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황천항해

등록일20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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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황천항해

 

모름지기 배를 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북태평양 겨울 기상의 위용에 대해 익히 들었으리라. 이제 막 선박이란 곳에 첫발을 내디딘 실습기관사는 생각지도 않은 북태평양의 사나운 환영인사에 잔뜩 겁을 먹었다. 열심히 항진하던 선박이 저녁부터 조금씩 좌현으로 우현으로 시소를 타 듯 노닐더니, 그 경사가 더욱 기울기 시작한다. 내 몸도 중심을 잃고 무언가 붙잡고 있지 않으면 넘어질 것만 같다. 급기야 책상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연필과 볼펜들이 사정없이 구르기를 반복한다. 벽 옷걸이에 얌전히 걸려있던 작업복도 진자 운동을 시작한다. 분명 숨이 없는 물건들인데 방안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생명을 얻은 듯 움직이기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어 그 코에 숨을 불어 넣으실 때도 정지해 있던 모형이 이처럼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겠지?

그것도 모자라 화물창 덮개 위로 쌓여있던 컨테이너들이 배의 움직임에 발 맞춰 저들끼리 부딪치다 끼-익 끼-익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처음 들어보는 낯선 음률이 꽤나 오싹하다. 오, 그렇구나. 나만큼이나 너희들도 이 상황이 두렵구나. 엔진소리도 평소보다 더 요란스럽게 느껴진다. 뭔가에 쫓겨 달음박질하며 숨을 헐떡거리는 아이의 숨소리 같다. 아, 말로만 듣던 황천 항해다. 그날이 실습기관사로 승선한지 겨우 3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 당시 실습기관사인 내게 주어진 방은 ‘D갑판’ 좌현 가장 끝 쪽에 위치한 4인용 ‘예비선실’이었다. 혼자 지내기엔 과분하게도 침대와 옷장이 무려 4개씩 있었다. 방문을 열면 텅 빈 이층 침대 2개가 나란히 줄지어 놓여 있고, 침대 맞은 편에는 4개의 옷장이 장승처럼 침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옷장 옆으로는 공부를 할 수 있는 1인용 책상과 의자, 그 옆으로 소파가 배치되어 있었다.

 자정 무렵 바다의 얼굴은 더욱 험상궂어졌고, 아직은 낯선 이 공간의 심란한 환경을 잊고자 침대에 누워 억지로 잠을 청했다. 불을 끄고 눈을 감는 순간 쾅-, 쾅-, 시끄러운 소리가 너무도 가까이에서 들려온다. 벌떡 일어나 비틀거리며 황급히 불을 켠다. 놀란 마음을 진정하며 주변을 살피니 멀쩡히 있던 옷장 문들이 시소놀이에 동참하여 쾅, 쾅, 소리를 내며 열리고 닫히길 반복하는 것이다. 컨테이너끼리 부딪치는 소리, 요란한 엔진소리도 모자라 옷장 문소리까지, 듣기에 아름답지 못한 이 불편한 합주곡을 참지 못하고 서랍 속 테이프를 찾아 옷장 문이 열리지 않도록 꼼꼼히 발라두었다.

 처음 이 방과 마주했을 때 몇 가지 낯선 것들이 눈에 띄었다. 첫째는 육지에서는 볼 수 없던 끈의 존재이다. 책상 밑에도, 소파 밑에도, 심지어 쓰레기통 둘레에도 고정할 수 있는 끈이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 끈으로 무언가를 꽁꽁 묶어둬야 할 만큼 배가 심하게 움직일까? 이와 같은 궁금증은 승선 3일째 곧바로 풀리게 되었다. 둘째는 책상 서랍과 옷장 문 안쪽에 육상의 것보다 훨씬 세게 문을 꽉 잡아주는 장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게 문이 닫히게 만들어 놓을 만큼 배가 많이 움직일까, 라는 궁금증도 역시 같은 날 곧바로 풀리게 되었다. 당시 실습 선박의 나이가 20 살쯤 되어 문을 잡아주는 장치가 좀 헐거워졌을 것이며, 북태평양의 사나운 날씨가 합심하여 옷장 문을 춤추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 이 어둠이 지나 어서 태양이 밝아오길, 바다의 노도 이제 조금 그치길 기도하며 다시 눈을 감는다. 흔들리는 이 침대는 어린 아이를 잠 재우는 요람이라 마음을 고쳐먹고 잠을 청한다. 밖에서 들려오는 심란한 합주곡을 자장가 삼아 얕은 수면에 든다.

다음날 아침 여전히 황천항해가 지속되는 가운데 아침을 먹으러 ‘사관식당’으로 내려갔다. 밥과 국을 떠 식탁 위에 올려놓는 순간, 배와 식탁과 국그릇은 한 몸인데 그 안의 국물이 바깥 바닷물처럼 울렁이다 내 몸 쪽으로 쏟아질 것만 같다. 아슬아슬하게 출렁인다. 혹 국물이 쏟아질까 노심초사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겨우 아침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마주친 언제나 사람 좋아 보이기만 한 갑판장이 내게 물었다.

“실기사요, 날씨 안 좋은데 괜찮은교? 멀미한다꼬 식사나 제대로 하고 있는교?”

생각해보니 요동치는 배 안에서다행히도 나는 머리가 어지럽지도, 속이 미식거리지도, 밥맛을 잃지도 않았다. 아, 이 불편한 신고식, 나름 합격인가?​

 

□ 황선영. 해운계 교육기관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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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해양과 문학> 21호 독자투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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