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린보이의 꿈

등록일20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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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보이의 꿈

               -젊은 날의 항해일지

 

아들에게.

 

-네가 태어나기도 전 까마득한 시절, 바다에서 보낸 아비의 청춘을 이야기하려한다. 걸음마를 떼고 장난감들을 앞에 했을 때, 성큼 배를 골라 나를 미소 짓게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언젠가는 너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그 시절을 말하려니 가슴이 뛴다. 나도 모르게 흥에 겨워 들뜨는 것을 경계해야겠기에 짧은 재주나마 글로 남겨 본 것이다. 원래 모든 글이란 연애편지 같아서 가슴을 쥐어 짜 쓴 것도 다음날 술 깨고 읽으면 가소롭기 짝이 없는 법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행여 힘든 시절을 보냈다는 어설픈 자기연민이나, 지금의 세상과 달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보이더라도 괘념치 마라. 고된 시간들이었으므로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아프다는 신파도 없고, 장중한 교훈이나 삶의 비결 같은 것은 더더욱 없다.

나는 너를 이 세상에 있게 했으나 네가 마주칠 세상을 헤쳐 나가는 것은 온전히 너의 몫이다. 무릇 세상은 걸인과 성자가, 진실과 모순이 함께 섞여 사는 곳이고, 각자가 다른 경계와 주어진 숙명을 살면서 획득한 소박하고 작은 역사가 있을진대, 너는 단지 뱃놈이라는 운명에 순응했던 아비의 젊은 날과 내 인생을 관통하는 단어, 그 ‘바다’를 이해하려는 마음만 가지면 된다.

시작한다. 한 번 읽어 봐 주겠니. -

 

시작하는 글.

 

빛바랜 가슴 속 앨범에서 푸릇한 스무 살 시절의 나를 불러내 본다.

젊음 하나만으로 마주쳤던 바다는 세상에 무엇으로 빚어지며 어떻게 남겨질 것인지 가슴 앓았던 그 시절 내 존재의 유일한 증명이다.

끝없는 항해와 전쟁과 다름없던 원양어선의 고기잡이는 낯설고 새로운 세상이었다. 바다에서 보낸 젊음은 새로운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었고, 날개 죽지가 녹아내리면서도 멈추지 않은 태양을 향한 ‘이카로스’의 도전처럼 온 몸으로 부딪혀낸 혹독한 체험이자 현실이었다.

지금도 눈감으면 들을 수 있다. 정복자들의 진군나팔 같이 휘몰아치던 파도소리, 바람소리. 강력한 허리케인 속에서 낙엽처럼 뒹굴던 배에서의 전율 같았던 카타르시스.

황천 파도 아래 곤두박였다가 솟구치던 젊은 날과 뱃전을 난타하며 줄기차게 불어오던 바람. 바닷새들이 먼 곳을 날아와 제 무게를 버리고 배에 걸터앉아 허공을 노려보던 그 아득한 수평의 세계.

나는 내가 바다가 될 수 없음에 기꺼이 좌절했다. 수도 없이 바다에 말을 걸었고 귀 기울여 보았지만 이제 지천명의 나이를 훌쩍 지났어도 바다의 의미를 나는 아직도 모른다.

시간이나 세월은 흐르는 게 아니라 쌓이는 것이었다. 오늘 펼쳐진 바다는 더 이상 어제의 바다가 아니었으며 떠다니던 곳, 마주치는 곳마다 따로 존재하던 세상과 시간의 나이테가 켜켜이 쌓여 세월이 되었다.

누구나 저마다의 청춘을 향유하고 떠나보낸다. 세월은 기어코 떠나가기 마련이겠지만 열정을 가지고 마주쳤거나 무엇인가를 사랑했던 그 ‘시절’들은 의미를 가진다. 인생의 해답은 바다를 포함한 모든 사회의 어떤 영역에서가 아니라 치열하게 보냈던 ‘시절’에 있다는 생각을 한다.

배라는 거대한 자산이 온전히 내 판단과 몸에 맡겨지고, 선원들의 생계를 책임져야할 무거운 중압감을 느꼈던 선장 시절과는 달리, 내 뱃놈으로서의 이력에 첫 번째로 기록되는, 무작정 바다를 향한 열정에 몸을 맡겼던 젊은 항해사의 그 ‘시절’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조지 오웰이 현대사회의 뒤틀린 모습을 그린 소설 ‘1984’와 일치되는 그 해 시작된, 꼬박 30개월 걸렸던 첫 어기와 신출내기 항해사의 고삐 풀린 기억들 말이다.

그리고 출가의 길처럼 아득했던 뱃길에서 내 길동무들이었으며 영원한 이방인의 꼬리표를 지녔던 동행들.

가족들을 굶기지 않아야하는 절체절명의 명제에 갇혀 누가 더 가난에 익숙하며 힘든 세상을 살아왔고 누가 더 남자다운 호기를 가졌는지 우겨대던,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운명을 가졌던 뱃사람들과 함께했던 기억들이며,

우리가 자주 입에 올렸던 ‘세상 남자는 두 부류다. 원양어선을 타 본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라는 농담에 따르는 ‘그들만의 리그’에 대한 회상이다.

바다 그 고행의 장소에서 끄집어낸 기억들은 갓 깨어난 꿈처럼 언제나 새롭다. 아등바등 꾸려가는 삶에서 진실된 나와 대화하고 싶을 때 마음속의 뱃길을 불러내 나를 내려놓고 옥죄며 다시 정신을 추슬러본다.

내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비가 어떤 청춘을 보냈으며 어떻게 세상을 걸어왔는지, 그리고 지난한 과정보다 탁월한 결과만을 칭송하는 시대에 승자도 패자도 없었던 바다에서의 도전과 응전을 보여주고, 젊은 날 몸으로 부딪혀낸 아비와 함께했던 바다를, 그 설레던 뱃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라스팔마스. 1984년 3월

 

수직강하 하듯 툭하고 떨어지며 고도를 낮추는 비행기 창밖으로 일그러진 낮달이 어슴푸레 하늘에 걸려있었다. 마드리드에서 네 시간 걸리는 마지막 비행, 네 번을 환승하며 2박3일이 걸린 긴 여정이다.

라스팔마스(Las palmas). 1492년 콜럼부스가 신천지 아메리카로의 항해를 위해 베이스캠프를 차렸으며, 훗날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가 처음으로 반혁명의 기치를 올렸던 역사를 가진 항구다. 세계의 뱃놈들이 다 모여 북적대는 한국원양어업의 전진기지. 아프리카 북단 카나리아군도의 한 섬, 영원히 잠들지 않는

천사와 악마의 항구.

원양트롤어선 D호의 이등항해사. 나는 스물 셋이었고 젊은 뱃놈이 되어 그곳으로 날아가야 했다. 아프리카 어장을 버리고 새로운 어장 뉴질랜드로 배를 회항시켜야할 임무를 안고.

피 끓는 혈기를 주체할 수 없는 젊음이었고, 눈으로 보이지 않으며 손으로 잡히지 않는 그 무엇들을 동경했지만, 그것들은 아수라 같은 세상을 버리고 가없이 넓고 검푸른 바다에서만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3 시절, 가난에 발목을 잡혀 대학을 가네 마네 세상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나갈 때, 담임 선생님은 나를 교무실로 불러 천천히 말씀하셨다.

사관학교를 제외하면 수산대학이 등록금이 제일 싸네. 거기 나온 뱃놈친구가 하나 있는데, 원양어선 선장 한 어기 하니 집 몇 채 값을 벌더라. 진짜야. 그리고 선박특례보충역으로 오년 배타면 군대도 면제야. 어때? 돈도 벌고 군대도 안가고, 내가 너라면 말이야. 바다에서…….

젊고 화끈했던 분으로 기억한다. 갑자기 틀에 갇힌 자신의 처지가 그 친구와 비교되어 울컥하는지 손마디를 꺾어 우두둑 소리를 내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귀가 번쩍 뜨였다. 뜬금없이 산동네 입구 부잣집 갈래머리 여학생이 두드리던 피아노 연습곡 ‘엘리제를 위하여’ 멜로디에 파도소리가 환청같이 겹쳐 흘렀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 허드렛일로 하루 벌어 그날의 초라한 밥상을 차려내던 어머니, 헤진 옷을 줄여 입혔던 어린 동생의 모습이 그 짧은 면담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략)…………………

 

□ 하동현, 2016년 부산일보 해양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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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수록 지면 : <해양과 문학> 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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