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인상

등록일2020-07-10

조회수93

 

첫인상

 

10년 전 봄을 앞둔 겨울의 끝에서, 매서운 바닷바람이 불고 있지만 눈부시게 따사로운 볕을 받으며 처음으로 부둣길을 걸었다. 설렘과 두려움이 한 짐, 앞으로의 선박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로 가득 찬 커다란 캐리어가 또 한 짐. 가슴이며, 어깨며, 무거운 짐들을 가득 안고 벅찬 걸음으로 배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내 옆엔 같은 마음으로 서 있는 내 친구!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자 오늘부터 실습항해사가 될 나의 동기가 함께 있었다.

걸음을 멈춘 우리는 말없이 우리 앞에 놓여있는 차갑고 커다란 금속의 끝에서 끝을 살피느라 본의 아니게 국민체조 4번째 동작, 목운동을 연신 해댔다. 그래도 나름 2년간의 대학 생활동안 이론으로 선박에 대해 배웠고, 1학년 겨울방학에는 학교 실습선에서 열흘간의 선박생활을 경험했던 터라 선박 자체가 낯설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놓여있는 이 거대한 물체는 내가 보았던 선박 중에 가장 큰 선박이었으리라. 선박의 길이, 높이는 말할 것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당장 이 선박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걸어 올라가야 할 갱웨이(gangway)의 끝이 아득하게 보였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은색 갱웨이 발판에 첫 발을 디뎠다.

철겅철겅-

발을 내딛을 때마다 묵직한 진동과 소리가 나의 심박수를 찬찬히 높이는 것 같았다. 핸드레일을 잡은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성큼성큼 한 계단씩 조심히 올라갔다. 그렇게 눈앞에 다음 밟을 계단만 쳐다보며, 축축해진 손으로 차가운 핸드레일을 잡고 또 한 걸음. 두 걸음. 시선을 돌려 밑을 보니 이미 꽤나 높은 곳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제야 막 갱웨이의 반 조금 넘는 곳을 지난 듯했다.

‘이렇게나 높다니..’

그동안 이 선박에 실습생으로 뽑히기 위해 애쓴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앞으로 한참을 못 볼 가족들과 지인들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자꾸만 내 코끝을 스치는지 괜히 코가 시려졌다.

드디어 갱웨이의 마지막 발판에 발을 디뎠다. 그곳에서 처음 마주친 사람은 갑판수 A였다. 피곤한 안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반가운 듯 미소를 머금은 상냥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그는 신분 확인 및 간단한 검문검색을 한 뒤 실습생인 우리를 데크 사무실로 안내해주었다. 실내로 들어오자마자 바깥의 매서운 겨울바람이 차단되고, 따뜻한 공기가 제일 먼저 나를 반겨주었다. 데크 사무실엔 당직 중인 3등 항해사와 1등 항해사가 있었다.

낯선 장소, 낯선 공기, 낯선 사람들과 마주친 그저 낯설기만 한 이 순간의 적막을 깨고, 나는 그동안 수도 없이 마음속으로 연습했던 대로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오늘부터 이 배에 승선해 실기사로 일할 000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조용한 공기 속 예상치 못한 큰 진동에 놀란 듯 두 항해사들은 멈칫하며 나를 바라보고는 곧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는 간단히 자신들을 소개하고 곧바로 ‘선상숙지지침’ 안내서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선장님께서는 좀 전에 잠시 방으로 올라가셨다며 일단 내 방으로 나를 인도해주셨다. 가져온 작업복을 갈아입고 기관실에 내려가 먼저 기관부 식구들에게 인사하고 나중에 선장님이 데크 사무실에 내려오시면 그 때 다시 부르겠다고 하셨다.

내방이라고 안내해준 곳은 SPARE ROOM으로 2개의 2층 침대와 나란히 줄서 있는 4개의 옷장으로 보아 4인용 방이라는 것을 금세 눈치 챌 수 있었다. 방 구경도 잠시, 괜스레 마음이 급해져 회사에서부터 들고 온 깨끗한 작업복부터 갈아입었다. 짐들은 대충 한 구석에 몰아넣고, 딱딱한 작업화 속에 발을 구겨 넣은 뒤 끈을 세게 동여맸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잘 하자. 기관실에 내려가면 데크 사무실에서처럼 씩씩하게 인사하자.’

두근대는 마음을 부여잡고 엔진 컨트롤 룸 앞에 다다랐다.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자, 공간을 가득 메운 기름 냄새와 콤콤한 땀 냄새가 내 코를 자극했다. 그리고 누가 누군지 모를 여러 사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바닥 한 켠에 앉아 구슬같이 반짝이는 땀을 닦아내며 연신 물을 들이키는 파란 작업복의 사내들. PC화면에 빨려 들어갈 듯 몰두하고 있는 깨끗한 작업복 차림새의 사내. 두툼한 점퍼를 입고 커다란 박스 안의 물건을 확인하는 사내.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이 공간에 어색한 모습으로 쭈뼛거리는 내게 누구하나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나는 누구에게 다가가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 머리속이 복잡해졌다.

멍하게 여기저기 시선을 멈추지 못하던 내게 거뭇한 작업복을 입은 젊은 사내가 다가왔다. 어깨의 견장으로 미뤄보아 본선의 3등 기관사인 듯 싶었다.

“새로 온 실기사?”

“네. 반갑습..”

내 대답이 끝나기가 무색하게 3등 기관사의 어깨 위에 묵직하게 달려있던 시커먼 워키토키에서 시끄러운 기계음이 지껄였다. 기관실로부터 온 무전임에 틀림없지만, 기계음 사이에 뭐라뭐라 들려오는 사람의 목소리는 잘 파악되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 물어보는 말미만 겨우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 나와 달리 내 앞의 3등기관사는 그 소음 같은 물음을 완벽히 인지했는지, 황급히 엔진 컨트롤 룸 중앙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는 엔진 콘솔의 CRT 너머 어떤 숫자를 확인한 듯 훑더니, 재빨리 워키토키로 대답을 했다. 그렇게 몇 번의 무전이 더 오고 갔다.

나를 제외한 이 공간의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너무나 바쁜 모습들이었다. 감히 그들 곁에 다가가 내가 누구이고,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건네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러던 와중에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준 3등 기관사와의 짧은 대화도 잠시 뿐이었다.

배를 타기 전 실습을 이미 경험한 선배들로부터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조언을 참 많이 들어왔다. 특히 기관부에서는 씩씩하고 밝은 첫인상을 좋아한다고 했다. 우렁찬 목소리가 장점인 내게 그다지 어려운 미션은 아닐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풍경에 겁을 먹고, 주눅 든 모습으로 기관부 식구들에게 첫 인사를 건넸던 기억이 지금도 아련하다.

 

□ 황선영, 해운계 교육기관 재직

________________________

자료 출처 : <해양과 문학> 22호

g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