리나라에 들어간다는 이유만으로 입항 며칠 전부터 괜스레 가슴이 설렜고, 하루하루를 손가락으로 세며 기다렸다. 막상 모항에서의 하루 남짓 짧은 정박 시간 동안은 다른 항구 정박 때와 같이 루틴한 정박 작업뿐 아니라, 항해 중 필요한 각종 선용품 및 기부속을 보급 받아야 했고, 필요에 따라 육상 지원 수리가 이뤄지는 등 그 어떤 다른 항구에서보다 곱절은 정신없이 피곤한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항에 도착하면 바쁜 시간 중에도 짬짬이 여유를 내어 전화기 너머로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의 목소리를 ‘나름 실컷’ 들을 수 있다는 것, 그 하나로 큰 위안이 되었기에 모항에서의 하루를 그토록 간절히 기대하고 기다릴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유독 이번 부산항 입항을 앞두고 기관실 기기 말썽으로 기관부 전체가 그 어느 때보다 지쳐있었다. 하나가 해결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하나가 툭- 터지고, 그것이 해결될 기미를 보이자 또 다른 하나가 문제를 일으키는 꼴이었다. 줄줄이 사탕처럼 일이 꼬리를 무는 바람에 안 그래도 기름으로 얼룩진 콤콤한 작업복이 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더욱 축축 쳐져 있었다. 잠이 모자라 모두들 토끼눈으로 입항 스탠바이를 서는 가운데, 실기사 한 명 만큼은 웃음기 머금은 행복한 토끼눈 이었다. 오늘 부산에 입항하면 실기사의 부모님과 여동생 그리고 할머니까지 방선오시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넉 달 전 부푼 맘으로 처음 이 선박에 승선하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지금껏 해보지 않았을 낯설고 어려운 일들을 경험하느라 누구보다도 가족 생각이 간절했을 실기사였다. 네 달 여 시간 동안 부모님과 떨어진 것도 처음이라고 했다. 땀으로 얼룩진 얼굴엔 연신 미소가 싱글벙글 이었다.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지난 두 항차 동안 쓰고 달았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얼음처럼 굳은 긴장한 얼굴과 얼룩 하나 없는 빳빳한 작업복 차림으로 처음 기관실에 내려왔던 모습부터 두 항차를 지낸 오늘에 이르기까지 실기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오랜만에 부모님과 가족들을 만나면 눈물이 먼저 나올까, 웃음이 먼저 나올까? 나의 실습시절을 떠올리니 방선 오신 부모님 앞에선 하하하- 씩씩한 모습으로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을 마시라며 웃어놓고는, 부모님을 육지에 두고 출항하는 그 순간부터 한참이나 눈물을 쏟아냈다. 그 모습을 누구에게도 들키기 싫어 기관실 제일 밑으로 내려가 엔진에 연결되어 프로펠러를 돌리는 연결축을 바라보며 엉엉 울었었다. 고막이 찢길 듯 시끄러운 기관실 소음이 그때만큼은 참 고마웠다. 물끄러미 생각에 잠긴 나를 발견하고는 씨익- 웃는 실기사는 여전히 기대에 부푼 얼굴이었다.

곧 엔진이 정지되고 입항이 완료되었다. 여느 때처럼 실기사와 함께 열기에 가득 찬 엔진을 터닝하고 엔진 컨트롤 룸으로 올라왔다. 갱웨이를 비추는 CCTV 모니터 속에 낯선 얼굴의 사내들이 본선으로 줄줄이 올라오고 있었다. 어느덧 모니터 속의 사내들은 우리가 있는 엔진 컨트롤 룸에 들어와 짧은 인사와 함께 저마다의 일을 시작했다. 모두가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기관장님의 허락으로 실기사는 부모님과 가족들을 만나러 데크 사무실로 올라갔다. 솜털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재빨리 엔진 컨트롤 룸을 나서는 실기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괜히 작업복 주머니 속의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바쁜 일들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여유가 생기면, 얼른 그리운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해다오.’

모항에 왔으니 어서 휴대전화로 반가운 목소리와 하하호호 떠들고 싶은데, 현실은 웃음기 전혀 없는 작업대화만이 워키토키를 통해 오고갈 뿐이었다. 시간이 얼마 흘렀는지 엔진 컨트롤 룸에 실기사와 그의 가족들이 인사를 하러왔다. 여전히 행복한 얼굴의 실기사와 그를 닮은 가족들은 어색한 공간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실기사는 기관장님께 차례로 가족들을 소개했고, 기관장님 역시 기관부 식구들을 마치 가족 소개하듯 정겹게 소개했다. 인사를 마치고 기관장님께서는 내게 실기사와 가족들을 모시고 기관실 한 바퀴 구경시켜 드리라고 하셨다. 나는 실기사와 그의 가족들에게 장갑, 귀마개, 그리고 안전모를 나눠드리며 이야기 했다.

“이렇게 큰 선박에 승선해보신 적 있나요?”

가족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부터 저와 구경하실 곳은 이 커다란 선박을 추진하는 기관과 그 기관을 움직이기 위한 여러 기계장치들이 모인 기관실입니다. 실기사가 지난 네 달 동안 주로 실습했던 곳이기도 하고요. 이제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발전기 소음이 굉장히 크기 때문에 제가 나눠드린 귀마개를 꼭 착용하시고요. 곳곳에 위험한 장치들이 많으니 안전모와 장갑을 착용하시고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기관실 문을 열고 천천히 세컨드데크부터 플로우데크까지 조심조심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엔진 컨트롤 룸으로 돌아왔다. 엔진 컨트롤 룸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실기사의 어머니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를 연신 옷깃으로 훔쳐대며 조심스레 입을 여셨다.

“여기 기관실에 오기 전에 선장님을 따라 선교라는 곳을 먼저 보고 왔어요. 그래서 저는 우리 아들이 배를 타면 그곳에서 일을 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고 온 기관실 여기서 우리 아들이 주로 일을 한다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나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실기사의 어머니는 주먹 쥔 손으로 입을 막으며 눈을 질끈 감으셨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실기사도 함께 흐느끼기 시작했다. 몇 달 만에 상봉한 아들이, 그것도 스무 살 남짓의 이제 막 출가시킨 귀한 아들이 얼룩진 작업복 차림으로 덥고 시끄러운 기관실 안에서 일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셨던 모양이었다. 못할 말을 해버린 냥 나는 민망해져 입을 모으고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다, 이 기관실에서 오랜 세월 일해오신 기관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나와 달리 기관장님께서는 여유 있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내 어머니도 지금까지 제 걱정을 하십니다. 자식 생각하는 어머님들 마음이 다 똑같은가봅니다. 그래도 너무 염려 마세요. 기관실이라는 곳이 위험한 요소들이 많은 작업공간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안전에 신경 써서 일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똘똘한 아드님이 열심히 일을 배우고 있어서 훌륭한 기관사가 될 것 같습니다. 실습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칭찬 많이 해주세요. 허허허”

촉촉한 봄비가 마른 대지를 적시듯, 훈훈한 기관장님의 목소리가 모두의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모항에서 항해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채우고 출항하듯, 우리를 걱정하는 모든 어머니의 마음이 우리의 삶을 더욱 여물게 하는 것 같다고.

 

□ 황선영, 해운계 교육기관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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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해양과 문학> 23호 독자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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