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박지에서 있었던 일

등록일20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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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박지에서 있었던 일

 

미국 서부 시애틀 항에서 곡물 5만 톤을 적재한 우리 배는 약 20여 일만에 드디어 이집트의 포트사이드 항에 도착했다. 묘박지에 닻을 놓고 나서 허리를 쭉 펴니 무엇인가 텁텁하고도 알싸한 내음이 코를 자극한다. 흙내음이다. 바람에 실려오는 뭍의 반가운 전령에 설레는 가슴, 팔짱을 끼고 다독거려 보지만 두근거림은 어쩔 수 없다. 그렇다. 우리는 선원이다. 선원이 뭍을 그리워하고 흙내음에 가슴 설레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선수루 갑판에 서서 우리는 맞은편에 아스라이 펼쳐져 있는 항구와 도시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고대 문명이 찬란하게 꽃피워졌던, 한 때는 세계 최강국이었던 이집트에 우리는 와 있다. 피라미드, 파라오 람세스, 클레오파트라, 신밧드의 여행, 날으는 양탄자, 알라딘 램프, 이런 이야기와 함께 배꼽춤을 추는 여인의 밸리댄스가 있는 밤의 주점에서의 한 잔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화제는 동화와 역사와 지리를 넘어서서 세간의 여흥으로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그러자 승선생활을 오래 한 갑판장이 충고한다. 입항하여 외출하면 가장 먼저 피라미드를 구경하라고. 그것만 해도 큰 값어치가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갑판장은 시내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말을 거는 현지인에 대해서 그 숨 쉬는 소리 말고는 모두 거짓말이니 조심하라는 말도 덧붙여주었다.

묘박지에 정박한 지 1주일째. 배는 양하작업을 할 선석을 기다리고 있다. 그 동안 우리 항해사들은 육안(肉眼)과 레이다를 켜서 항만의 부두와 주변 해역의 항로와 선박들의 묘박 상황을 탐색해 왔는데, 우리가 접안할 부두는 여전히 하역 중인 선박들로 가득 차 빈 자리가 없고, 입출항 항로에는 닻을 놓은 채 부두로의 이동을 기다리는 선박들이 마치 여름날 풀밭에 앉아 있는 소떼처럼 여기저기 웅크린 채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묘박지와 하역부두 사이의 항로에 묘박 중인 배들은 한 마디로 말하여 질서를 상실한 것 같다. 망원경으로 아무리 살펴보아도 배들은 아무렇게나 뒤섞여 있음이 분명하다. 부두로 접안해야 하는 어떤 배라도 과연 저처럼 좁은 배 사이를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인지 심히 걱정되는 상황이다. 항만통제가 되지 않고 있는지, 아니면 항만통제를 할 수 없을 만큼 항만체선이 심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 다시 망원경으로 항만시설을 살펴보니 곡물 부두에는 2척의 선박이 양하작업 중이다. 곡물 전용 ‘사일로’로 작업을 하지 않고 크레인을 사용하여 퍼 내고 있는데 한 척에 두 대씩 모두 4대, 페인트가 벗겨져 붉은 속살이 드러나 있다. 저 편으로 부두의 끝에 4대가 더 배치되어 있지만 마찬가지로 페인트가 벗겨져 방치되다시피 서 있다. 고개를 들어 망원경으로 다른 부두를 살펴보니 야드에는 콘테이너가 2, 3단으로 쌓여 있고, 하역 중인 크레인은 컨테이너 전용이 아니라 다목적 육상 크레인이다. 부두 전체가 항만 생산성이 낮을 수밖에 없는 여건임을 알 수가 있다. 점심 식사 후, 선장 집무실에서 적하계획도를 펼쳐놓고 양하작업에 대해 검토하고 있는데 통신사가 종이 한 장을 들고 들어섰다. 

​ “전문 내용이 뭔가요?”

“내일 아침 8시에 도선사가 승선한답니다.”

​ 그는 전문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발신자를 보니 현지 대리점이다. 간략하게 내일 아침에 도선사가 승선한다는 한 줄의 내용뿐이다. 몸을 일으켜세운 선장은 어두운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말을 않아도 그는 저 항로 상에 닻을 놓고 대기 중인 꼼짝 않고 있는 많은 선박들을 어찌 할 것인지 걱정이 되는 것이다.

​ 저녁식사 후에 전 항해사와 기관사, 그리고 보통선원 중에는 갑판장이 소집되어 내일 있을 접안에 대하여 논의했다. 우리는 항로에 질서없이 들어서 있는 선박들과 오랫동안 방치된 듯한 이곳 항만 시설을 걱정했다. 선장은 선수 선미의 계선설비에 대한 사전 확인과 접안 시 이상이 없도록 철저한 점검을 지시했다. 그리고 기관장은 기관을 사용하여 전진 후진 상태를 점검한 후 이상유무를 보고하고, 2등항해사와 3등항해사는 선교, 선수, 선미를 연결하는 마이크 송수신 상태 및 워키토키 충전상태와 레이다의 성능에 대해 점검하여 그 결과를 보고하게 했으며, 마지막으로 갑판장은 만약에 있을 충돌에 대비하여 갑판창고에 보관 중인 4개의 펜더 모두를 선수와 갑판 중간에 각 2개씩 배치할 것을 지시했다. 미팅은 내일 있을 접안작업을 위하여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어 충분한 휴식을 취하자는 말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 드디어 이튿날 아침. 날씨는 여전히 후텁지근하지만 하늘은 맑다,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각자 맡은 일을 점검했다. 항해사들은 선교에 모여 레이더 화면을 보면서 항로 상에 닻을 놓은 선박들이 이동했는지 살펴보았는데 여전히 그대로이다. 도선사는 예정된 시간보다 30분 전에 승선했는데 그가 선교에 올라오자마자 선장은 그와 함께 레이더 화면 앞에 섰다.

​ 선장의 손가락은 레이더 화면의 어떤 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은 두 선박이 한 형상으로 나타나는 변침점 부근이었다. 그 부근에는 선박들이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이렇게 투묘 중인 선박 사이를 어떻게 충돌 없이 지나갈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선장의 주장이었다. 선장은 항만통제실에 연락하여 항로를 가로막고 있는 저 장애물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고 나서 접안시키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도선사의 대답이 영 의외이다.

​ “Don’t worry.”

​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도선사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고, 그저 창밖으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초조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저 창 밖의 항로의 무질서함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는데 그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 “저기 배들 이동시키지 않고 할 수 있어요. 우리 집안은 대대로 도선사 집안이지요.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이집트 최고의 도선사였고, 나 또한 그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도선사입니다. 염려 놓으세요, 선장님.”

​ 그가 말을 마치자 내가 이어 받았다.

​ “선장님, 이 친구를 믿어보지요. 이집트 항만사정 상 언제 접안할지 알 수 없으니 도선사에게 도선을 맡기고, 대신 우리는 충돌에 대비해서 경계를 철저히 하겠습니다.”

​ ​선장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참 후에 그는 명령을 내렸다. 선내에 일반경보음이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 ​“모든 부서, 스탠 바이!”

​ 나는 복도에 울려퍼지는 소리를 뒤로 하며 선수로 나섰다. 선수루갑판에서, 잠시 후 선장의 명령을 전달하는 3등항해사의 음성이 마이크로 크게 울렸다.

​ “양묘!”

​ 갑판장이 양묘기를 잡았다. 닻줄이 감기느라 금속이 금속에 스치는 파찰음이 울려나고 있다. 닻줄은 그 동안 박고 있던 해저의 뻘과 함께 처르렁, 처르렁, 소리를 내며 올라오고 있다. 천천히 닻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잠시 후 선체가 약간 흔들리면서 서서히 배가 움직이면서 항로로 향하고 있었다.

​ 항로에는 배들이 묘박을 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육상의 좁은 일방통행로 길을 천천히 돌 때 길가에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가로등처럼 가깝게 서 있다. 우리는 묘박 중인 배 옆을 조심스럽게, 또 기분 좋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저 앞의 변침점 근방의 배들이 문제다. 저건 어떡할 것인가? 난감하다. 아무리 보아도 그렇다. 순간, 도선사 옆에 서 있을 선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선장은 아마도 속이 탈 것이다. 특히나 책임감이 강한 분인지라 더욱 그러할 것이다. 나는 대수속력을 감지하기 위해 핸드레일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귓가를 스쳐가는 바람의 감촉으로 보아 속도가 아까보다는 조금 더 빨라졌다. ‘극미속전진’에서 ‘미속전진’으로 바뀐 것 같다.

​ 다시 잠시 후, 고개를 숙여 아래로 구상선수를 내려다보니 물살이 세게 선수에 부딪히며 분수 모양으로 두 갈레 세 갈레로 흩어진다. 불안하다. 속도가 더 빨라졌음이 분명하다. 고개를 들었다. 선수 전방으로 묘박해 있는 배가 한 척 있는데 러시아 국적이고 크기는 3만 톤쯤은 되어 보이며 우리처럼 화물을 가득 싣고 접안 순서를 받기 위하여 대기 중인 것 같고, 그 뒤로 10시 방향으로 배는 선명을 자세히 보니 ‘M/V Fortune', 포튠 호이다. Fortune, 행운. 그 배가 곧 행운이란 말인지 아니면 그 배를 만나는 배들은 다 행운을 갖게 된다는 건지 알 수는 없다. 차츰 차츰 선수의 우리들은 긴장감이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 “선교, 여기는 선수. 감도 있습니까? 지금 현재 선수 거리 약 600미터. 지금 속도가 너무 빠른 것 같습니다.”

​ 그러나 선교는 대답이 없다.

​ “선교, 여기는 선수. 지금 속도가 매우 빠릅니다!”

​ 그 때였다. 마이크 수신기에서 삐, 하는 소리와 함께 외마디에 가까운 3등항해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전속전진, 그것은 분명히 전속전진이었다!

​ 아니......?

​ 지금 전속력으로 전진한다는 말인가?

​ 마이크를 치우고 워키토키로 선교를 다시 호출하지만 응답이 없다. 캄캄한 눈앞에는 왼손으로는 마이크의 발신 버튼을 누르고 오른손에는 텔레그라프를 쥔 잔뜩 긴장한 3등항해사의 긴장한 모습이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선교는 무응답이고, 배는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 이대로 가면 영락없이 충돌이다. 잠시 후, 배는 경주마처럼 최고 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연방 뱃고동 소리가 울리고 있다. 전방의 러시아 배이다. 우리는 긴박하게 울리고 있는 기적 소리를 들으며 그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러시아 배의 선수 우현에서는 선원들이 급하게 달려나와 펜더를 설치하고 있다. 그들은 펜더를 내리면서도 연방 전방의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충돌에 대한 불안감이 역력해 보였다. 펜더 설치를 마친 그들은 현측의 레일에 손을 얹고 우리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고, 우리 또한 그저 선수 전방만 쳐다볼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우리 배의 선수에 설치되어 있는 펜더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배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배가 왼편으로 기울어져서, 약 10도 정도 기울어졌을 즘 마이크에서 다급하게 소리가 울려나오고 있었다.

​ “기관정지. 키를 배 중심으로 두고 바로 우현전타!”

동시에 선수를 지켜보고 있던 갑판원들이 소리를 질렀다.

​ “충돌합니다!”

​ 참으로 짧고, 그리고 긴 시간이 흘러갔다. 여전히 빠른 속력을 유지하던 우리 배는 러시아 배의 선수를 가까스로 비켜 지나, 다시 오른쪽으로 10도 정도 기울어지면서 잠시 후에는 러시아 배의 선교를 지나칠 것이었다. 어느새 러시아 배의 주갑판에는 선원들이 모두 나와서 걱정스런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홍일점으로 나이는 좀 들어 보이지만 미모인 여자도 한 사람 눈에 띄었다. 여자예요. 여자도 있네요? 우리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아직 미혼인 실습생 최군이 그런 말을 했다. 러시아 배에는 여자 선원도 있지. 요리사일 게야. 아마도 갑판장이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나는, 아니 선수의 우리 모두는 좁은 간격의 두 선박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하는 이집트 도선사의 경이로운 도선에 대해서 불안감과 동시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건너편 러시아 선원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자 그들 또한 어두운 얼굴을 환하게 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모두 마치 서로 잘 아는 지인처럼, 아니 사랑하는 가까운 혈육처럼 뜨겁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멀어져 가는 그 배의 선미를 바라보았다. 마이크에서 작게 3등항해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극미속전진...... 그리고 선교의 3등항해사의 복창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1989년 가을, 이집트 포트사이드 항에서.

  

<후기>

그 후, 우리는 부두 선석에 무사히 도착하여 계선줄을 잡아 접안했다. 생각하면 그 날 이집트인 도선사의 도선은 최고의 도선기술이었다. 그는 기관과 타의 기계적 특성을 최대한 살려 최대속력을 이용한 원심력과 좌현전타, 우현전타를 적절히 이용하는 운항기술로 선박간의 거리를 최대한 확보해서 좁은 두 선박 사이를 통과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안전을 최우선으로 강조하는 지금의 도선 시스템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법이겠지만 당시 낙후한 이집트의 항만 사정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필요불가결한 최고의 도선 기술임을 부인할 수 없다.

 

 

<주>

1)묘박지 : 항구에서 닻을 놓고 정박을 하는 수역

2) 접안 : 선박을 부두의 선석에 갖다 대는 일

3) 사일로 : 곡식을 저장해두는 원통형 독립 창고. 항만 하역작업에서 ‘사일로로 하역작업을 한다’ 함은 부두에 인접한 대형 곡물(또는 광석, 석탄가루) 저장고에서 매우 굵고 긴 파이프에 의해 하역이 진행되는 것을 말한다.

4) 펜더(fender) : 선박의 측면에 갖다 대면 부두나 다른 선박과의 충돌 시 그 충격을 완화한다.

5) 항만통제실 : 항구를 출입항하는 선박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선박과 인명의 안전을 위하여 출입항선들에 항해정보를 제공함.

6) 대수속력 : 물-여기서는 바다-에 대한 상대속력. 육지에 대한 상대속력을 대지속력이라 한다.

7) 구상선수 : 선박에서 수면 아래에 있는 선수의 하단부가 둥근 공처럼 부풀어 오른 형태로서, 현재 대부분의 선박에서 채용하고 있다.

8) 텔레그라프 : 선교와 기관실을 잇는 기관 작동 전신장치

 

□ 김규훈, 해양사회인문지 ‘웹진 바다에서’ 필진 및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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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해양과 문학> 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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