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봉의 앞바다 - 대양의 분노(忿怒)

등록일20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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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봉의 앞바다 - 대양의 분노(忿怒)

이 준

 

Wing Bridge(조타실 옆쪽에 양쪽 날개 모양으로 나 있는 보조 조타구역)에 나가 보았더니 미지의 그 시커먼 물체는 다름아닌 아프리카 갈매기였다.

크기가 무척 컸다(우리나라 독수리의 2-3배정도의 크기였음). 정말 그렇게 큰 갈매기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하였다. 아프리카 산(産)은 모두가 이렇게 대형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징어도 그렇고 갈매기도 그러하니..

다시 조타실로 들어온 뒤 얼마 후 아까의 그 갈매기가 조타실 앞 창문에 양 날개를 일자로 활짝 편 채 창문에 수직으로 거의 붙다시피 하여 날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덕택에 아프리카 갈매기를 자세히 관찰 할 수 있었는데 아프리카 사람들을 닮았는지 거무틱틱한 얼룩반점에 흑갈색을 띄고 있었으며 눈빛이 무척이나 매섭고 음흉스럽고 사나워 보였다. 갓난아이는 충분히 낚아 채어 갈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아주 흉측 스러웠고 또 한편으론 무시무시했다. 순간적인 위협 마저 느낄 정도 였다. 다행히 두꺼운 창문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갈매기는 얼마나 귀엽고 앙증맞은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부산 갈매기(?)는 얼마나 의젓하고 점잖은가? 그리고 눈 주위에 빨간색 원형테를 두르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손가락으로 잡고 있는 새우깡을 채어가는 날렵한 비행신기를 지닌 영특한 울릉도 갈매기는 또 어떠한가? 온통 백색의 귀여운 갈매기들을 보면 너무도 평화스럽게 느껴지고 때로는 천사 같이도 느껴진다.

파도에는 파정과 파저가 있다. 파도의 가장 높은 부분을 파정(波頂) 이라 하고 가장 낮은 부분을 파저(波底)라 한다.

본선이 파정에 올라왔을 때 Bridge(조타실-선박을 조선하는 곳)에서 내려다 보면 가마득한 아래쪽에 바다가 보인다. 사인 곡선을 그리며 Pitching(선체가 앞뒤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현상)을 했는데 본선이 파도를 타고 올라갈 땐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하늘뿐이다. 선수가 위로 들려 하늘을 향하기 때문이다. 이때는 행여나 본선이 뒤로 자빠져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가지나 않을까 하는 극도의 불안감과 초조감을 느끼게 되고 반대로 파도의 꼭지 점을 지나 선수가 내려올 때에는 온통 소용돌이 치는 무시무시한 바닷물 밖에 보이질 않는다. 이때는 행여나 본선이 바다 속으로 다이빙하여 바닷속 깊숙히 가라앉아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엄청난 공포감에 휩싸이게 된다.

태풍의 중심에서 태풍의 진행방향으로 선을 그었을 때 이 선을 축선이라고 하며 북반구에서는 이 축선의 오른쪽 반원이 위험반원(危險半圓) 이고 왼쪽 반원을 가항반원(可航半圓) 이라고 하며 남반구에서는 북반구와 정반대가 된다. 이 때 본선은 위험반원의 전반부에 위치해 있었다. 인도양과 대서양의 조류가 교차하고 아프리카 대륙의 남쪽 끝자락 언저리 인지라 거대한 삼각파(三角波)도 이따금씩 몰려왔다.

그러다가 한번씩 엄청난 파도에 본선이 강타 당했을 땐 본선의 동요는 극심하였다.

거세게 휘몰아치며 거칠게 윙윙거리는 바람소리와 맹렬하기 그지없는, 용솟음치며 포효하는 파도소리로 인하여, 평온한 날씨에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본선의 엔진소리 마저도 사나운 바람소리와 성난 파도소리에 잠겨 이때는 아예 들리지도 않았다.

본선의 선수는 선수대로 Twist를 하고 선미는 선미대로 Twist를 함과 동시에 본선은 위험각도 까지 Rolling(선박이 좌우로 기울어 짐)을 했었는데 이 때 선실에서 각자의 사물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휴게실에 있던 레코드 판들이 떨어져 깨어지는 소리, 식당에서 그릇이 떨어져 와장창 부숴지는 소리 ,떨어진 물건들이 이리저리 굴러 다니는 둔탁한 소리 등등이 복합적으로 혼합되어 들렸으며 특히나 금속성의 찌그덕 찌그덕 거리는 선체의 뒤틀림소리는 온몸에 소름을 돋게 하였고 이처럼 둔탁한 굉음들로 인하여 잠시나마 세찬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를 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Pitching 을 할 때엔 조타수 모씨가 얘기했던 것처럼 본선의 선수가 바닷물 속에 3분의 1가량이 잠겼다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본선의 선수가 바닷물 속에 잠겼다가 부력과 너울을 타며 바다위로 솟구쳐 올라올 때는 엄청난 양의 바닷물을 토해내었다. 난 이때 처음으로 구명의 (Life Jacket)를 입었었고 그 후로도 선상 훈련 시 입은 경우를 제외하곤 승선 중에 구명의를 입었던 적은 없었다.

만에 하나 본선이 잘못되는 날에는 대양의 거치른 바다 위에서 한낱 구명의가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만은..

얼마 전에 상영되었던 실제로 미국에서 있었던 실화를 소재로 한 미국영화 󰡒Perfect Storm󰡓 이란 영화를 보신 분들은 그 영화의 북태평양 상에서 조우한 거대한 태풍과 혈투를 벌이며 태풍 속을 뚫고 나가던 숨막히는 장면들을 연상하면 되리라 생각된다. 결국 그 영화 속의 중형급 어선은 전복되어 선장을 포함한 선원 모두가 선박과 운명을 같이 하였지만..

참으로 아찔했던 순간들을 거대한 본선은 용하게도 잘 버티어 주었다.

그렇게 생사의 기로에서 숨 막히는 시간들 속에 A급 태풍과의 혈전은 되풀이 되며 계속되었고 약 하루정도의 시간 동안 극도의 긴장과 불안 초조감 속에서 태풍과 사투를 벌인 후 태풍의 눈을 관통하여 가항반원으로 넘어갔고 시간이 흐를수록 본선은 태풍의 중심에서 점차 멀어지며 태풍의 영향권을 벗어나 희망봉을 돌아 미국 Baltimore항을 향하여 정상적인 항해를 계속했다.

1985년 하선한 후로도 해마다 여름철에 태풍이 올 때면 난 태종대의 자갈마당 해변 가를 찾아 해변의 바위에 부딪혀 하늘높이 솟구쳐 오르는 파도를 보면서 약 10여년 간에 걸친 옛 승선시절을 회상하며 끝없는 상념에 잠기곤 한다.

 

◇ 자료출처 : 해기 2005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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