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n-Tiki 항해

등록일2020-07-10

조회수90

 

Kon-Tiki 항해

김 종 선

 

이 글은 필자가 승선 근무중에 견문한 근대 항해기를 기초로, 이후 해양수산부 재임시 노르웨이 오슬로에 방문 하였을때 콘티키박물관에서 입수한 책, Kon-Tiki Expedition 등 관련 자료를 종합하여 번역 정리한 것이다. 원저자는 노르웨이 출신 인류학자이자 생태학자인 도오 헤어달이다.<월간 해바라기 편집자>

 

1914년 Norway의 작은 마을 Larvik에서 태어난 도모 헤이어달 [Thor Heyerdahl(1914~

2002)]은 어려서부터 동물학과 생태학에 흥미를 가지고, 탐험가가 되어 멀리 이국적인 나라로 여행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Oslo 대학에서 생태학과 지리학을, 그리고 Polynesia 도서관에서 인류학을 공부한 후 남태평양의 Marquesas 군도의 Fatu Hiva섬에서 연구를 목적으로 아내와 함께 약1년 동안 Polynesia 원주민과 같은 방식으로 생활을 하였다.

이 때 그는 Polynesia의 암석조각(岩石彫刻) 및 기타 유적들에서 남미의 유적과 많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고 식물의 생태, 바람, 해류 및 원주민에 의해 전승되어 온 역사에서 Polynesia 사람들의 선조들이 동쪽, 즉 남미에서 도래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Hawaii에서 New Zealand까지, Samoa에서 Easter섬까지 유럽의 4배 크기나 되는 광활한 해역에 섬으로 격리된 Polynesia 사람들이 공통언어의 방언을 사용하고 있으며 지식인들은 거의 모두 최초 이주시 부터 당시 까지 모든 추장의 이름을 줄줄이 외고 있었고 Peru의 Inca인들이 사용하였던 결승문자를 이용하여 그들의 기억을 보완하였다. 태양이 뜨는 동쪽의 대륙에서 최초로 이주한 추장의 이름은 Tiki라 하였으며 이 전승의 내용은 Polynesia 거의 모든 섬에서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한편 남미 Peru 지역에서 고대문명을 일으켰던 Inca의 전설에 의하면 대제사장인 동시에 최고 통치자였던 Kon-Tiki (태양의 신 또는 태양의 아들을 의미)는 Coquimbo 계곡에서 쳐들어 온 Cari 추장의 공격을 받아 Titicaca 호수의 한 섬의 전투에서 종족을 거의 다 잃고 몇몇 살아남은 가까운 동료와 함께 태평양 연안으로 도주하여 서쪽 바다 건너로 사라졌다 한다. 이 불가사의한 사람들은 남미 원주민과는 달리 키가 크고 흰 피부와 긴 턱수염을 가지고 있었으며 Inca족들에게 건축과 농업기술을 전수하였고 Titicaca 호수 연안에 많은 유적을 남겼다.

 

유럽인들이 최초로 태평양 제도에 도착하였을 때 다수의 원주민들이 흰 피부와 턱수염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여러 섬에서 한 가족 전체가 눈에 띄게 흰 피부와 붉은 색부터 금발까지 다양한 머리 색깔과 옅은 푸른 눈 그리고 거의 셈족처럼 매부리코를 한 경우도 있었으며 한편 다른 Polynesia 인들은 갈색 피부에 흑발이고 코가 낮았다. 머리가 붉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최초 추장인 Tiki의 직계후손이라고 하였다.

또한 유럽인들이 처음 태평양제도에 도착하였을 때, Polynesia 지역 밖의 섬에서는 재배되지 않는 고구마가 Easter섬, Hawaii 및 New Zealand와 그 밖의 여러 Polynesia 지역에서 다량으로 재배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Tiki가 몸소 고구마를 가지고 왔다고 한다. New Zealand 전설에도 고구마는 카누가 아닌 뗏목에 싣고 왔다고 전하여 진다. 유럽인들이 America에 도달하기 전 지구상에서 고구마를 재배하는 곳은 America 뿐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구마는 Polynesia어로 󰡒Kumara󰡓인데 이것은 고대 Peru 원주민 말과 일치한다.

또 하나 Polynesia 사람들의 중요한 재배식물은 호리병박이다. 박을 불에 쪼여 말려서 물통으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고대 Peru 지역에서도 널리 사용되었고 Peru 해안의 선사시대 고분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호리병박은 고구마와 마찬가지로 바다에 떠다니다가 전파될 수 있는 식물이 아니다. 이 호리병박의 Polynesia 이름은 󰡒Kimi󰡓인데 이 또한 중앙 America 원주민의 말과 일치한다.

고대 Polynesia인들은 대단한 항해술을 가지고 있었다. 낮에는 태양을 밤에는 별을 관측하여 방향을 잡았고 그들의 천체에 대한 지식은 놀라운 것이었다. 지구가 둥근 것과 적도, 북회귀선, 남회귀선 등과 같은 난해한 개념을 알고 있었다. Hawaii에서는 둥근 호리병박 껍질에 해도를 새겼고 어느 섬 사람들은 나뭇가지로 엮어서 짠 지도에 조개껍질을 매 달아 섬을 표시하고 잔가지로 해류를 표시하였다. Polynesia 사람들은 5개의 행성을 알고 있었고 이를 󰡐떠돌이 별󰡑이라고 불렀으며 200여개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항성과 이들을 구별하였다. Polynesia의 유능한 항해사는 시간별, 계절별로 별들이 하늘의 어느 위치에서 떠오르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섬에 어느 별들이 정중하는지를 알고 있었고 연중 내내 자신의 섬에 정중하는 별의 이름을 따서 섬의 이름을 정하기도 하였다. Tahiti의 추장이 2,000마일 이상이나 떨어진 Hawaii를 방문할 때 조타수는 태양과 별을 보고 정북쪽으로 항해하여 Hawaii에 정중하는 별이 바로 머리위에 왔을 때 서쪽으로 직각으로 전향, 항진하여 Hawaii에 도달하였다.

Heyerdahl은저서 󰡒American Indians in the Pacific󰡓에서 Polynesia인들의 남미로부터 도래이론을 전개하였으나 당시 학계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스스로 이를 증명해 보이려고 고대 Peru 원주민이 연안에서 어로 및 수송에 사용하던 것과 동일한 전통적인 방식의 뗏목을 타고 해류와 바람에만 의지한 채 남태평양을 횡단하기로 한다. Peru의 Andes 정글에서 베어 온 balsa원목을 1.75 인치 삼밧줄로 엮고 갑판은 대나무쪽으로 짠 매트를 깔았으며 그 위에 역시 대나무 기둥과 매트로 선실을 만들고 바나나 잎으로 지붕을 얹었다. 선실 앞쪽 갑판에는 단단한 mangrove로 양현측에서 중앙으로 경사진 마스트를 세우고 돛을 달았으며 원목과 원목사이의 틈에는 판자를 수직으로 선저에 끼워 쐐기와 로프로 고정함으로써 평행 keel 또는 center board 역할을 하여 보침성을 높이고 19피트길이의 조타용 노를 선미중앙에 달았다. 못은 전혀 사용치 않고 로프로만 제작하였으며 󰡒Kon-Tiki󰡓로 명명하였다. Kon-Tiki호의 크기는 중앙의 가장 긴 balsa원목의 길이가 45피트, 측면의 길이는 30피트, 폭은 18피트였다.

1947년 4월28일 Heyerdahl과 그의 동료 5인은 Kon-Tiki호에 4개월분의 식량과 물을 싣고 Peru의 Callao항을 출항하여 Humboldt 해류 (남극 쪽에서 Chile연안을 타고 북상하다가 Peru 앞바다에서 서쪽으로 전향하여 흐르는 해류)와 남적도해류 (Peru 북부에서 서쪽으로 흐름) 그리고 남동풍과 동풍을 타고 101일 동안 4,300 마일을 항해한 끝에 마침내 8월7일 남태평양 Tuamotu군도의 Raroia 산호초에 도달, 좌초하였다. 6인의 탐험대원중 항해경험이 있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고 Heyerdahl 자신을 포함한 나머지는 모두 바다와 항해의 문외한 들이었다.

 

Kon-Tiki는 현대의 상선들이 대양항해중 경험할 수 없는 많은 흥미 있는 경험을 한다. 건현이 대단히 낮기 때문에 항해중 날치를 비롯하여 오징어, 참치, 갈치와 닮은 snake mackerel 등이 갑판으로 뛰어 오르고, 때로는 이들이 얼굴과 가슴에 부딪쳐 갑판으로 떨어지기도 하였다. 아침식사는 주로 날치 튀김이었다. 무게가150-200 파운드 되는 다랑어를 낚아 며칠간 식량으로 사용하였고, 돌고래, 대형 상어를 여러 마리 낚시로 잡아 올렸으며 바다거북, 고래, 고래상어 기타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뗏목을 찾아왔다. 야간에는 프랑크톤이 발하는 인광으로 아름다운 형광 빛의 향연을 감상하기도 한다.

순풍을 받고 순항한 때에는 하루에 70마일을 항주하기도 하였고 바람이 약한 날은 20-30마일을 항주하였다. 황천항해중에는 모든 통나무가 제각기 상대적으로 움직여 갑판이 수평상태를 유지하지 못하였고 통나무와 로프의 마찰음과 엄청난 바람과 파도소리 그리고 뗏목의 동요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물통에 담아온 청수는 2개월이 지나자 변질되어 마실 수가 없게 되어 squall이 내릴 때 선실지붕을 이용하여 빗물을 받아서 사용하고 이때를 놓치지 않고 갑판에서 샤워를 하였다. 비교적 잔잔하고 주변에 상어가 없는 날은 뗏목 아래로 잠수하여 로프를 점검하기도 하고 갑판에 묶어 맨 로프를 잡고 바다 물속에 뛰어 들기도 하였으며 고무보트를 타고 멀리 나아가 Kon-Tiki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항해 중 내내 흘수의 변화는 거의 없었는데 이것은 balsa 원목이 해수를 흡수하여 침하하는 량이 식량 등 소모품의 소비에 의한 부상으로 상쇄된 것 같다.

Kon-Tiki 항해의 성 공으로 이 항해기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70개 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수백만부가 판매되었으며 이에 관한 영화는 1951년 최우수 documentary로 Oscar상을 수상하였다.

Heyerdahl은 1969년 Africa Chad호수에서 갈대배를 만드는 사람을 동원하여 Egypt의 전통방식대로 갈대(papyrus)로 만든 배 󰡒RA󰡓호에 7명이 승선하고 Morocco의 Safi항을 출항하여 미국으로 향하였으나 2개월 항해 후 갈대다발이 해체되어 카리브 도착 직전에 침몰하고 말았다. Heyerdahl은 남미 Andes 고원지대에 위치한 Titicaca 호수에서 갈대배 건조자를 동원, 다시 papyrus 배를 건조하여(RA II호) 1970년 Morocco의 Safi항을 출항, 57일만에 Barbados에 도착하였다. 이번에는 갈대가 하나도 이탈되지 않았으나 항해의 중반 이후는 갈대가 물을 흡수하여 갑판이 해수면과 닿은 채 항해하였다. Heyerdahl은 후에 Euphrates와 Tigris강 유역에 사는 갈대를 잘 아는 아랍인으로부터 종전에 만든 갈대배의 실패원인이 갈대채취의 시기를 잘 못 선택하여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즉, 갈대의 완전한 부력을 위해서는 8월중에 채취하여야 하는데 RA II에 사용된 것은 12월에 채취된 것이었다.

Heyerdahl은 고대 Egypt 문명과 Indus 문명이 해상교통을 이용한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믿고 이를 시연해 보이기 위해 1977년 Iraq에서 또 하나의 갈대배를 건조하여 󰡒Tigris󰡓로 명명하였다. 이번에도 Titicaca호수의 갈대배 건조자를 동원하였다. 미국, 이태리, 러시아 등 다국적 선원이 승선하여 5개월 동안 페르시아만, 아라비아해, Pakistan의 Indus강 어구를 거쳐 다시 아프리카로 항해하여 홍해입구의 Djibouti에 도달하였으나 전쟁에 항의하는 뜻으로 갈대배를 불태워버렸다.

Kon-Tiki와 RA II는 Oslo 소재 Kon-Tiki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Norway의 영웅 Thor Heyerdahl은 2002년 4월18일 Italy의 자택에서 87세의 나이로 조용히 영면하였다.

 

ㅣ자료출처 : 해기 2007년 4월 호

g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