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직 26시

등록일20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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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직 26시

 

 

1960년대는 지금과는 달리 항구에 입항한 선박에서 승․하선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선박이 모항인 한국 항구에 입항하여야만 승무원 교대가 가능한 형편이었고, 가끔가다 선박의 귀항일자가 지연되면 외국항에 입항한 다른 한국 선박에 옮겨 타기도 했다. 승선 실습기간은 1년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선박의 일정에 따라 어떤 학생은 6개월도 채 못 되어 내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고, 20개월을 넘겨서야 겨우 하선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운이 매우 좋은 편에 속해 선박보유척수가 가장 많은 대한해운공사에 배정되었다. 3월경에 동남아 정기선인 ‘장항호’에서 4개월 동안의 실습을 하고, 이어 영구대기 정박선에 가까웠던 볼틱(Baltic)형 선박인 ‘서어펜스호’에서 2개월여를 보낸 후, 다시 동남아 정기선인 ‘제주호’로 전선되어 두 번째 항차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 당시의 국적선 선대는 그 때만해도 소위 초대형선에 속하는 선박이 극동해운 소속 7000톤급 ‘고려호’ ―2차대전 중 침몰한 선박을 인양 수리하여 최초로 미주항로를 개척한 선박이며 우리는 ‘호화선 미스코리아’라 불렀다.― 와 역시 7000톤급의 전시(戰時)형 리버티(Liberty) 형인 ‘동해호’와 ‘서해호’가 고작이었다. 또한 역시 전시선형인 3500톤급의 시마비 ― 실제 선형은 C1, MA, V1 형이었으나 시마비로 잘못 불리고 있었음.― 가 8척 가량 있었다. 그 중에서 제주호와 장항호, 묵호호 등 3척이 동남아 정기항로에 투입되어 있었고, 1800톤 급의 볼틱형 선이 4척 있었는데, 중유를 연료로 하는 증기 기관선이어서 채산성이 나빠 대부분 부두에 계류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이 ‘시마비’형은 당시로서는 대형선에 속했다. 제주호의 첫 항차 때에는 방콕에서 화물창에 곡물 3500톤과 갑판 위에 소 180마리와 돼지 250마리를 싣고, 홍콩에서 하륙한 일이 있었다. 실습항해사인 나의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는 홍콩에 소를 하륙하기 전에 소의 숫자를 헤아리는 것이었다. 돼지는 나무 곽에 넣어 별문제가 없었으나 소는 갑판에 고삐를 매어둘 수밖에 없었다. 파도가 심할 때 소들에게 제대로 물을 주지 못하면, 고삐를 끊고 좌왕우왕 하다가 더러 바다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 통에 일주일간의 항해 도중 소를 56마리나 잃었다. 소에 대한 관리책임을 다하였음을 입증하려면, 현재 남은 소의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눕혀 둔 데릭 붐(Derrick Boom, 짐을 들어 올릴 때 쓰는 경사진 기둥) 위를 뛰어다니면서 소의 수를 세었다. 이상한 선상 ‘카우보이’가 되었지만, 여덟 번을 헤아려도 숫자가 한번도 일치되지 않았다. 파도에 마구 흔들리는 배의 갑판 위에서 제멋대로 움직이는 소를 헤아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 때는 갑판이 마치 넓고 넓은 운동장 같아 보였다.

제주호의 항로는 부산~오오사까/고오베~나고야~요코하마~홍콩~싱가폴~방콕~페낭~방콕~홍콩~오끼나와~부산이 기본항로이고, 화물의 형편에 따라 1~2개 항은 건너뛰기도 했다. 또한 마닐라, 치타콩항 등이 추가되기도 하였다. 한 항차에 70~75일이 소요되는 정기운항 스케줄이었다. 10월 초순에 부산항에 입항하여 2일간 정박한 후 일본으로 출항하였다. 이번 항차는 화물집하 사정이 나빠 오오사까/고오베~나고야-요코하마가 빠지고, 고꾸라 항에서 하륙하는 고령토 약 1000톤과 우골(Cow-bones) 약150톤이 실렸다. 당시의 한국 경제는 보잘 것이 없었다. 수출화물이라야 쌀, 사과, 밤 등 소량의 농산물과 가마니, 새끼, 볏짚 등 잡화가 주류였고, 대량화물로는 무연탄, 철광석, 고령토, 우골(도자기 원료) 정도였다.

출항할 무렵 필리핀의 ‘루손’섬 부근에 태풍이 하나 발달하면서 서서히 ‘남사군도’ 쪽으로 북상한다는 기상예보를 받았다. ‘고꾸라’항에서 하륙을 마치고 이틀정도 태풍의 진로를 관찰하면서 대기하였지만, 태풍이 거의 움직이지 않자 선장이 일단 출항을 선언하였다. ‘붕고’ 해협과 동중국해를 거쳐 남중국해 쪽으로 항해를 계속하여 출항 2일 만에 가고시마 남단에 도달했다. 오후당직(16:00~20:00)을 마치고 사관실에서 야식을 하고 있을 때, 선장, 1항사, 통신장이 모여 기상도를 놓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 동안 주춤거리던 태풍이 남사군도 부근에서 진행방향을 북북동으로 꺾으면서 진행속도가 25km로 증가하였고, 잘못하면 내일 오전쯤에 태풍과 조우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인근의 ‘다네가시마’. ‘아마미오오시마’ 등 어디에도 피박지가 없다는 점과 태풍의 진로변경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속 20㎞ (12노트)의 선박이 25㎞로 진행하는 태풍을 피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 집중논의 되었지만, 드디어 선장의 최종결정이 내려졌다. 선장은 침로 변경 없이 돌파한다는 것과, 특히 아침(04:00~08:00) 당직인 3항사 B ―당시 이 배는 정기선이라 1항사가 담당하는 하역관계 일이 너무 많아 3항사를 두 명 태우고 3항사 B가 1항사의 당직을 맡고 있었다.―와 보조당직인 나에게 주의사항 설명과 함께 여러 가지 당부를 했다. 물론 전 선박에 태풍 대책이 하달되었고, 대부분의 이동하기 쉬운 물건은 밧줄로 묶어두는 랫싱(lashing)을 이미 마친 상태였다.

이튿날 새벽 4시에 당직교대를 알려왔을 때, 배는 이미 상당히 흔들리고 있었다. 당직교대에 나서다가 혹시나 하고 책상 위에 있는 타이프라이터를 푹신한 소파 위로 옮겨놓고 당직에 임하였다. 본선의 침로는 195°였고 좌현에서 부는 바람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브리지(Bridge) 당직조는 앞에서 말한 3항사 B와 나, 그리고 2타수(2nd Quartermaster)와 1등 수부(Head Sailor)였다. 오전 8시가 가까워지면서 배는 더욱 심하게 흔들렸고, 특히 선체가 물을 때릴 때는 ―Water Hammering, 피칭이 심해지면서 선수가 내려앉으며 해면을 때릴 때 나는 천둥치는 소리― 굉장한 소리와 함께 선체가 부르르 떨곤 했다. 3항사 B가 몇 번의 구토를 하면서 화장실을 들락거리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오전 8시에 3조당직과 교대되었지만 3항사 A의 얼굴은 완전히 사색이 되어 있었다. 조타장(Head Quartermaster)의 표정은 조금 나아 보였지만, 보조타수를 맡는 2등 수부는 올라오다가 바로 화장실로 직행하였다는 이야기가 들린 뒤로 영영 브리지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3항사 A가 사과 한 개와 밀감 한 개를 나에게 내밀면서, 지금 내려가 보아야 모두들 멀미하는 통에 식사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으니 이걸로 끼니를 때우라고 했다. 그리고는 화장실에 가야겠다며 나에게 조금만 더 버티어 줄 것을 당부하고는 브리지에서 내려가 버렸다.

배는 이미 엄청나게 흔들리고 있었다. 롤링이 우현 42˚, 좌현 37˚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었고, 도저히 갑판에 서 있을 수 없어서 브리지 기둥을 애인처럼 껴안고 매달린 채로 당직을 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멀미를 하지 않기로 소문나 있었다. 그래서 신체의 균형을 담당하는 내이(內耳)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일종의 병신이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었다.

이렇게 나와 ―실습생은 2명이었지만 1명은 기관부의 실기사였으므로 실항사는 나 혼자 뿐이었다.― 조타장 둘이서만 브리지에서 버티며 항해를 계속하기를 3시간쯤 지났을 때, 산더미 같은 파도가 좌현선수 쪽에서 선박을 덮쳤고, 브리지 창문을 때렸다. 워낙 큰 파도였다. 배가 뒤집어 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브리지 중앙에 매달린 경사계(Clinometer:선박의 경사각도를 재는 장치)를 얼른 쳐다보았다. 선박이 우현 45˚경사에서 가까스로 복원되는 중이었다. 파도에 시달리는 일엽편주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일까? 기둥에 매달려 있는 동안 배는 두 번 정도의 횡요를 반복 했고, 또 다시 거대한 파도가 배를 덮쳤다. 엄청난 파도가 연속적으로 선체를 내려치는 요란한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안간힘을 다해 브리지 창밖을 주시하고 있을 때, 선장이 물에 흠뻑 젖은 채 비틀거리며 브리지로 올라왔다. 바로 속력을 저속(slow)으로 낮추라는 지시와 함께 몇 번의 전타와 정침으로 순항(Scuding:선박의 목적항과 관계없이 선박의 동요가 가장 적은 침로와 속력으로 항주하는 방법)을 명령하였다. 이때의 침로는 280˚였고, 바람을 좌현 선미 쪽에서 받고 있었다. 배의 동요가 약간 완화되자 선장이 좌현 산책갑판(Promenade deck)의 파도에 깨진 목제 문으로 물이 넘쳐들어 상갑판 복도까지 적시고 있다고 했다.

이 배는 당시 건현(Free board:수면에서 주 갑판까지의 높이이며, 선박의 예비 부력을 나타내는 주요 지표임)이 4.5m 정도였다. 그 위에 상갑판 까지 2.3m와 산책갑판까지 2.2m 정도가 더 있었으므로, 산책갑판의 목제문은 수면에서 8.8~10.8m 사이에 있었는데도 이 문이 깨어져 버린 것이다. 이 제주호도 대부분의 다른 배들과 마찬가지로 주갑판(Main deck)과 중갑판 아래로는 현문은 없고 헷치 웨이(Hatch way) −갑판을 통하여 상하로 출입하는 출입문으로 문은 철제이고 문을 닫은 후는 도그 랫치(doglatch)를 돌려 단단히 잠그게 되어 있다. −로만 접근이 가능했고, 주 갑판과 상갑판 위의 상부구조물(대부분의 선실과 식당, 취사장 등이 이 두 갑판에 배치되어 있음)에도 도그 랫치가 있는 철제문이다. 그러나 그 위의 산책갑판과 브리지문은 물이 여기까지 때리는 일은 거의 없으므로 나무문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선장실, 1항사실, 통신실, 통신장실 등이 있는데, 여기로 통하는 나무문이 파도에 깨어져 버린 것이다.

침로 280˚, 전진 저속으로 순항을 시작한 후 배의 횡요(rolling)가 35˚안팎으로 줄어든 것을 확인한 선장이 이대로 진행하면 중국대륙에 접근하게 된다고 했다. 의심스러우면 배를 반대침로로 돌려 좌현 또는 우현 선수방향에서 파도를 받게 하라며 침로 및 속력변경의 전권을 주겠다고 했다. ―평소에는 속력 변경은 선장의 허가를 얻어야 하고, 침로 변경도 일시적이 아닌 장시간의 경우는 선장의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 상황에 따라 먼저 조치를 취한 후에 선장에게 보고하라는 것과, 선원과 사관 양성기관에서 지원자를 뽑을 때 선박의 동요에 견디는 테스트를 하지 않아 선원 중에 파도에 약한 사람이 상당수 있으니, 이 비상사태에 실습항해사 혼자 장시간 당직을 서야 하는 사태가 생겨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자네만 믿네!” 라고 부탁을 하고는 브리지에서 내려가 버렸다.

황당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 정도 지난 오후 4시경에, 갑자기 하늘이 파랗게 개이고 바람이 멎으면서 배 주위에 잠자리가 수없이 날아들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지만 태풍의 중심에 들면 상승기류로 하늘이 맑게 개이고, 풍향의 급변으로 파도조차 잔잔해진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잠자리는 태풍이 육지 가까이를 지나칠 때 둥글게 회오리를 그리는 바람에 갇혀서 빠져나가지 못한 것이 아닐까 짐작되었다. 일단 침로를 180˚ ―최초 침로는 195˚였지만 3시간가량 저속으로 서진 한 것을 감안하여 이렇게 하였다.― 로 정침하고 배의 속력을 전속으로 올린 후, 선장에게 보고하였다. 선장이 브리지에 올라와 상황을 돌아본 뒤, 아무래도 우리 배가 태풍의 중심에 들어선 것이란 자네의 판단이 맞은 것 같다며 1~2시간 이내에 풍향이 바뀌고 다시 엄청난 강풍이 불 것이라 했다. 그때는 다시 순항(scuding)을 해야 하는데 본선의 위치를 어떻게든 아는 방법으로 강구하라 하고 이른 뒤, 전 선내에 방송으로 현재까지의 피해상황을 조사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당직조인 2타수가 조타장과 교대되어 조타장이 각 부의 빌지 사운딩(Bilge sounding : 각 창에 채인 폐수를 측심하는 것)에 임하였고, 각 부의 점검결과가 보고 되었다. 갑고수(Dock store keeper)가 갑판창고는 별 이상이 없으며 2번 선창의 타포린(Tarpaulin:선창에 철제 덮개를 닫고 위에 씌우는 천막)이 3장 중 2장이 완전히 찢어졌으나 침수는 없는 것 같아 예비품으로 교체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조타장은 빌지 사운딩 결과 이상 없음을 보고하였고, 기관실도 이상 없다는 보고를 해왔다. 다만 산책갑판의 좌현 측 목제 문이 수리불가능 할 정도로 파손되었고, 좌현 갱웨이 사다리(gangway ladder:선박을 부두에 계류할 때 사람이 오르내리는 사다리이며 길이가 10여 미터이고 항해 중에는 주갑판까지 들어 올려 현측에 붙들어 매어두는 사다리)가 자국도 없이 떨어져 나갔다는 보고가 있었다. 취사실에는 깊이 간수한 저장용만 남고 현재 사용 중인 도기로 된 식기는 완전히 박살이 났다. 또한 선반이 무너지면서 증기 밥솥을 때려 다섯 개중 한 개의 밥솥이 깨어지고 증기파이프 하나가 부러져 그 파이프를 ‘메꾸라’(막아서 증기가 새지 못하게 하는)하는 수리를 시작하였다는 보고를 해왔다. 그 외에 5대의 타이프라이터 중 3대가 박살이 난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와중에 커피포트를 기둥에 붙들어 매고 삶았다는 삶은 계란이 브리지 당직자인 나에게 배달되어왔다. 계란을 따라 온 사과 한 개와 함께 주린 배를 채우고 다시 당직이 계속되었다. ―이때가 나의 당직이 시작된 지 12시간이 경과되었으므로 차례로 치자면, 다시 나의 당직 시간인 셈이다.―

한 시간여의 고요하고 잔잔한 시간이 경과한 후에 예측한 대로 서풍이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파도와 바람도 점점 드세져서 침로를 120˚로 정침한 뒤 저속전진 순항을 선장에게 보고하였다. 오후 여덟 시가 되었다. 나의 당직시간은 끝났지만 교대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와 2타수와 교대한 조타장 둘만의 당직은 계속되었다. 순항한 덕분에 횡요는 35˚안팎이었고 21시 30분경에 그날 중 두 번째의 천측을 하여 개략의 위치를 내보았다.

배는 오키나와 나하항의 서쪽 약 100해리에 있었다. 아침에 천측한 위치에서 14시간 동안의 실제항행거리(Distance made good)는 50해리 정도여서 실제 평균시속은 3.5노트 정도였다. 이 무렵 선장이 올라와 상황을 보고받고는 바람이 북서풍에 가까워졌다며 침로를 200˚로 바꾸었다. 속력은 반속(half speed)으로 지시하고 바람이 좀 더 잦아들면 전속으로 올리라고 당부한 뒤, 브리지에서 내려갔다. 그로부터 여덟 시간 남짓 둘이서만 계속 당직을 설 수밖에 없었다. 아침 5시반경에 다시 천측을 하여, 선박의 위치가 대만 남단 부근에 있음을 확인할 무렵에야 3항사 B와 2타수가 거의 동시에 올라와

“실항사! 미안해!”

라며 당직교대를 해주었다.

“취사장에 내려가 혹시 먹을 것이 있으면 무엇이건 먹도록 하게!”

하루 2교대로 4시간씩 8시간동안만 서는 당직을 무려 26시간동안 혼자서 연속으로 서고 브리지에서 내려올 때,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침대에 몸을 던지자말자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정세모, 한국해양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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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해양과 문학> 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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